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돈을 보거든 주워라”에 대한 작은 깨달음

글/ 대륙제자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그가 이렇게 약은 것은 바로 개인의 이익을 꾀하기 위해서다. “누가 널 괴롭히면 너는 그의 선생님을 찾고 그의 부모를 찾아라.”, “돈을 보거든 주워라.” 바로 이렇게 그를 가르친다. 어려서부터 커서까지 이 어린이는 받아들이는 것이 많아 그는 속인사회 중에서 서서히 이기적 심리가 갈수록 커져서, 그는 부당한 이익을 점유할 것이며, 그는 德(더)를 잃어갈 것이다.”

전에 이 두 구절의 법을 배울 때는 이는 아이를 교육하는 일이고 우리 아이는 다 컸으니 나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문득 나와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수시로 자주 만나게 되는 일임을 깨달았다.

가령 친척이나 친구가 어떤 일에 봉착해서 나더러 의견을 내라고 하거나 또는 어떤 일을 보고 불공평하다고 느낄 때 내가 한 말과 제안이 “돈을 보거든 줍는” 경계(境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여기서 두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첫째: 아내에게는 자매가 많은데 어느 해 여름 처제가 내게 말했다.

“아버님이 80이 넘으셨는데 밖에 나가 바람을 쐬고 싶어 하세요. 형부가 고향에 있는 동생과 한번 상의해보세요. 차로 고향 산수를 한 바퀴 돌고 동생 집에서 시골밥상을 먹으면 어때요?”

나는 “가능하지”라고 했다.

그러자 처제가 또 말했다.

“또 동생분이 손해를 보면 안 되니까 다음에 찾아오면 우리가 다 초대할께요.”

나는 “그럴 필요 없어”라고 했다.

이에 모두들 두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시끌벅적하게 신나게 놀고 마음껏 먹었다. 제수씨는 혹시라도 대접이 부족할까봐 근처에 사는 며느리까지 불러다 상다리가 휠 정도로 풍성한 밥상을 대접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눈 깜짝할 사이에 반년이 지났다. 동생이 마침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 우리 집에서 며칠을 묵었다. 그런데 처제들이 동생을 보고는 그저 아는 체만 할 뿐 아무도 식사초대를 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에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어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어찌 이렇게 식언을 할 수 있는가? 이건 동생이 농촌에 산다고 아예 촌놈 취급을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몇 번이나 이 일에 대해 집사람에게 말해보고 싶었지만 끝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삼켰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왜 동생이 손해를 보는데 내가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가? 이는 “돈을 보거든 주워라”와 같은 게 아닌가. 나의 그 사(私)가 건드려져서 다른 사람이 돈을 주워야지만 평형을 이루고 그가 줍지 않으면 손해를 보았으니 바보라고 여긴 것이다. 겉으로는 내가 돈을 줍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의 경계(境界)를 남에게 전가한 것이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 그런 말을 했고 남더러 그런 일을 하라고 했으니 이는 내가 그런 일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즉 “약다”는 것의 배후에는 얼마나 큰 사(私)가 있는가!

나는 또 생각해보았다. 수련인이 자신의 관념이나 집착을 건드리는 일을 만날 때면 아주 많은 일들이 우리에게 직접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친척이나 친구가 손해를 보거나 불행한 것을 볼 때 마음속에서 그런 “불공평하고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염두가 튀어나온다. 이는 바로 마땅히 바로 잡아야할 곳이다. 만약 이를 소홀히 여기고 나와는 상관이 없다며 지나쳐버린다면 곧 제고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아주 보편적이고 거의 매일 만나거나 보거나 들을 수 있는데 모두 당신이 “땅에 떨어진 돈을 줍는가 줍지 않는가?” 점검하는 것이다.

두 번째 : 처가 쪽 친척 중에 늘 여동생 집에 와서 밥을 먹고 가는 이가 있었다. 예의상 선물을 들고 오는 경우는 없고 늘 빈손으로 왔다. 내가 그에게 “예의를 좀 차려서 왕래하세요!”라고 요청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매부는 후덕하고 또 체면을 중시하는 편이라 이 친척이 올 때면 나까지 같이 불러 한상을 잘 대접하곤 했다. 그런데 여동생 집은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고 월급도 적어서 나는 갈 때마다 선물을 사가곤 했다. 한번은 여동생이 새집을 장만했다. 관례적으로 집들이 때 친척과 친구들이 모두 인사치레를 하는데 적으면 3~500위안 많으면 1~2000위안을 부조했다.

집들이 날 그 친척도 찾아왔다. 나는 그가 짠돌이임을 알기에 미리 좀 일깨워주었다.

“남들이 당신을 여러 번 초대했지만 당신은 한 번도 남을 집으로 초대한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빈손으로 오지 마세요. 매부는 남의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니 댁의 아드님이 결혼할 때 답례할 겁니다.”

하지만 이 친척은 한 푼도 가져오지 않았고 그저 60위안짜리 싸구려 술을 하나 들고 와서는 그나마 술을 다 마시고 갔다.

이 일은 내 마음을 아주 답답하게 했다. 매번 그를 볼 때마다 좋은 눈빛으로 대하지 못했고 생각만 해도 불평이 나왔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 체면을 봐서라도 그렇게 인색하게 굴지 말았어야지.”

아내는 “그는 원래 그런 분이니 남들하고 똑같이 보지 마세요.”라고 했다.

동수와 이 일을 교류하자 동수가 말했다.

“아마 당신 매부가 전에 그에게 빚을 진 적이 있을 겁니다. 어디 우연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왜 평형을 이루지 못하나요?”

내가 생각해보니 그랬다, 나는 왜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가? 안으로 찾아보니 나는 ‘불평’의 배후에 숨어있는 많은 사람마음을 발견했다. 여동생이 손해를 보았다고 여기고, 가족에 대한 정, 원망, 불평, 불공정, 그 친척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 등등.

수련인은 바로 이런 것들을 닦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이런 마음들을 철저히 제거하고 발정념으로 깨끗이 제거했다!

그 후 다시 그를 봤을 때 마음에 불편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 이 일은 비록 내게 직접 발생한 것은 아니고 그 친척이 우리 집에서 밥을 먹은 것도 아니지만 내 몸에 발생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건드려지자 곧 그런 행동의 표현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돈을 보거든 주워라”와 마찬가지였다. 비록 돈을 주워서 내 주머니에 넣은 것은 아니지만 그 ‘자사(自私)’가 만족할 수 있었다면 이것이 바로 사람마음과 관념의 근본이니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많은 경우 우리가 어떤 일을 논평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이 우리더러 어떤 일을 도와달라고 하거나 또는 어떤 불공평한 일을 볼 때 일단 마음이 움직이거나 말을 하기만 하면 곧 기점(基點)을 보아낼 수 있다. 대법은 가장 올바르니 대법제자는 바른 일을 해야만 하며 마음속의 사(私)를 해체해야 하는데, 이렇게 한 말만이 비로소 남을 위하는 것이 되고 남에게 아름다움을 남겨줄 수 있다.

현재 층차에서 작은 소견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2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