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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이야기: 혜사(慧思)

글/ 목목(木木)

【정견망】

혜사(慧思)는 속성이 이씨(李氏)로 무진(武津)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넓은 아량을 지녔고 아이들을 사랑하여 이름이 알려졌으며 마을에서는 그가 남모르게 부지런히 배우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어느 날 꿈에 인도 승려를 만났는데 그에게 출가하라고 권했다. 그는 이것이 상서로운 조짐임을 깨닫고 가족을 떠나 불문(佛門)에 귀의했다. 이후로도 혜사는 자주 신승(神僧)이 꿈에 나타나 재계(齋戒)하라고 권하며 불가의 계율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 가르침에 따라 본래 마음을 지키고 청정하고 신중하게 행동했다. 구족계를 받게 되자 도에 대한 뜻이 더욱 높아져 조용한 곳에 살면서 늘 좌선하며 수행했다. 하루 한 끼만 먹고 다른 공양을 받지 않았으며 일을 주선하거나 손님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일체의 일을 다 끊고 《법화경》 등 30여 권의 경전을 몇 년 사이에 1천 번이나 두루 외웠다.

한번은 어떤 이들이 그가 거처하는 암자에 불을 질렀는데, 방화한 자들에게 곧바로 큰 병이 생겼다. 이에 혜사를 찾아와 정성껏 잘못을 빌고 참회했고 다시 새 집을 지어주었다. 혜사가 다시 암자에 살면서 경전을 외우자 오래지 않아 그들의 병이 나았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아름답고 기이한 복장을 한 수백 명의 인도 승려들이 나타났다. 그중 상좌(上坐)인 고승이 말했다.

“네가 전에 받은 계율은 율의(律儀)가 뛰어나지 못하니 그것으로 어떻게 정도(正道)를 개발할 수 있겠느냐? 지금 청정한 승려들을 만났으니 너는 반드시 단을 다시 만들고 32명의 사승(師僧)들에게 빌어 계율을 원만히 갖추고 성취하라.”

홀연히 놀라 잠에서 깨어난 그는 곧 꿈에서 계율을 받았음을 알았다. 이때부터 아주 심도 있게 부지런히 노력하여 잡념을 이겨내고 오로지 높은 경지를 바라보며 저녁이나 새벽에도 그만두는 일이 없이 좌선과 독송을 이어가면서 그것을 일과로 삼았다. 이러한 고행으로 말미암아 3생(生)에서 도를 닦아야 할 일들을 얻게 되었다.

또한 미륵과 아미타불이 설법해서 개오해주는 꿈을 꾼 후 두 개의 불상을 만들어 공양했다. 또 미륵불을 따라가 여러 권속들과 함께 용화수(龍華樹) 아래 모인 꿈을 꾸었다.

그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석가모니의 말법시대에 《법화경》을 수지했고 지금 또 미륵부처님의 이런 인도를 받으니 이는 확실히 삼생에 행운이다.”

당시 혜문(慧文) 선사가 수백 명의 제자가 모여들었는데 모든 것이 청정하고 정숙해서 승려들과 속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혜사도 그에게 귀의했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나도록 증득(證得)한 게 없자 이듬해 여름에는 좌선에만 몰두했다. 처음 21일 동안 약간의 고요한 관찰이 일어나면서 일생 동안의 선과 악한 행위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에 놀라고 감탄해 다시 갑절로 용맹정진하니 드디어 여덟 가지 감촉[八觸]이 움직여 첫 단계의 선정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때부터 갑자기 장애가 생겨 팔다리가 나른하고 약해지면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관찰하면서 “내가 지금 병든 것은 모두 업보에서 생긴 것이며 행위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본래 외부의 경계에는 없는 것이다. 도리어 마음의 근원을 보면 행위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 몸이라는 것은 구름의 그림자와 같아서 형상은 있어도 본체는 공하다”고 생각하자 장애가 사라졌다.

여름안거를 끝내고 한 해를 더 보냈지만 얻은 게 없자 개탄하고 우울증에 빠졌다. 그동안 허망하게 지낸 세월이 부끄러워 몸을 던지려 절벽에 서는데 등이 절벽에 채 닿기 전에 갑자기 마음이 열리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하여 법화삼매(法華三昧)와 대승법문(大乘法門)을 단번에 통달하게 되었고, 수많은 법리들을 남이 깨우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통달했다.

이렇게 되자 그의 명성이 멀리까지 퍼졌으며 사방에서 그의 덕망을 흠모하였고 제자들이 날로 많아졌다. 반면 그를 원망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늘어나 혜사를 독살하려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를 해치려 했다.

이에 제자들과 상의해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려 했다.

이때 어두운 공중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만약 선정을 닦으려면 무당산(武當山)이나 남악(南嶽)으로 가는 것이 좋다. 여기가 도에 들어가는 산이다.”

그래서 제(齊)나라 무성(武成) 연간 초엽에 숭산을 떠나 제자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향했다.

