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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이야기: 지의(智顗)

글/ 목목(木木)

【정견망】

지의(智顗)는 자(字)가 덕안(德安)이며 속성은 진씨(陳氏)로 영천(穎川) 사람이다. 진나라가 도읍을 옮기자 형주(荊州) 화용현(華容縣)에 살았다. 그는 양(梁)나라 산기장군(散騎將軍) 맹양공(孟陽公) 진기조(陳起祖)의 둘째 아들이다. 모친 서씨(徐氏)가 어느 날 꿈에 갑자기 향기로운 연기가 일어나더니 5색 구름이 품속에 감돌았다. 그래서 털어 버리려고 하니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전세의 인연으로 왕도(王道)를 의탁하는 것이다. 복덕이 저절로 찾아오는데 어째서 이를 물리치려고 하는가?”

또한 어느 날에는 흰쥐를 먹는 꿈을 꾸었는데 이것이 재삼 되풀이 되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점을 쳤더니 점쟁이가 말했다.

“백룡(白龍)이 태어날 징조입니다.”

마침내 아이가 태어나던 날 밤에 방이 환하게 밝았다가 하룻밤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그래서 내외가 다 기뻐하며 고기가 포함된 음식상을 성대하게 차리려 했는데 갑자기 불이 꺼져 할 수 없었다.

이때 문득 두 승려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훌륭하도다. 댁의 아이는 큰 덕을 지녔으나 장차 반드시 출가할 것입니다.”

말을 끝내고 갑자기 사라져 손님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옆방에서는 그전에 먼저 일어난 신령스러운 징조를 생각하여 아이의 이름을 왕도(王道)라고 지었고 또 후에 나타난 징조대로 다시 광도(光道)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 두 가지 이름을 서로 바꿔가면서 불렀다.

그의 눈에는 두 개의 눈동자가 있었는데 부모는 이것을 숨겼지만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누우면 합장했고 앉으면 반드시 서쪽을 향했으며 10살이 되도록 함부로 먹지 않았고 불상만 보면 절을 하고 스님을 만나면 반드시 공경했다.

18세 때 상주(湘州) 과원사(果願寺)에서 법서(法緖)에게 귀의해 출가했다. 법서는 그에게 10계(戒)를 주고 율의(律儀)로 그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북쪽으로 건너가 혜광(慧曠) 율사를 찾아가서 땅바닥에 경전을 펴놓고 자세한 지도와 가르치심을 받았고 대현산(大賢山)에 숨어살며 《법화경》, 《무량의경(無量義經)》, 《보현관경(普賢觀經)》 등을 외우기 시작하여 20일도 안 되어 이 3부의 경전을 끝까지 외웠다.

다시 광주(光州) 대소산(大蘇山)의 혜사(慧思) 선사를 찾아가 심관(心觀)을 배웠다. 본래 혜사는 취(就) 스님에게 도를 배웠고 취 스님은 최(最) 스님에게서 법을 받았는데, 이 세 사람은 모두 뛰어난 고승들이었다.

혜사는 늘 “옛날에 영산(靈山)에서 함께 《법화경》을 들었는데 전세의 인연에 따라 다시 이 세상에 왔구나”라고 탄식하였다. 그리고 곧 보현보살의 도량을 꾸리고 그에게 네 가지 안락행(安樂行)을 설교하였다. 지의는 이 산에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닦았는데 그때로부터 3일 만에 「약왕품(藥王品)」까지 외우자 깨달음이 생겨 혜사 스님과 함께 영취산 칠보(七寶)도량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던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때문에 혜사는 “네가 아니면 감응하지 못하고 내가 아니면 인식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것은 법화삼매의 직전에 일어나는 방편인 것이다.

그후 그는 다시 희주(熙州)의 백사선(白砂山)에 들어가 이전처럼 관행을 하였는데 경전에 의문이 생기면 혜사가 갑자기 와서 은근히 해석해 주는 것이 보였다. 그후에도 혜사는 그에게 대신 강의를 시켰는데 듣는 자들마다 모두 탄복했다.

혜사는 직접 법구(法具)인 여의(如意)를 잡고 앉아서 그가 강의하는 모습을 보고 듣다가 배우는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의리상 나의 아들이다. 한스러운 것은 그가 선정의 힘이 적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지의가 스승의 말대로 선정을 새롭게 하자 그의 명성이 멀리까지 퍼졌다. 이렇게 학문을 이룩하고 스승을 찾아가 떠나겠다고 인사하니 혜사가 말했다.

“너는 진(陳)나라에 인연이 있으니 그곳에 가면 꼭 이익이 있을 것이다.”

혜사가 남악으로 길을 떠나자 지의는 금릉(金陵)으로 가서 법희(法喜) 등 30여 명의 승려들과 함께 와관사(瓦官寺)에서 처음으로 선법을 널리 퍼뜨렸다. 복야(僕射) 서릉(徐陵)과 상서(尙書) 모희(毛喜) 등은 밝은 시대의 귀족이며 명망 높은 선비로서 학문은 불교와 유교를 통달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꿈에서 바위와 절벽이 첩첩히 겹쌓이고 구름 속에 햇빛이 절반쯤 비치며 그 옆에 끝없는 넓은 바다가 펼쳐지고 맑은 물결이 산 아래에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어떤 승려가 손을 흔들며 팔을 펴서 산 밑에 이른 지의를 산으로 끌어올리며 무엇이라고 말하는 꿈도 꾸었다. 지의가 꿈속에서 본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니 제자들이 모두 말했다.

