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목목(木木)
【정견망】
세유(世瑜)는 속성이 진씨(陳氏)이며 원래 집은 시주(始州)였다.
그는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머슴으로 살아갔는데 몸집이 장대하고 키가 8척 3촌이나 되었다. 그는 불교의 진리를 배울 것을 염원하였으나 혼자서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수양제 대업(大業) 12년(616년)에 면주(綿州 지금의 사천 면양 동쪽) 진향사(震響寺) 윤(倫) 법사가 있는 곳에 찾아가 그곳에서 출가하여 하루 한 끼만을 먹고 두타행(頭陀行)을 닦으며 부지런히 고행을 이어나갔다.
그 후 다시 이주(利州 지금의 사천 광원廣元)로 가서 사원에 들어가 머무르다가 후에 다시 익주(益州) 면죽현(綿竹縣)의 향응산(響應山)에 들어가 홀로 몇 해를 살았다. 당시 네 마리 원숭이들이 산의 과실 등 먹을 것을 공양해 주었다.
그때 다른 곳에 사는 신자가 있었는데 식량을 지고 찾아와서는 그가 깊은 산 속에서 사는 것에 대하여 놀라고 의아해하였다. 그는 늘 훈륙향(熏陸香)과 침수향(沈水香)같은 향들을 태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산으로 돌아오다가 절반쯤 왔을 때 몸빛이 진한 푸른빛을 띠고 세상에 드문 모습을 한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연꽃과 사탕수수와 토란을 등에 지고 산에 오르며 말했다.
“선사(禪師)께 공양드리러 갑니다.”
그런데 세유가 3년 동안 산에 살면서 먹은 쌀은 겨우 한 섬 7말이었다. 6차례(낮에 3회 밤에 3회) 도를 닦았으며 원숭이와 새의 울음소리를 시간을 맞추었다. 이곳에는 처음에는 하나의 샘이 있었으나 후에 세 곳에서 샘이 솟아 아래로 흘렀다.
당나라 태종 정관(貞觀) 원년(627년) 네 마리 용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삼론(三論)의 종지를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예(靈睿) 법사가 강의하는 자리에 찾아갔는데 거기서 들은 말의 이치가 이전에 본 글과 신통히도 같아 거듭 저술을 하였다. 곧 면주로 가서 대시사(大施寺)에 머물렀다.
정관 19년(645년) 4월 8일에 그의 방에 향기가 가득했고 그가 앉아 있던 바닥에서 세 닢의 금전이 솟아났다. 모든 대중이 향기 나는 곳을 찾아가니 그것이 세유의 방에서 풍기고 있었다. 그들은 곧 세유가 가부좌를 틀고 손에 향로를 잡고 원적(圓寂)한 것을 보았다.
자사(刺史) 유덕위(劉德威)가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일이라고 기뻐하며 감실(龕室)을 만들어 그곳에 앉혔는데 3년간 썩지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 63세였다.
자료출처: 《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33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