글/ 육문(陸文)
【정견망】
1. 근본구별
속인과 수련인은 표면적인 차이가 크지 않은데 양자 사이의 근본적인 구별은 어디에 있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인과 속인 간의 이 구별은, 표면상에서 보면 어떠한 구분이 없다. 대법을 수련했다 해서 오늘 당신이 바로 신과 같다는 것이 아니다. 형상상에서는 변화가 없다. 당신이 신의 이 길을 걸어감에 유일한 변화는 바로 당신이 속인과 문제를 사고하는 방식에서 같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수련함에 보기에는 매우 정진하는데, 법 공부도 하고 연공도 하지만 안을 향해 찾지 않는다. 안을 향해 찾지 않는다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그것은 바로 속인이 아닌가.”
(《2015년 뉴욕법회설법》)
현재 내가 인식한 것은 다음과 같다. 경서를 들고 매일 법을 공부하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매일매일 연공하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진상을 알리면서 자칭 대법제자라고 하면서 스스로 정진실수(精進實修)한다고 자랑하지만 사실 꼭 그렇지는 않다. 대법제자는 표준이 있는 것으로 오직 무조건적으로 안으로 찾을 수 있어야지만 비로소 대법제자가 될 수 있다.
개인적인 이해로는 적극적으로 바쁘게 일하는 것과 정진실수는 겉보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진정한 차이는 마음에 있으니 안으로 찾는가 여부다. 다시 말해 일을 하는 것이 수련이 아니며, 바쁜 것이 정진이 아니고, 적극적인 것이 착실한 수련은 아니다. 열정・노력・대가를 치르고 감당하는 표현은 모두 닦음이 아니고, 남에게 미루지 않고 꾸미지 않으며 안으로 찾고 자신을 닦는 것만이 비로소 닦음이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수련함에 보기에는 매우 정진하는데, 법 공부도 하고 연공도 하지만 안을 향해 찾지 않는다. 안을 향해 찾지 않는다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그것은 바로 속인이 아닌가.”
(《2015년 뉴욕법회설법》)
또 《홍음》 〈유위(有爲)〉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절을 짓고 신을 모시느라 정말 다망하지만
유위란 한낱 헛된 노릇임을 어찌 알리요
어리석고 미혹되어 서천(西天) 길 망상하나니
더듬더듬 밤길에 달을 건지고 있네”
일하느라 바쁜가 아니면 마음을 닦는가의 문제인데 만약 바쁜 것이 일이라면 설령 제아무리 많이 하고 제아무리 큰 고생을 겪을 지라도 역시 사람이 사람의 일로 바쁜 것이라 공연히 바쁘기만 하고 헛수고라 고생만 하고 공이 없을 수 있다.
2. 안으로 찾음과 세 가지 일
안으로 찾는 것과 세 가지 일은 모두 사부님께서 하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양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세 가지 일을 한다는 구실로 안으로 자신을 찾지 않아도 되는가? 양자 사이에는 서로 대체할 수 없고 임의로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도 없는 관계로 어느 하나라도 없거나 폐지할 수 없는 관계다.
어떤 사람은 세 가지 일을 하느라 바빠도 즐겁게 하지만 성질을 내기만 하면 폭발한다. 그는 자신이 바른 일[正事]을 하고 있기에 화를 좀 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다. 세 가지 일을 구실로 삼아 안으로 찾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긴다면 이는 틀려도 크게 틀린 것이다. 마성(魔性)을 지니면 수련이 아닌 것으로 진상도 제대로 알릴 수 없고 사람을 구할 수도 없다.
“사실 당신들이 넘은 고비는 바로 당신들의 마성을 제거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한 차례 한 차례씩 각종 구실 또는 대법(大法)으로 덮어 감추어 지나갔으며 心性(씬씽)을 제고하지 못했고 한 차례 한 차례씩 기회를 놓쳤다.”(《정진요지》〈재인식〉)
수련인이 안으로 찾는 것은 마땅히 없는 곳이 없어야 하며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일에서든 관통되어야 한다. 자신을 찾음은 아무런 조건이 없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아무런 구실이 없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남을 지적하고 원망하며 화를 내거나 억울하게 여긴다면 이는 모두 밖으로 찾는 것으로 모두 가로 막고 은폐하고 마성을 방종(放縱)하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며 제고를 포기하며 구세력(舊勢力)의 배치를 걷는 것이다.