“그곳은 곧 회계의 천태산(天台山)인데 성인과 현인들이 있던 곳입니다. 옛날에 승광(僧光)ㆍ도유(道猷)ㆍ법란(法蘭)ㆍ담밀(曇密) 등 진나라와 송나라의 뛰어난 스님이 모두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의는 혜변(慧辯) 등 20여 명과 함께 길을 찾아 남쪽으로 가서 이 산에서 살았다.

이보다 먼저 청주(靑州) 승려 정광(定光)이 오랫동안 이 산에서 살았는데 40년간 공덕을 쌓으며 선정과 지혜를 겸하여 닦은 사람이었다. 지의가 아직 이 산에 오기 2년 전에 그는 산에 사는 사람들에게 예고하였다.

“큰 선지식(善知識)이 이곳에 와서 살게 될 것이니 콩을 심어 장을 담그고 부들을 엮어 자리를 만들며 다시 집을 세워서 그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지의가 천태산으로 가서는 정광과 만나니 서로 칭송하며 진리의 오묘한 뜻을 진술했다. 이때 정광이 말했다.

“큰 선지식이여, 내가 젊었을 때 산에서 손을 흔들며 찾던 일이 생각나지 않는가?”

지의는 깜짝 놀라 기이하게 여기며 꿈속에서 있었던 일과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는 진나라 태건(太建) 7년 가을 9월이었다.

또한 종소리가 골짜기에 가득 들려와 대중들은 모두가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자 정광은 “종이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과 인연이 있는 것이니 그대는 여기에 머무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의가 점을 쳐서 좋은 장소에 터를 잡았다. 이곳은 정광이 머무르던 장소의 북쪽이자 불롱산(佛壟山)의 남쪽이고 나계(螺溪)의 근원이 있는 곳이며 한적하고 앞이 트여 진여(眞如)를 찾을 만한 곳이었다. 땅은 평평하고 샘은 맑아 여기저기 오가다가 거기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 모자를 쓰고 붉은 옷을 입은 사람 셋이 나타나 소(疏)를 집어 들고 청하기를 “이곳에서 도를 닦아도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곳에 초가 암자를 세우고 소나무와 과일나무를 심었다.

그 후 몇 년간 여기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서 다시 저자에서와 같은 모임을 이루었다.

이때 정광이 말하였다.

“지금은 적당하게 조용히 살아가기 좋다. 이제 나라가 안정되면 세 지방이 하나로 통합될 것이며 아마 어떤 귀인이 나타나 당신을 위해 사원을 세워주어 법당이 이 산에 가득히 찰 것이다.”

그 후 지의는 사원 북쪽 화정봉(華頂峯)에서 혼자서 고요히 두타행을 닦았다. 그런데 센 바람이 불면서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우레가 진동하였으며 수많은 도깨비들이 한 몸에 백 가지 형상을 나타내면서 불을 토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괴이한 현상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는 마음을 억누르고 앉아서 참아내며 고요히 자신을 잊고 있었다. 그러자 몸과 마음의 번뇌와 고통이 병으로 나타나 마치 불에 타는 것 같았으며 또 사망한 부모가 지의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고통을 말하며 애절하게 구원을 청하는 모습도 보였다.

지의가 다시 법인(法忍)에 의지하여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자 강렬하고 간절한 두 가지 인연의 감응은 곧 없어졌다. 그런데 문득 서역의 신령스러운 승려가 찾아와 말하였다.

“적을 제압하고 원한을 이겨낸 것은 곧 용기가 될 수 있다.”

진나라 선제(宣帝)가 조서를 내려 시풍현의 조세를 사찰 비용에 사용하게 하고 천태산이 있는 현 이름을 안락현(安樂縣)으로 바꾸게 했다.

매년 여름안거 때면 늘 《유마경》을 강의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세 갈래의 보배 계단이 공중에서 내려왔으며 수십 명의 범승들이 계단으로 내려왔다. 그러더니 법당에 들어가 예배하고 손으로 향로를 받들고 지의의 주위를 세 바퀴 돌고 한참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해안으로 옮겨가 교화하여 구민(歐閩: 광동성 동부 및 복건성 남부] 지대를 법으로 다스렸다. 그래서 의문을 제기하고 도를 청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산으로 찾아왔다.

진나라 황제 그의 명성을 듣고 조서를 내려 지의를 거듭 불렀다. 지의는 법을 소중히 간직할 임무를 지녔기에 자기 몸을 쉽게 처신하지 않고 그것을 사절했다. 그 후 영양왕이 간절히 간(諫)하고 또 황제의 칙명을 가지고 사신이 일곱 차례나 내려왔는데 그 글은 황제가 직접 쓴 것이었다. 그러자 지의는 도가 유통되자면 왕이 불법에 의거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수도로 갔다.

