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목목(木木)
【정견망】
당나라 법순(法順)은 속성이 두씨(杜氏)이며 옹주(雍州) 만년현(萬年縣) 사람이다. 그는 품성이 부드럽고 온순하였으며 나쁜 일과 관련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으며, 부모와 헤어져 군인으로 먼 곳까지 끌려가서도 어려움과 괴로움을 꺼리지 않았다.
열여덟 살에 세속을 버리고 출가하여 인성사(因聖寺)의 승진(僧珍) 선사를 섬기면서 정업(定業:禪)을 닦았는데 신적(神跡)이 아주 많았다.
승진 선사는 속성이 위씨(魏氏)로 검소한 생활에 뜻을 두었으며 승직을 맡지 않는 것을 필생의 업으로 삼았다. 수도의 동쪽 언덕을 마두산(馬頭山)이라고 하였는데, 한적한 언덕이 겹으로 되어 있고 깊어서 영굴(靈窟)로 삼을 만하였다. 승진은 처음 그 터를 닦고 속인들에게 그곳을 손질하도록 권유하였다.
그 후 단정히 앉아 지휘하면서 규범과 규칙을 보여주니 갑자기 감응이 일어나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개는 발이 희고 몸은 누런색이었으며, 자연히 길들여져서 곧바로 굴 안으로 들어가 입에 흙을 물고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돌아왔는데, 아무리 힘들어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식사 때에는 스님들과 같이 먹었고 점심때가 지나면 먹지 않았다.
이런 기이한 일이 있게 되자, 사방 먼 곳에서까지 소문을 듣고 귀의하였고, 마침내 황제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수문제(隋文帝)가 그를 존중하여 날마다 쌀 석 되씩을 보내서 공양에 쓰도록 하였는데, 이 일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감(龕)이 완성되자 그는 까닭 없이 생을 마쳤으니, 지금의 인성사가 바로 그곳이다.
법순은 그때 직접 그 일을 목격한 관계로 다시 갑절이나 신심을 더하여 귀의하여 절을 짓는 일을 힘껏 도왔으며 편의에 따라 청업(請業)하였다. 만년에는 경주(慶州)에서 교화를 행하여 백성들에게 권유하여 모임을 마련하게 하였는데 공양 한도를 5백 명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막상 재식(齋食) 때가 되자 정했던 것보다 사람이 갑절이나 와서 공양주가 걱정했다. 이에 법순이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공급하고 공양소의 한도에 연연하지 말라.”
그것은 본래 천 명에게도 넉넉히 공급할 수 있게 풍족한 공양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청하(淸河)에 장홍창(張弘暢)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집에서 말과 소를 길렀다. 그런데 그의 성질이 본래 거칠고 포악하여 사람들이 모두 꺼리는 까닭에 가축을 팔려고 하여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법순은 자비심과 선행에 대하여 말해주면서 만약 자기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르면 이후에 다시는 사람들과 다투고 욕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별난 사람들까지도 인도하고 깨우쳐주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는 늘 대중을 이끌고 여산(驪山)으로 가서 고요히 하안거를 하였다. 그곳에는 벌레와 개미가 많아서 채소를 심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벌레를 해칠 것이 걱정되어 땅을 지정하여 가리켜주면서 벌레들로 하여금 그곳으로 옮겨가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보니 구역을 정해준 곳에는 벌레가 하나도 없었다.
당시 법순은 종기를 앓고 있었는데 고름이 터져 밖으로 흘러나왔다. 사람들 가운데 그를 공경하여 그 고름을 빨아주는 사람이 있었고 비단으로 닦아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차고가 생겨 종기가 치유되었는데, 남은 고름에서는 향기가 풍겨 나왔으며 고름을 닦아낸 비단에서도 향기가 쉼 없이 나왔다.
