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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음’과 ‘집착’을 말하다

글/ 소련(小蓮)

【정견망】

오늘 다른 동수와 한 가지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 그는 자신은 일에 부딪히면 스스로에게 내려놓았는가? 하고 물어본다고 했다. 그리고는 나도 일에 부딪히면 내려놓는지 물어보았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나 자신이거나 동수거나 일에 부딪혀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아주 기쁘고 위안이 될 만한 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렇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순히 ‘내려놓음(放下)’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려놓음’에는 주어(主語)가 있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 또는 어떤 한 가지 일이 매개가 되어야 한다. ‘내려놓음’을 말하려면 우선 일이나 또는 어느 사람이든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야지만 비로소 반응하고 직접 내려놓을 수 있거나 또는 먼저 집착이 있은 후에야 나중에 내려놓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여도 구하지 않으니 늘 도(道) 중에 있을”[주 1] 수 있도록 진정으로 우리의 심성을 요구할 수 있다면 그럼 심각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나 개인은 이 일을 통해서 일을 함에 어떤 구하려는 목적이 있는데 도달하지 못하고 내려놓는 것은 사실 도(道) 중에 있는 상태가 아님을 깨달았다.

또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만약 우리가 모두 자신이 법 속에서 닦아낸 순진(純真)한 상태로 일을 하거나 또는 상대방을 대할 수 있고 의도적으로 무엇을 하고자 해서 하는 게 아니라면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명상태가 즉시 펼쳐질 것이며 어디서 잘하지 못했다면 고쳐서 잘하면 되며, 일이나 사람 속에서 ‘내려놓음’과 ‘집착’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원래의 사유가 마치 아주 옳은 것 같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단지 스스로 하나의 좋은 수련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며, 단지 사람 이곳에 국한되어 있는 것으로 진정하게 대법에 동화(同化)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명확히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수련은 수련 자체를 위한 게 아니며 진정으로 사람에서 벗어나가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수련 자체 속에 사유가 정체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신(神)의 일체는 모두 법(法)으로 구성된 것으로 그가 소유한 일체는 다 자연스럽게 대법이 부여한 생명의 그런 상태를 펼쳐낸다.

수련과정 중에서는 ‘내려놓음’과 ‘집착’의 구별이 있지만, 신(神)의 눈에는 보다 높은 경계의 표현과 심태가 있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사유는 절대 이곳에 정체되어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면 법리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극도로 제한하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서 나는 사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이러한 것들 앞에서 당신의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당신이 잘 참는, 실제로 마음조차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이것이야말로 수련의 참음이다.”[주 2]

이 순간 나는 ‘내려놓음’과 ‘집착’은 우리가 체현해 나오는 외재적인 표현이며 ‘부동심(不動心)’은 그에 대해 아무런 개념도 없어야지만 비로소 실질적인 것이다. 마음이 움직임은 ‘내려놓는’ 과정인데, 엄격히 말해서 역시 그다지 순수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내려놓음’의 전제는 자신이 어떤 요소를 느꼈기 때문인데 그런 후에야 자신이 중시하지 못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전제요소 자체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는 게 아닌데 이는 객관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과는 다르다.

마치 돈이나 재산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돈과 재산이 있어도 자신은 내려놓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돈이 있고 없고 근본적으로 이런 개념이 없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내려놓음’이란 이런 개념조차 없으며 돈이나 재물에 집착하는 방면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마음이 아주 심하게 움직였다면 그럼 더욱 집착하는 것이다. 어떤 사유가 더 누락이 없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명백할 것이다.

사람은 수련 중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부 개념(槪念)을 형성하는데 사람 속에서는 바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수련하는 목적은 사람을 떠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개념에 대해서도 마땅히 중시하지 말아야 하며 중시한다면 늘 관념을 형성해 수련 중의 장애로 되기 쉽다.

마치 내려놓는다는 이런 단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나 한 사건을 보고 “나는 내려놓았다”라는 이런 일념이 있지만 사실은 여전히 그 사람 또는 일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지만 스스로 내려놓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완전히 법의 요구에 따라 하면서, 사람을 보면 그 법연(法緣)을 중시하고, 일에 닥치면 최선의 방식으로 이지적으로 대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사람 속의 일체는 다 인연을 따라야 하는데 한 가닥의 기연(機緣)이 있으면 어떤 사람 또는 일을 한 단락 연기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본래모습을 연기하는 것’(本色出演)으로 이 생명이 법속에서 닦아낸 가장 좋은 상태를 가져와서 연기하는 것이다. 그 단락의 연기가 필요하지 않으면 사유는 즉각 단절되고 그런 사람과 일에 대한 생각마저도 나지 않는데 사람 속에서 옛것을 그리워하거나 인정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설명할 문제는 내가 말한 것은 일종의 심태(心態)로 많은 일에서 우리가 기어코 인위적으로 어떤 한 가지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수련인을 포함한 사람 속에서 우리는 반드시 이지(理智)적이어야 하는데 말과 행동에서 가급적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마음속에 어떠한 사유를 지니는가 하는 그것은 자신의 사정이다.

개인의 작은 견해이니 참고로 제공할 뿐이다.

주 1 : 파룬따파(法輪大法)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대사(大師) 저서 《홍음》<도 중에서>
주 2 : 파룬따파 창시인 리훙쯔 대사 저서 《미국서부법회설법》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16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