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심(净心)
【정견망】
나는 청년대법제자다. 모친이 며칠 전 아주 작은 게 몇 마리를 사다 먹으라고 주시면서 비록 작긴 하지만 “맛이 있다(吃个味道)”고 하셨다. 여기서 “맛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식욕(食慾) 등을 닦아 없애는 방면에서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정신 자극을 추구하기에, 어떻게 해서든 갈증을 풀 수 있다면 그렇게 한다.”(《전법륜》)
나는 먹을 것을 좋아하는 이런 집착이 얼마나 황당한지 느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잠시 이것을 먹고 싶고 잠시 저것을 먹고 싶어 하지만 단지 “맛”을 위한 것으로 일시적인 미각 자극을 추구할 따름이다.
지금은 맛있는 것이 정말 너무나 많고 또 가격도 저렴해서 약간의 돈만 있으면 아주 쉽게 식욕을 만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주의 법리는 “잃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런 ‘즐거움’을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가? 이는 절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먹는다(吃)”는 이 글자는 口+乞 두 부분(역주: 입으로 구하거나 구걸한다는 의미)으로 구성된다. 나는 이것이 사부님께서 글자 형태를 통해 우리를 점오(點悟)해주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집에서도 먹을 음식이 없어서 걱정인 게 아니라 있는 음식을 다 먹지 못할까 걱정이다. 때문에 많은 경우 스스로에게 구실을 찾는데 내가 이 음식들을 먹어치워 낭비하지 않기 위해 뭘 좀 먹는 것은 상관이 없지 않은가? 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로 완전히 이런 목적에서 나왔다면 괜찮지만 우리가 그다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거나 그다지 흥미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버려두거나 장시간 방치한다. 진정한 낭비에 대해서는 오히려 새로운 구실을 찾아 그것들을 은폐하는데 먹는 것에 대한 나의 이런 마음이 얼마나 교활 한가를 폭로한다.
지금 사람들이 먹는 것은 기본적으로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며 좋지 않은 나쁜 식습관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진정한 수련인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오직 우리의 출발점이 집착이 아니라 배를 채울 수만 있다면 무엇을 먹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법리에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당신은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당신 자신이 방출하는 에너지는 무의식중에 모두 신체 상태를 개변할 수 있기 때문에, 속인과는 구별이 있다. 수련자가 뜨거운 음식물을 먹으면 열이 오를까 봐 두려워하는 그것은 하나의 집착인데, 다시 말하면 또 그런 일이 아니다.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법에 기초해서 법을 인식하여 초상적인 이치로 자신을 가늠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여전히 속인의 이치로 자신을 가늠할 때에 나는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은가? 그건 바로 心性(씬씽) 문제이다. 감기에 걸리고, 기침할까 봐 두려운 이것은 속인으로서, 나는 당신이 아직 수련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우리 수련하는 사람의 이 신체는 최후에 정백체(淨白體)에 이른 다음, 삼계를 벗어나 고에너지물질로 구성된 신체로 되는바, 그렇다면 수련과정 중에 우리는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하지 않는가? 도달하기 전까지 나는 사람의 관념으로 나 자신을 가늠하고 요구하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사람이다. 당신이 도달했는지 도달하지 못했는지를 당신 자신은 모르기 때문에, 당신은 모두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 (《뉴질랜드 법회설법》)
그러므로 의심할 바 없이 진수(真修)하는 한 대법제자로서는 집착 없이 무엇을 먹든 상관이 없고 이를 걱정하는 것 역시 집착이자 사부님을 믿지 않고 법을 믿지 못하는 표현이다. 나도 이 방면에서 닦을 곳이 있다.
