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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불 (9)

【정견망】

9. 야사의 출가와 귀족들의 귀의 

이때, 바라나시 성에 구리가라는 큰 부자가 있었는데 야사(耶舍)란 아들이 있었다. 야사는 총명하고 영준했으며 나라 전체에서도 가장 부유해 먹고 입는 것이 화려하고 진귀했으며 심지어 왕궁에도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이 있었다.

어느 날 야사는 산에서 놀다가 썩어가는 여인의 시체를 보고 괴로움을 느꼈다. 이날 저녁, 춤추고 노래하는 무희들과 어울려 즐겁게 놀고 난 후, 촛불을 끄고 잠에 들었다. 한밤중에 일어나서 보니 낮에는 분홍빛 얼굴에 요염했던 미희가 지금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눈꼽이 낀 데다 침을 흘리는데 너무 더러워서 마치 낮에 본 시체와 같았다. 이 또한 야사의 선근(善根)이 성숙한 까닭에 세상의 욕망과 쾌락에 싫증이 났기 때문이다.

그는 홀로 옷을 걸치고 침대에서 일어나 발길 닿는 대로 밖으로 나갔다. 갠지스강을 건너 녹야원에 이르렀다. 저 멀리 석존의 위엄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탄복해 부처님 앞에 이르러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절을 올리고 여래의 자비로운 구도를 청했다. 부처님께서 그를 위해 설법하시니 야사가 듣고는 몹시 기뻐하며 세존께 출가를 허락해달라고 했다. 세존이 곧 허락하셨다.

이튿날 날이 밝자 야사의 집에서는 아들이 보이지 않자 난리가 났다. 부친은 이 아들을 몹시 총애해, 근심 걱정이 앞서는 것은 당연하고 다급한 나머지 직접 밖에 나가 아들을 찾으러 다녔다. 녹야원에 오니 부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던 아들이 막 출가한 것을 알면 반드시 비통해 할 것을 알고 처음에는 부자를 만나지 못하게 하셨다.

장자(長者)가 세존을 뵙고, 세존의 설법을 들으니 곧 도안(道眼 천목)이 열렸고 수다원(須陀洹)과를 얻었다. 이에 세존께서 비로소 부자를 서로 만나게 하셨다. 이때 장자는 사랑하는 아들이 출가한 것을 보고도 슬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들이 출가해서 과위(果位)를 증득해 자신도 제도하고 남을 제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도 운 좋게 도(道)에 입문한 것을 기뻐하고 위안으로 여겼다. 이에 부처님 앞에서 ‘삼귀의(三歸依)’하고 ‘오계(五戒)’를 받았다.

불법(佛法)에서는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승려(화상 또는 사문이라고도 한다)를 남자는 비구, 여자는 비구니라고 하며, 어린 나이에 출가해서 구족계는 받지 않고 팔계(八戒)만 받은 남자를 사미(沙彌), 여자는 사미니(沙彌尼)라 한다. 또 출가하지 않고 재가에서 오계(五戒)만 받은 남자를 우바새(優婆塞 번역하면 일에 가까운 남자로 즉 삼보를 공양하고 모시는 일을 하는 남자 신도를 뜻한다)라 하고 여자는 우바이(優婆夷)라고 한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불법(佛法)의 ‘사부대중(四衆)’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야사의 부친은 석가모니 불법에서 최초의 ‘우바새’로 최초로 삼보(三寶 불법승)에 공양했다.

이 일이 널리 알려지자, 야사의 50명 친구들은 다 귀족 자제들인데 야사가 이미 부처님께 출가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들은 모두 야사처럼 부유하고 재주가 뛰어난 인물도 속세를 떠나 출가했다고 하면서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 세속에 연연하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이에 서로 이끌어 부처님 앞에 찾아와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후 곧 수다원과를 얻었다. 이들은 모두 부처님께 머리를 깎고 출가해달라고 요청했다. 부처님이 이들의 머리를 깎은 후 다시 ‘4가지 진리(사성제四聖諦라고도 하며 고집멸도를 말한다)’ 법문을 말씀하시자 나중에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56명의 아라한이 부처님을 따라 도를 닦게 되었다. 부처님은 그들더러 사방을 널리 돌아다니며 중생을 교화하고 불교를 널리 전하게 했다. 부처님은 홀로 마갈제국(摩竭提國)으로 가서 널리 중생을 제도하셨다.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1/10/21/182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