처음 광주(光州)에 이르자 양(梁)나라 효원제(孝元帝)의 국란(國亂)을 당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수년간 지내는 사이에 그를 따르며 귀의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동진과 제나라의 변경에 해당해 무력충돌이 자주 일어나 불법이 붕괴되고 대중들도 흩어졌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자신의 생명보다 불법을 중히 여기는 뛰어난 이들이 있어 험한 산을 넘어 혜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40여 명의 승려들을 데리고 남악으로 갔는데 그때는 진(陳)나라 광대(光大) 2년 6월 22일이었다.

그는 남악에 이르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산에 머무르는 것은 10년뿐일 것이다. 이 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멀리 떠나게 될 것이다.”

또 말하였다.

“나는 전세(前世)에 이곳을 밟아본 적이 있다.”

이렇게 말하고 돌아다니다가 형양(衡陽)에 이르러 한 아름다운 곳을 만났다. 수림은 높이 솟고 샘은 정갈하여 보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혜사가 말했다.

“여기는 옛 사원이다. 내가 옛날에 머문 적이 있다.”

그의 말을 듣고 그곳을 파니 과연 승방과 불전의 터, 승단에서 쓰던 그릇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어느 바위 밑에 가서 말하였다.

“내가 여기서 좌선하는데 도적이 내 목을 베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여기에 내 전신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 같이 찾아보니 곧 한 무더기의 마른 뼈들이 나왔고 그 밑을 자세히 찾아보니 유골이 발견되었다. 혜사는 이를 받들어 절하고 거기에 삼생탑(三生塔)을 세웠는데 이는 옛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그가 전하는 일들을 보면 사실과 일치하였으며 그런 것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진(陳)나라 시대에 심학(心學)을 하던 자로부터 그의 종지에 귀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대승경론을 강의해 날로 그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자 외도들이 앙심을 품고 진나라 황제에게 밀고하였다.

“혜사는 북방의 승려로 제나라의 첩자일 수 있으니 조사해보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칙사가 산에 이르렀는데 두 마리의 범이 성나 부르짖는 것이 보였다. 칙사는 깜짝 놀라 물러갔다가 며칠 후에 다시 가보았다. 그런데 작은 벌들이 날아와 혜사의 이마에 침을 쏘려하자 큰 벌이 날아와 작은 벌들을 물어 죽이고 혜사 앞에서 그 대가리를 물고 날아가는 것이었다. 진나라 황제가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듣고 이 일에 다시는 마음 쓰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혜사를 모함하던 자들 중에 한 사람은 갑자기 죽었고 두 사람은 미친개에 물려 죽었는데, 이것은 벌들이 나타났던 징조가 사실로 증명된 것이었다. 황제는 이 영험한 감응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도읍으로 영접하여 서현사(棲玄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어느 날 그는 와관사(瓦官寺)로 가는 길에 비를 만났는데 옷은 젖지도 않았고 신발은 진흙땅을 밟아도 더러워지지 않았다.

산사로 돌아오자 진나라 황제가 해마다 참배하고 공양한 물건들이 많이 쌓여 그의 명예는 더할 나위 없이 높아졌다.

그는 전보다 많은 설법을 했고 각종 신통을 드러냈다. 어떤 경우에는 몸이 작아지거나 커졌고 어떤 경우에는 고요하게 몸을 감췄으며 어떤 경우에는 특이한 향기와 기이한 색깔의 상서로운 징조들이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생을 마칠 때가 되자 산정에서 산중턱에 있는 도량으로 내려와서 문하의 학도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는 매일 설법하면서 간절하게 책망하였더니 듣는 자들의 마음이 열렸다. 혜사가 그들에게 말했다.

“만약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항상 삼매를 닦으며 참회하고 항상 앉아서 고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열 명만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어 서로 이익이 되게 할 것이다. 허나 그런 사람들이 없다면 멀리 떠나겠다.”

하지만 고행하는 일이 어려워 끝내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생각도 거두고는 조용히 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이때 젊은 승려 운변(雲辯)이 혜사가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대성통곡하자 그가 갑자기 눈을 뜨고 말했다.

“너는 마로구나. 내가 떠나려 하자 성인들이 줄지어 마중을 나와 내가 다시 태어날 곳을 토론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나를 방해하고 어지럽히는가? 어리석은 자야, 썩 나가라.”

그리고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단정히 앉아 생을 마쳤다. 이때 모두가 방에 가득한 기이한 향기를 맡았는데, 가보니 그의 정수리는 따뜻하고 몸은 부드러웠으며 안색은 평상시와 같았다.

진나라 태건(太建) 9년 6월 22일이었으며 전에 말한 10년이라는 세월과 완전히 부합한다. 향년 64세.

그는 신체가 유난히 특별하여 능히 자기를 이기고 지킬 수 있었는데 자세가 어디 기대거나 기울어지지 않았다. 걸음걸이는 소와 같았고 보는 것은 코끼리와 같았다. 정수리에는 육계(肉髻)가 있어 기이한 모습으로 장엄하였는데 그를 보는 사람마다 마음을 다시 먹고 자기도 모르게 복종했다.

그는 또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았고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며 방편으로 가르치고 인도하며 큰 자비를 베풀며 보살계를 받들었다. 비단옷이나 가죽신은 그것이 생명을 손상시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과 권속들은 거의 다 무명옷을 입었고 추우면 옷 속에 쑥을 넣어 바람과 서리를 막았다.

자료출처: 《신승전》, 《속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3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