그러나 폭음이나 폭식, 너무 짜고 단 음식이나 변질된 음식 등, 좋지 않은 음식습관은 아직 집착심이 남아 있는 대법제자와 속인에 대해 말하자면 아주 위험한 것이다. 아마 구세력은 바로 이 점을 구실로 그들의 신체를 무너뜨림으로써 그들의 신체에 당뇨병, 위장병, 변비 등등 병업 증상이 나타나게 만들어 집착심이 강한 그런 수련인들의 신심(信心)을 무너뜨리고 속인으로 하여금 병의 고통 속에서 살아갈 희망을 잃게 하는데, 그들의 생명을 엄중하고 직접적으로 해치거나 죽임으로써 생명을 도태시키려는 그것들의 험악한 목적에 도달하려 한다.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는 대법을 수련한다. 하지만 현재 사람 표면의 수련을 그리 잘하지 못해 당뇨병이란 병업 가상이 나타나 늘 몸이 불편하다. 내가 어머니 집에 가보면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것들을 먹는다. 대부분 변질된 것들이며 채소를 볶을 때도 소금과 조미료 및 간장을 너무 많이 친다. 8가지 재료가 들어가는 팔보죽을 먹으라고 주셨는데 아무 맛도 없으면 내가 먹기 힘들까봐 죽에 설탕을 한바탕 치셨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예전에 어릴 때에도 어머니는 늘 내 밥에 설탕을 뿌리곤 하셨다. 이는 속인의 신체에 얼마나 해로운 일인가!
그러나 이렇게 많은 설탕을 넣는 것은 음식 맛을 좀 좋게 하기 위한 것으로 다시 말해 “맛이 있게” 하려는 것인데 완전히 득보다 실이 많은 게 아닌가? 나는 이 방면에서 사악이 사용하는 수단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진정하게 정진하는 대법제자로 만약 정말로 음식을 낭비하는 게 아니라 배를 채우기 위한 목적이라면 무슨 좋지 않을 것이 없다. 오히려 심성을 제고하는 좋은 일로 신사신법(信師信法)과 심성이 제고된 체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잘하지 못하고 또 음식 건강에 주의하지 않으면서 출발점이 식욕・이익심・탐욕 등에 있다면 사악은 아마 이것을 구실로 빈틈을 탈 수 있으며 또한 아주 위험한 것이다.
수련인은 아무런 집착이 없는 상태 하에서 가급적 정상적이고 건강한 생활과 음식습관을 유지함이 옳지 않겠는가!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리(李) 스승님의 보호가 있으므로 자동차에 부딪힌다 해도 두렵지 않다.”는 그런 사람이 되진 말아야 한다.
나는 집에서 일반적으로 스스로 요리를 한다. 최근에 요리할 때는 기본적으로 조미료나 또는 심지어 소금조차 더하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음식을 먹는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음식재료 본래의 맛이 이미 아주 먹기 좋은 것을 발견했는데 먹지 못하는 게 어디 있는가? 나는 이 방면에서 집착이 있는 동수들이 정말로 스스로 한번 시험해보면 분명히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처럼 될 것을 보증한다. 음식에 조미료를 가해야만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 우리가 생생세세 형성한 사람의 관념이 작용을 일으킨 것으로 원재료 그대로의 음식만이 가장 먹기 좋고 가장 건강한 것이다.
속인의 ‘영양(營養)’은 일정 정도에서 착오적인 관념이다. 속인은 늘 무엇을 먹으면 영양이 아주 좋으며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병에 걸려야 하면 여전히 그런 병에 걸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슨 영양물질을 먹지 않아도 잘 살아간다. 가령 피부미용에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정말 좋아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무슨 다이어트 음식을 먹었다고 정말 살이 빠지는가? 무슨 머리가 좋아지는 것을 먹는다고 해서 정말 총명해지는가? 지금의 사람은 업력이 너무나 커서 그런 문제들이 어떤 음식을 좀 먹는다고 좋아질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지금의 사람은 德(더)의 성분이 작고 업력이 크다. 그렇다면 사람만이 업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멘트, 흙까지도 모두 업력이 있다. 여러분 알다시피 이전에 중국에서 농민들이 밭에서 일할 때, 손을 다치면 흙가루를 집어 뿌리기만 해도 나았는데, 흙가루를 조금만 뿌려도 나았다. 지금은 당신이 감히 흙을 만질 수 있겠는가? 당신이 만지지 않아도 파상풍(破傷風)에 걸린다!”(《시드니법회 설법》)
나는 예전에 업력이 작은 사람들이라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서 신체를 조리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업력이 거대한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작용을 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수련인은 더욱이 무슨 영양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이런 것들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 바로 사부님을 믿지 못하고 법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련의 큰 누락이 아닌가.