사실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가운데 안으로 찾고 심성(心性)을 닦으며 덕행(德行)을 중시해야만 비로소 가장 착실한 것으로 제고도 가장 빠르다. 덕을 중시하지 않고 심성을 지키지 않으며 안으로 찾지 않으면서 세 가지 일만 한다면 바로 속인이다. 세 가지 일을 구실로 삼고 안으로 찾지 않으면 또한 마성을 수호하고 집착을 은폐하는 것으로 장기간 이렇게 해나간다면 극히 위험하다.
3. 안으로 찾지 않으면 극히 위험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이란 바로 안을 향해 찾는 것이라, 맞든지 맞지 않든지 모두 자신에서 찾아야 하며, 닦음이란 바로 사람의 마음을 닦는 것이다. 늘 지적과 비평을 받아들이지 않고 늘 밖을 향해 지적하며, 늘 다른 사람의 의견과 비평을 반박하는 그것이 수련인가? 그것이 어찌 닦는 것인가?”(《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
그렇다면 안으로 찾지 않으면 곧 수련이 아니다.
안으로 찾지 않으면 심성이 원래 자리에서 답보해 보다 높은 층차의 법리(法理)를 볼 수 없다. 안으로 찾고 심성을 제고해야만 고층차의 법리를 볼 수 있고 또 안으로 찾고 심성을 제고해야만 더 높은 층차의 법리를 볼 수 있다.
또한 안으로 찾지 않고 심성이 원래 위치에서 답보하면 덕(德)이 쌓이지 않으니 아무리 재주 있는 부인이라도 쌀이 없으면 밥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공(功)이 자동으로 자라지 못하게 된다.
안으로 찾지 않으면 법(法)을 얻을 수 없고, 안으로 찾지 않으면 심성(心性)이 제고되지 않으며, 안으로 찾지 않으면 공이 자라지 않고, 안으로 찾지 않으면 극히 위험하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오직 일만 하고 안으로 찾지 않으면서 자신을 닦지 않으면 바로 속인이다. 그럼 사부님 법신(法身)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천병천장(天兵天將)의 보살핌도 없어져 업력(業力)・마장(魔障)・구세력이 아주 쉽사리 박해할 기회를 노릴 수 있다. 그러므로 안으로 찾지 않으면 매우 위험한 것이다.
4. 결론
우리는 매일 해야 할 일이 아주 많고 아주 번잡하며 아주 피로하고 아주 고생스럽다. 하지만 아무리 바쁠지라도 시시각각 늘 수련을 벗어날 수는 없으며 안으로 찾는 것에서 이탈할 수 없다. 우리는 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는 안으로 찾았는가? 나는 무엇을 찾았고 어떤 것을 고쳤고 어떤 것을 바로잡지 못했는가? 안으로 찾는다는 이 일념을 지켜야지만 비로소 수련이다.
“오직 자신을 잘 수련해야만 비로소 대법제자의 사명을 잘 완성할 수 있다.”(《남미법회에 보내는 축사》)
장기간 매우 바쁘게 살면서 신경이 긴장되고 마음을 졸이다 보면 압력이 커지고 효율이 떨어진다. 그러면 갈수록 더 어지러워지고 갈수록 더 조급해진다. 이런 것들은 모두 상태가 차(差)한 현상이며 수련을 잘한 표현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안으로 찾고 자신을 닦을 수 있다면 마음이 갈수록 더 청정해질 것이며 효율도 갈수록 더 높아지고 효과 역시 갈수록 더 좋아질 것이다. 끊임없이 안으로 찾음을 견지해야만 자비롭고 상화하며 편안하고 침착하며 자재(自在)한 풍모가 있을 수 있다.
수련이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고 얼마나 감당하며 얼마나 고생을 겪는 가에 달린 게 아니라 진정한 제고는 심성(心性)에 달려 있다. 자신의 감각에 의지해서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당연한 것을 한다면 이는 장님이 눈 먼 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우물가를 가는 것처럼 극히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조사정법(助師正法)이 아니라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을 제멋대로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작은 의견이니 타당하지 않은 곳이 있다면 자비롭게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714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