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2016년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고향에 갔는데 사촌언니가 며칠간 초대했다. 조카딸이 각종 고급 커튼과 침대용품을 파는 가게를 개업했다. 그 며칠 간 우리는 조카딸의 가게에 묵었는데 손님이 거의 없어서 장사가 그리 잘되지 않았다. 조카딸은 매출을 늘리기 위해 또 프라이팬을 들여놓았는데 가격이 4~5백 위안 가량 되었고 자기가 써보니 아주 좋다고 했다.
어느 날 아침 사촌언니가 자기 집 프라이팬이 쓰기 편하다고 자랑하자 조카딸이 말했다.
“원하시면 하나 드릴께요!”
그러자 사촌언니가 아주 좋아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몹시 화가 났다.
“언니도 참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구나. 조카딸이 장사가 잘 되지 않아서 프라이팬을 팔아 수입을 보충하려는 건데 어찌 남에게 이렇게 비싼 물건을 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조카딸이 내게도 말했다.
“큰이모도 하나 드릴께요!”
나는 “집에도 있으니 필요 없다.”라고 했다.
이 일은 이미 아주 오래 전 일임에도 매번 생각날 때마다 속으로 화가 났고 사촌언니에게 불만이 생겨 맘에 들지 않았다.
때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화가 날까?’
처음에는 이를 정(情)이라 여겼다. 왜냐하면 나는 어려서 사촌언니 집에서 자라 조카딸에 대한 정이 깊었고 늘 그녀가 잘 사는 것을 바라고 손해를 볼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의 기점에 서서 문제를 본 것이다.
사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아주 복잡해서 그녀가 이전에 사촌언니에게 빚을 진 적이 있어서 아마 이런 방식으로 갚아야한 것인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설령 이런 일이 아니라고 해도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주의 이치는 누구에게나 다 공평한 것인데 내가 조바심 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남의 물건을 원하는 게 좋지 않다고 여기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을 남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내 생각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남에게 다른 생각을 갖는다면 곧 남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마음인가?
내 기억에 A동수가 B동수와 대화할 때 갑자기 A동수의 얼굴에서 빛이 나면서 남을 깔보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내가 A의 좋지 않은 사람마음을 본 것이다. 그 사람마음은 살아 있었고 형상이 있었으며 추악한 것이었다. 나는 내가 왜 이런 모습을 보게 된 것일까? 생각했다. 이는 내게도 남을 깔보는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느 날 법을 공부할 때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기사가 차를 빨리 몰았지만, 그가 일부러 사람에게 부딪치려고 했겠는가? 그는 본의 아니게 한 게 아닌가?”(《전법륜》)
여기서 ‘일부러(有意)’라는 이 단어가 아주 강한 에너지로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속에 담긴 함의를 알았다. 운전기사가 일부러 한 게 아니라 본의 아니게 했다면 다시 말해 그의 주원신(主元神)・주의식(主意識)이 명백한 상태에서 한 게 아니라 주의식이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생명이나 채권자가 조종한 것으로 이런 방식을 통해 빚을 받으려는 것이다. 때문에 기사를 원망할 수 없으며 만약 원망하려면 차에 치인 사람을 원망해야 하는데 그가 전에 지은 업력이 조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을 무시하는” 것은 사람의 기점에 서서 문제를 본 것으로 사실 속인 중의 일체는 다 가상(假相)이다. 당신은 눈으로 본 것이 실제적이라고 여기지만, 당신이 보고 인식하는 동수 또는 속인의 몸에 나타난 좋지 않은 언행이나 사상은 사실 모두 사람의 후천적인 관념과 외래교란이지 진정한 그 자신이 아니며 그 생명의 본질을 대표하지 못한다.
지금의 사람은 대다수 천상의 신(神)이 세상에 내려와 법을 얻기 위한 것으로 아주 대단한 생명이다. 만약 대법을 인정할 수만 있다면 법을 얻을 수 있고 법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다. 때문에 부면(負面)적인 사유로 고정적으로 남을 대해선 안 되며 남에 대해 쉽게 결론내리지 말아야 한다.