내가 간혹 사람에게 음식에 대한 집착을 불러일으키는 일부 것들을 먹어보면, 가령 너무 짜거나 단 간식을 먹을 때면, 특별히 사상 중에서 그런 미각이 주는 자극과 향수하는 느낌을 구별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바로 이런 감각이 속인들을 그렇게 집착하게 만들 수 있는게 아닌가? 그 속에 빠지지 않고 뛰쳐나와서 이런 감수를 살펴보면 곧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너는 생각해라. 나는 네 생각을 지켜보겠다.”(《북미제1기법회설법》)와 같을 것이다.
나는 제삼자의 각도에서 사람에게 자극을 가져다주는 것들이 대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감수할 수 있었고 이런 것들에 대한 집착은 근본적으로 가치가 없음을 느꼈다. 이렇게 오래 지나자 나는 속인들이 맛이 있다고 여기는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느꼈고 적어도 예전에 비하면 아주 많이 줄어들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은 이 세간에서 그는 단지 생활과정 중에 사람에게 가져다 준 감수를 향수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은 자신이 자신을 주재하고 있고, 내가 무엇을 하려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즐기는 중에서 후천적으로 양성된 습관과 집착으로서, 느낌을 추구할 뿐이다. 진정하게 작용을 일으켜 무엇을 하고자 하는 배후의 요소는, 사람의 습관, 집착, 관념, 욕망 이러한 것을 이용해서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각지설법 11》〈대법제자는 반드시 법공부를 해야 한다〉)
많은 때 속인이 맛있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 나는 정말 그들이 가련하게 느껴진다. 또 만약 우리 수련인들이 저들과 마찬가지로 된다면 이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에 법을 공부하기 전에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만약 법을 공부할 때 법을 읽어야 한다면 먼저 양치를 하거나 입을 헹궈 입안의 더러운 음식찌꺼기를 깨끗이 청리한다. 이런 음식물 찌꺼기들을 지닌 채 법을 읽는다면 이 또한 사부님과 법에 대해 불경한 것이 아닌가!
속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먹고 자는 것이다. 수면 역시 옛날 어른들이 늘 언급하던 것으로 수련인의 큰 문제이다. 나는 잠 역시 ‘맛이 있다’는 것으로 형용할 수 있다고 본다. 얻는 것은 표면적인 편안함이지만 잃는 것은 수련인의 소중하기 그지없는 시간이다!
속인은 “수면시간이 부족하면 정신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는 속인의 관념이다. 아울러 그들의 관념은 속인 중에서는 꼭 정확한 게 아니다. 수많은 속인들이 하루에 여러 시간을 자면서도 여전히 졸릴 수 있다. 하물며 우리 수련인은 속인의 이치와 정반대가 아닌가!
잠은 종종 자면 잘수록 더 자고 싶어지는데 왜냐하면 잠을 잘수록 그런 사악한 생명을 만족시키고 그런 사악한 생명(수면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잠자게 만들어 우리 수련을 교란하려는 그런 생명을 가리킨다)이 곧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는 졸림(困)도 일종의 고통이며 이런 고통은 어쩌면 생로병사나 추위더위 피로와 마찬가지로 이는 사람과 또 일정한 층차에 있는 수련자가 반드시 겪어야 할 고통이라고 본다.