진나라 황제가 법회에서 나오자 모든 관리들은 지극히 공경하며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문을 듣고서 법을 받들고 도를 이어가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칙명을 내려 영요사(靈曜寺)에 선원(禪院)을 세우고 학도들을 모집하게 하니 그곳에 참석하기 바라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 후에도 자주 《태극전》에 칙명을 내려 《인왕경(仁王經)》을 강의하게 하였으며 천자가 몸소 거기에 참석하였다.

나중에 영요사가 좁고 규모가 작아서 다시 한적한 곳을 찾고 있었는데 어느 날 홀연히 꿈속에 한 사람이 단정한 차림새를 한 호위하는 사람과 시종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대주며 말하였다.

“나는 관달(冠逹)입니다. 그대가 삼교(三橋)에 머무르기를 청하는바 입니다.”

지의는 곧 ‘관달은 양무제의 법명이며 삼교란 광택사(光宅寺)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는 자리를 옮겨 그곳에 거처했다.

그해 4월 진나라 황제가 이 사원에 행차하여 업을 닦고 크게 보시하였다.

지의는 곧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다시 광산(匡山)으로 가서 제자들을 모집하고 도를 행하였는데, 아름다운 징조에 자주 감응하였고 아주 먼 변방의 승려들이 그 소문을 듣고 줄지어 찾아왔다. 그는 다시 저궁(渚宮)의 고향 땅으로 가서 자기가 태어난 땅의 은혜에 보답하니 도인들과 속인들은 학수고대하였고 늙은이나 어린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따랐으며 계율을 주는 장소와 강당에는 사람들의 수효가 만 명에 이르렀다.

마침내 당양현(當陽縣) 옥천산(玉泉山)에 정사를 세웠는데 황제의 칙명으로 사원의 현판이 내려와 ‘일음정사(一音精舍)’라고 하였다. 그 땅은 예로부터 황량하고 험악하여 귀신과 짐승, 뱀 등이 포악한 짓을 하였는데 사원이 세워진 후로는 그 우환거리가 없어져 좋아졌다.

그해 봄에는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모두 신이 노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의가 샘터에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서 경을 읽으니 곧 감응이 일어나 구름이 있고 비가 쏟아졌다. 그래서 허망한 소리들은 저절로 없어졌다.

진왕(晉王 훗날 수양제)이 지의를 존경해 제자의 예를 갖추고 많은 시주를 하면서 지자대사(智者大師)라 존칭했다.

이때부터 지의는 황제의 스승이 되어 이끌고 권유하여 날마다 그윽하고 현묘한 경지로 나가도록 하였다. 이때 얻은 보시 물건은 60여 가지나 되었는데 이것을 단번에 공경할 사람[敬田]들과 보양 받을 사람[悲田]들에게 보시하여 복덕이 더욱 커지고 집과 나라가 더욱 번창하도록 기원하고 나서 그전에 살던 숲으로 돌아가려 하자 왕이 굳이 만류하려 했다.

그러자 지의가 예전 약속을 이유로 옷을 털고 일어나니 왕이 감히 더 이상 부르지 못하고 합장하고는 성심껏 전송했다.

그 후 소비(蕭妃)가 질병으로 고생하였는데 의원도 치료할 수 없게 되자 왕이 류고언 등을 보내서 질병을 고쳐 주기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지의는 다시 승려들을 거느리고 7일 재계를 설치하고 금광명경참회를 진행했다. 6일째 되는 날 저녁 갑자기 이상한 새 한 마리가 제단에 날아들어 대굴대굴 구르며 죽었다가 잠시 후에 살아나서 날아가는 것이었다. 또한 돼지의 신음소리가 들리자 대중이 동시에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때 지의가 말하였다.

“이런 모습이 나타난 것은 왕비의 병이 나을 징조이다. 새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다 죽었던 왕비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고 돼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는 것은 재계의 복이 서로 이어진 것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날이 되자 과연 왕비는 병이 나았다. 왕은 크게 기뻐서 축하하였다.

지의는 때를 만나면 조정에 들어갔으나 천태산으로 되돌아가 직접 선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전에 하던 참회를 진행하였고 뒤이어 서원하며 말하였다.

“만약 제가 삼보(三寶)에 이익이 된다면 저의 여생을 한정하여 주시고 그것이 부질없는 생이라면 빨리 죽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 땅에서 생을 마칠 것이다. 그래서 늘 산에 돌아오자고 하였다. 지금 죽음의 예고를 받았으니 형세로 보아 명이 다할 것 같다. 내가 죽은 후에 서남쪽 봉우리 위에 안치하되 시신 주위에 돌을 쌓고 소나무를 심어 구덩이를 메우며 흰색의 탑을 세워 보는 사람마다 마음을 내도록 할 것이다.”

천태산 큰 석상 앞에 단정히 앉아서 생을 마치니 향년 67세였다. 수나라 개황(開皇) 17년 11월 22일이었다. 그가 생을 마친 후에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거두었다.

자료출처: 《신승전》 《속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3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