수련인은 현상(現象)을 꿰뚫고 본질(本質)을 보는 것을 배워야지만 표면가상에 미혹되거나 이끌리지 않을 수 있다. 이 한 점을 해내려면 반드시 법을 잘 배우고 법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며 법의 기점 위에 서고 수련의 기점 위에 서서 문제를 보아야지만 실질을 볼 수 있다.
남을 무시하고 남의 잘못을 찾는 것은 밖으로 찾고 밖으로 보는 것이다. 늘 남을 개변하려고만 생각하고 자신은 개변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마도(魔道)로 가는 것이 아닌가? 남을 무시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남보다 낫고 남보다 좋다는 것으로 이는 비교하는 마음과 쟁투심이 아닌가? 남을 무시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남의 단점을 드러내고 수구(修口)하지 않으며 늘 남을 지적하려 하고 남을 지도하려 하는데 이것이 바로 잘난 체하고 이기적인 과시심이 아닌가? 사촌언니가 공짜로 물건을 얻는 것을 보고 속으로 화가 나고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질투심이 아닌가?
전에 노교소에 있을 때 한 가지 꿈을 꾼 적이 있다. 시내에 동서남북으로 4가지 길이 나 있었는데 그중에서 나는 남(南 발음이 難과 같아 어려운 길이란 뜻도 있음)쪽 길을 선택했다. 깨어난 후 나는 자신이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했음을 깨달았다.
왜 그랬을까?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나는 점차 명백해졌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너무 자부심이 강해 자신이 옳다고 여겼고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겼으며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여겨 남들은 다 할 수 없어도 나는 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마난은 모두 스스로 초래하고 스스로 원한 것으로 모두 자신을 실증한 것이지 법을 실증한게 아니었다. 종종 일으킨 것은 다 부면(負面)작용이었다.
질투심의 뿌리는 자사(自私)와 자아(自我)로 이는 선(善)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내 몸에서 가장 두드러진 표현은 바로 남을 무시하고 자아를 중심으로 여기며 강경하고 체면을 따지며 남을 받아들이지 않고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며 늘 남을 거부하고 현실과 괴리되어 늘 자신이 남보다 강함을 실증하려 하고 남을 포용하지 못하며 남을 성취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동수를 무시하기 때문에 항목에서 잘 협조하지 못하고 간격이 나타난다. 늘 남의 잘못을 찾으니 오히려 거꾸로 자신은 보지 못한다.
부모님의 편애를 원망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남동생과 누이 역시 쉽지 않았다. 늘 국내와 국외를 다니며 매 차례 소비도 아주 크다. 처음으로 그들을 이해했고 돈에 대한 마음 역시 담담히 내려놓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기에 한 가지 규정이 있다. ‘사람이 수련 중에서 질투심을 제거하지 못하면 정과(正果)를 얻지 못하는데, 절대로 정과를 얻지 못한다.’”(《전법륜》)
남을 무시하는 이런 질투심을 인식한 이후 나는 착실한 수련 중에서 자아를 내려놓고 선(善)을 닦으며 일을 함에 우선 남을 생각하려고 주의했다. 또 시시각각 그것을 극복하고 억제하고 해체하며 그것에 이끌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수구에 주의하며 남의 장점을 많이 보고 남의 나쁜 점은 적게 보거나 보지 말아야 한다.
남이 잘한 것을 보면 내심에서 우러나와 남을 위해 기뻐한다. 남의 좋지 않은 일면을 보면 곧바로 안으로 찾고 자신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본다. 이렇게 꾸준히 해나가면 반드시 끊임없이 질투심을 해체하고 수련의 길에서 용맹정진(勇猛精進)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한 단락 법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격려하고자 한다.
“이 질투심을 당신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 물건은 무시무시한 것이며, 그것은 당신의 모든 수련을 다 해이해지게 만들 것이고, 당신을 망칠 것이다. 질투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대법홍전 25주년뉴욕법회설법》)
이상은 나의 최근 수련체험이니 만약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동수 여러분 감사합니다! 허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49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