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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상(商) 22: 고종의 양암(諒闇)

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반경(盤庚)은 이렇게 시작을 잘했지만 재위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천도 14년 후 세상을 떠났고 동생인 소신제(小辛帝)가 즉위했다. 소신제는 좋은 국면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사기》에서는 “소신제가 즉위하고 나서 은이 다시 쇠락했다”고 했다.

이후 소신의 동생 소을(小乙)이 즉위했고 소을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아들인 무정(武丁)이 부친의 뒤를 이었다. 이는 또 다시 종묘에서 단상 위에 모셔져 후세에 고종(高宗)이라 불리는 군왕이 되었다. 이는 그가 상조가 더 이상 쇠퇴하지 않도록 하늘을 공경하고 덕을 닦으며 공훈을 세운 군왕이었음을 설명한다.

서주(西周) 초기 성왕을 대신해 섭정했던 주공(周公) 희단(姬旦)은 어린 왕에게 안일하고 음락한 즐거움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일찍이 유명한 《상서・무일(無逸)》을 지었는데 그중에 무정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은나라 고종은 밖에서 오랫동안 고생해서 소인(小人)들과 함께 있었는데 발탁되어 즉위해서는 양암(亮陰 또는 양암諒闇이라고 하는데 천자가 상중에 있음을 뜻함)에서 3년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을 하기만 하며 온화했으며 감히 거칠게 하거나 안락하지 않고 은나라를 아름답고 안정되게 만들어 작고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원망하는 때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종이 나라를 향유한 것이 59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무정은 즉위 전 일찍이 민간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다. 그는 대신인 부열(傅說)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 소자는 옛날에 감반(甘盤)에게 배우다 황야로 숨었고 하내(河內)에 들어가 집을 지어 살았으며 황하에서 박(亳)으로 갔는데 마칠 때까지 드러난 것이 없었다.”고 했다.

이 임금은 확실히 다른 왕들과 달랐다.

고종의 양암(諒闇)

부왕이 세상을 떠난 후 직접 정사를 돌보기 전에 마땅히 먼저 3년상을 지켜야 했다.

부모님 초상에 삼년을 지키는 것은 요순(堯舜)시기부터 시작되었고 하상주(夏商周) 3조(朝)에 걸쳐 이런 전통이 지속되었으며 군왕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양암이란 바로 군왕이 상중에 효를 지키는 것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다.

삼년상을 지키는 것이 아주 흔하긴 하지만 무정처럼 천하에 이름을 얻는 경우는 흔치 않다.

무덤 옆에 임시 거처를 만드는데 흙과 돌을 쌓아 만들고 기둥이나 처마도 없고 장식도 없으며 띠 풀로 지붕을 만드는데 이런 띠 집을 가리켜 흉려(凶廬)라 했다. 무정은 흉려 안에 머물며 3년 상을 치렀다.

삼년간 소복을 입었고, 상주용 지팡이를 짚고 멀건 죽을 먹으며 풀로 만든 자리에서 자고 흙덩이를 베개로 삼았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여자도 가까지 하지 않았으며 국정에 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이런 예의는 지금도 많은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데 직계 존속이 세상을 떠나면 그 후손들이 3년간 결혼하지 않고 어른의 영혼에 대한 존중을 표시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무정 시기 및 보다 상고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삼년상이란 부모가 자식을 길러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예법에도 있고 또 예의(禮義)가 있다. 하지만 막상 해보면 알게 되는데 일언일행(一言一行) 일사일념(一思一念) 및 행주좌와(行住坐臥)가 모두 예법에 부합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무정은 아주 철저해서 삼년간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마음도 전혀 어지러워지지 않았다. “고종은 상을 치르며 3년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는 아름다운 역사 일화를 남겼다.

사람마다 다 그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진정으로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백성들의 모범이 된다. 후대에 영토를 개척한 ‘무정중흥(武丁中興)’이란 성세(盛世)를 만들어 여러 제후국들이 그의 덕행에 탄복한 것도 이와 큰 관계가 있다. 또 무정이 후세에 고종이란 명예로운 칭호로 불리게 된 것 역시 이 일과 관련이 아주 크다.

백가지 선행 중에 효(孝)가 으뜸이라 불릴 정도로 중국문화에서는 효를 중시한다. 그런데 효의 실질은 바로 보답이다. 수백 년 후 공자가 편찬한 《삼례(三禮)》에서는 3년 상에 대해 “공자가 말씀하시길 자식이 태어나서 3년이 지난 후에야 부모님의 품을 벗어난다. 무릇 3년 상이란 천하에 통용되는 상례이다.”라고 했다.

무정 이전에는 순임금이 효순(孝順)한 이야기가 오랫동안 유전되어왔다. 순임금은 살아 있는 양친을 모시는 효를 다했다면 무정은 자식으로서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효의 전범이다.

임금이 이렇게 근엄하게 제도를 지키니 조정의 정무가 어떻게 하는가? 천하를 관리할 사람이 없으니 큰 혼란이 생긴 게 아닐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 무정은 회칠도 하지 않은 움막에 거주하면서 거적을 덮었고 상례(喪禮)에 관한 일 외에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 일은 조금도 혼란하지 않았고 예악 역시 조금도 붕괴되지 않았다.

예악(禮樂)제도는 원래 하늘에서 기원한 것으로 하늘이 성현(聖賢)을 세상에 내려 보내 전파하고 이를 통해 천하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예악 때문에 천하에 큰 혼란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은상인(殷商人)들은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공경하는 도덕풍속이 도타웠고 또 군왕이 몸소 시범을 보이고 오직 더 열심히 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나중에 무정이 상조(商朝)를 다시 진작시키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극한 효와 성스런 덕 때문이라고 했다. 《사기》에서는 “무정이 정사를 바로잡고 덕을 행하니 천하가 모두 즐거워하고 은나라의 도가 다시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상제는 무정이 집권하던 시기 조정의 백관들이 각기 자신의 직책을 지키게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에게 현신 부열(傅說)을 보내주었다.

그렇다면 왜 무정이 덕을 닦고 효를 실행하자 상조가 부흥할 수 있었을까?

《회남자・태주훈(泰族訓)》에는 이 속에 담긴 오묘함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은나라 고종이 선제(先帝)의 상복을 입은 3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천하가 조용해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러다 그가 한마디를 하자 천하가 크게 움직였다. 이는 하늘의 뜻에 따라 말을 하고 입을 닫았기 때문이다.”

얕은 것 같지만 또 심오한 도리인데 바로 천인상통(天人相通 하늘과 사람이 서로 통한다)이다.

참고문헌:
1. 《상서정의》
2. 《예기정의》
3. 《사기》
4. 《논어》
5. 《회남자》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9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