삼원현(三原縣)의 백성들 가운데 전살타(田薩埵)라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병에 걸려 귀머거리가 되었고, 또 장소(張蘇)라는 사람도 태어나면서부터 병에 걸려 벙어리가 되었다. 법순은 이 소식을 듣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찾아오게 하여 함께 상의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여느 사람들처럼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어 영원히 병에서 회복되었다.
무공현(武功縣)에서는 한 승려가 독룡(毒龍)에게 홀렸는데도 대중들이 그에게 의탁하였다. 그리하여 법순은 팔짱을 끼고 단정히 앉아 그와 마주하고 있으니 독룡이 할 수 없이 병든 스님의 몸에 빙의하여 말하기를 “선사께서 오셨으니 제가 오래 머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라고 하고는 극히 번거롭게 한 것을 사과하고 떠나니, 이어 곧 시원스럽게 병이 나게 되었다.
때문에 멀고 가까운 데서 못쓸 병과 나쁜 귀신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찾아와 의탁하게 되었는데, 그러면 법순은 다른 방책은 쓰지 않고 마주 앉아서 보기만 하였다. 이를 두고 식자들은 그의 음덕(陰德)에 감응된 것이기 때문에 유령(幽靈)이 남달리 공경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설교할 때 흔히 뜬구름 같은 말은 피하고 바른 이치를 뚜렷하게 말해주었으며, 신(神)이 깃든 나무나 귀신을 모시는 사당 따위는 보이는 데로 불살라버렸고, 무당들이 섬기는 곳은 직접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에 귀신에 의한 상서로운 징조가 여러 번 나타났으나, 조금도 꺼리거나 막힘이 없었다. 그가 정법을 받듦이 이와 같았다.
그의 독실한 성품은 면밀하였고 널리 사랑하는 인정까지 겸하여 도속과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초청하고 맞아들였으며, 그가 하는 말과 물음에 대하여 뜻을 같이하여 마음에 딴 생각을 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고치기 어려운 고질적인 중병에 걸렸거나 깊은 소원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모두 제때에 가르쳐주어 모두가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때때로 찬양하고 비방하는 두 갈래의 치우친 평판이 있을 경우 그런 말이 그의 귀에 들어와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한번은 남쪽 평야로 가다가 누런 물이 흐르는 강물을 건너게 되었는데, 그 강물은 넓고 물이 넘쳐흘러가므로 옷을 걷어 올려야 건널 수 있었으며, 언덕은 가파르고 미끄러워 설령 기어오른다 하더라도 도로 미끄러져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강물의 흐름이 끊어지더니 곧 바닥이 드러나 땅으로 건너게 되었으며, 법순이 언덕에 오르자 끊어졌던 물도 뒤따라 다시 흘렀다. 제자들은 그것을 눈으로 보았지만 그 까닭을 헤아릴 수 없었다.
당태종 정관(貞觀) 14년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도 누누이 문인들에게 자신이 일생 동안 닦아온 법을 말해주어 이어받도록 하고 말을 마치고는 평상시와 같이 남쪽 교외(郊外)에 있는 의선사(義善寺)에 좌정(坐定)한 채 생을 마쳤다. 향년 84세였다.
임종 때 한 쌍의 새가 방 안으로 날아들어 애절하게 슬피 울었다. 앉은 모습 그대로 번천(樊川)의 북쪽 언덕에 영구(靈柩)를 보내어 바위에다 구멍을 뚫고 안치하였다. 경읍(京邑)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고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판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몸의 색깔이 변색되지 않았고 한 달이 넘어도 오히려 더 선명해졌으며, 앉은 상태에서 3년이 되었는데도 마른 뼈가 흩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생을 마친 때로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기이한 향기가 시신이 있는 곳에서 풍겨 나와 흘렀다.
학도 승려들은 외부의 침해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마침내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다 안치하였는데, 길일(吉日)이면 사부대중이 찾아가 공양드리는 사람들로 더욱 가득 하였다.
출처: 《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33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