가령 잠을 자서 회피하는 것과 같은 어떤 조치를 취해도 단지 뒤로 미루거나 전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이 역시 업을 없앨 기회다. 물론 이는 현 단계에서 나의 개인적인 깨달음으로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다. 졸림의 고통을 극복한 후 오히려 아주 빨리 정신이 나는데 잠을 자지 않아도 아주 정신이 나고 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풀이 죽어 의기소침한 상태는 흔히 잠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들 오해한다. 하지만 나는 법공부를 통해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도리어 마성임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는 법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진하라! 정신을 차려라!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이것 역시 마성(魔性)의 한 가지 표현이다. 이것은 사상업력이 조성한 것으로서, 그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런 상태에 처하게 하여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법리에 따라서 법을 인식하고 진정으로 정진하면 넘어갈 수 있다.”(《뉴질랜드법회설법》)
사부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연공만 하면 잠을 잔다고 말한다. 그것도 당신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것들은 비록 마는 아니지만 그것들이 수련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마의 역할을 할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돌파하지 못하면 그것이 당신에게 작용을 일으킨다.”(《스위습법회설법》)
“하지만 수련인으로 말한다면, 당신이 수련 중에서 잠을 잔다면 그것은 일종 마의 작용을 일으킬 수 있으며 당신으로 하여금 수련하지 못 하게 한다. 그것 자체는 마가 아니지만, 그것은 이런 일종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꾸로 말한다면 또 당신의 의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 의지를 당신 자신이 가서 닦아야 하지 않는가? 자신의 의지를 강화하고 그것을 억제함이 바로 의지를 강화하는 것이고 역시 수련이다. 연공할 때 피곤하다는 자체 역시 사상업력이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미국법회설법》〈뉴욕좌담회설법〉)
“법을 배울 때 자고, 책을 읽을 때 자고, 연공할 때도 당신은 자는데 어쨌든 이런 가장 기초적인 것조차도 돌파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의지의 문제이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당신이 수련 중에서 사람을 구성한 어떠한 요소도 모두 당신으로 하여금 사람을 벗어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구성한 어떠한 환경의 것도 모두 당신으로 하여금 떠나지 못하게 하는데, 당신은 무엇이든지 모두 돌파해야 하고 어떠한 마난(魔難)도 모두 넘어야 한다. 가장 크게 표현되는 것은 그들이 당신에게 고통을 조성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에는 부동(不同)한 형식이 있는바, 잠자는 것 역시 한 가지이다.”(《창춘보도원법회설법》)
내 경우를 말하자면 대학교 3학년 때 과제가 너무 많아서 평소 비교적 바쁘고 피로하다고 느껴 늘 잠을 자고 꿈을 꾸면 가뿐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피곤해서 눕자마자 잠드는 그런 안일한 느낌을 갈망했는데 그 근원을 깊이 파보면 현실을 도피하고 고생을 겪지 않으려고 해서 생겨난 것이다. 이외에 또 꿈에 집착한 것은 꿈속의 다른 공간이 허무맹랑해서 현실의 그런 압박감이나 절실한 느낌이 없기 때문인데 꿈속의 이야기는 대부분 자신이 현실 속에서 닦아버리지 못한 정(情)과 관련이 있다. 나는 단지 이 정(情)의 심각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꿈을 통해 가아(假我)의 욕망을 만족시키려 했던 것이다.
아울러 나는 또 이것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속였는데 흔히 이런 생각이다.
‘몇 분만 자자!’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기만 하면 열에 아홉은 완전히 잠에 취해 흐리멍덩하게 몇 시간을 자곤 했다. 나중에는 종종 계획이 엉망이 되어 속인 속에서 많은 번거로움을 초래했다. 공부하느라 너무 바쁘다는 것이 나의 구실이 되진 않으며 도리어 공부하느라 아주 바쁠수록 더욱 시간을 짜내야 한다!
나는 잠 역시 음식과 마찬가지로 당신에게 일시적이고 잠시적인 소위 안일한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오히려 보다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본다. 이 대가는 절대로 그리 간단한 게 아니며 진정으로 비할 바 없이 거대한 것이다.
첫째는 시간인데, 일반적으로 잠자는 그 몇 시간에 법을 배우면 얼마나 많은 법을 배울 수 있는가? 그러나 오히려 잠을 잤으니 얼마나 애석한가! 설령 몇십 분이라도 또 한 차례 발정념을 하거나 또는 몇 가지 연공을 할 수 있다.
둘째는 그것이 아주 쉽사리 당신이 원래 계획했던 많은 일들을 파괴할 수 있다. 진수(真修) 대법제자는 모두 시간이 아주 빠듯하고 모두들 아주 바쁜데 어떤 때는 몇 분마저도 아주 중요하다. 정말로 이렇게 순서대로 해야 할 이 모든 것들을 잘 하려면 법에서 끊임없이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우리 대법입자의 작용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늘 의지력이 부족하고 정진의 마음이 부족해 사악의 교란과 파괴를 당한다. 평소 시간 안배에서도 늘 피동적이며, 본래 빠듯한 시간이 갈수록 더 빠듯해져서, 최후로 갈수록 일이 더 많이 쌓이고 갈수록 더 곤란해지는데 마땅히 해야 할 많은 일마저 모두 해내지 못한다.
수면에 대한 집착은 바로 사악이 우리의 정상생활 순서를 파괴하는 한 가지 험악하고 은폐된 도구다. 그것이 뜻을 이루기 위해 찾는 구실은 아주 교활하다.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데 가령 너무 졸리면 법을 공부해도 잘할 수 없고 일을 해도 잘 할 수 없다고 한다. 또 남들도 늘 자신이 너무 피곤하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휴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당신이 잠시 잠을 자도 무슨 잘못이 아니라고 여긴다. 이것은 사실 관(關)과 난(難)을 중시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념과 주견(主見)이 부족해서 마난을 크게 본 표현이다.
나는 지금 구실을 찾는 것 역시 일종의 아주 강한 집착심임을 발견했다. 만약 정말로 어떤 일을 하고 싶다면 이렇게 문제를 생각하는 게 아니다. 단지 이 일을 하는 것만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이 곤란을 극복할 것인가만 생각해야 한다. 이런 곤란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다면 이는 목이 멘다고 해서 음식을 아예 먹지 않는 것과 같다.
내가 법리에서 깨달은 것은 만약 정말로 자신이 부딪힌 마난(魔難)을 중시하는 동시에 진정으로 마난을 돌파할 의지가 있고 또 이 마난 자체를 작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관을 잘 넘어갈 수 있다. 종종 다 우리가 중시하지 못하고 넘어가든 넘어가지 못하든 별일 아니라고 여겨 직면하길 원하지 않는 소극적인 상태가 생겨나는데 문제를 해결할 마음과 정념이 없는 것이다. 또 마난 자체를 너무 크게 보았기 때문에 비로소 줄곧 잘하지 못하고 유감을 조성한 것이다.
먹는 것과 자는 것은 종종 직접 우리 수련을 교란한다. 가령 법을 공부할 때면 이따가 뭘 먹을까를 생각한다. 법을 공부할 때 곧 이런 염두의 교란이 집중을 어렵게 한다. 물론 이런 물질의 법공부에 대한 교란은 내가 많이 말할 필요도 없이 매 대법제자마다 물론 겪은 적이 있을 것이다.
또 12시 발정념 시간이 되면 때로는 이런 더러운 생각이 나온다.
‘정념을 마치면 나는 곧 자야지.’
발정념 때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이런 염두를 품고 정념을 발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화상은 거기에서 경을 읽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생각한다. ‘좀 지나 개광이 끝나면 나에게 돈을 얼마나 줄 것인가.’ 또는 경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모모(某某)가 나에게 그처럼 못되게 군다.’”(《전법륜》)
이런 염두를 지니고 정념을 발하면 진정으로 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끈적끈적하고 더러운 것이 달라붙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먹고 자는 것에 대한 욕망을 극복하는 것 역시 관을 넘는 거라고 본다. 고생을 두려워하는 마음, 나태한 마음, 안일을 구하는 마음, 교활한 마음 등이 모두 그 속에서 체현되는데 우리가 닦아 버리길 기다리고 있다.
수련의 각도에 서서 보자면 이런 것들은 본래 비할 바 없이 소중한 수련의 기연(機緣)으로 일시적인 고통을 감당하면 업을 없앨 수 있고 심성을 제고할 수 있으며 법을 실증하는 작용을 보다 많이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잘하지 못하면 곧 엄중한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 먹는 것과 자는 것은 아무리 많이 누려도 단지 “맛이 있는” 것에 불과하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허황하고 안일한 감수를 추구하지 않으면 그런 엄중한 후과를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법을 실증하는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또 심성을 제고하고 고생을 감당하는 능력을 제고할 수 있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생을 겪고 난을 당하는 것은 업력을 제거하고 죄를 없애 버리며 인체를 정화(淨化)하고 사상경지를 제고하며 층차를 승화시키는 아주 좋은 기회로서, 이는 대단히 좋은 일이며 이것이 바른 법리(正法理)이다.”(《정진요지 3》〈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
먹는 것과 자는 것이 가져온 고통을 우리는 반드시 참아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말하기는 쉽지만 해내려면 확실히 일단의 간고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으로 결코 수월하지 않다. 하지만 고진감래(苦盡甘來)라 이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으로 우리는 더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물론 이 방면에서 우리는 극단으로 갈 수 없으며 정상적으로 먹고 자는 것은 분명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하는가는 수련을 제1위에 놓고 자기 수련의 구체적인 정황을 위주로 취사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절대로 욕망과 집착이 주재하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개인 층차에서 거칠고 얕은 깨달음이니 구체적인 것은 여러분들이 법을 스승으로 삼기 바란다.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허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1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