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충정(忠貞)을 다한 비간
비간(比干)은 상주왕(商紂王)의 숙부로 다시 말해 제을(帝乙)의 동생이다. 제을이 왕위에 있을 때 부승상인 소사(少師)를 역임했다. 제을의 병이 중할 때는 임시로 정사를 돌보기도 했다.
본명은 ‘간(干)’인데 봉지(封地)의 이름이 ‘비(比)’라서 ‘비간’이라 불렸다. ‘비’는 지금의 산동성 곡부(曲阜) 일대를 말한다.
제을이 대신들에게 아들을 맡기면서 비간에게 제신(帝辛 주왕)을 보좌하도록 했다. 그러나 제신 주(紂)는 애초 예상과 달랐다. 주왕이 더는 수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미자는 도망쳤고 기자는 미친 척 했지만 비간은 “남의 신하된 자로서 죽음으로 다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비간은 역사적으로 존중받는 영웅이지만 애석하게도 비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역사책에 아주 일부만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사기》와 《춘추》속에 산재되어 있다.
비간은 미자와는 견해가 달랐다. 그는 “군주가 허물이 있음에도 간언하지 않으면 충(忠)이 아니고, 죽음이 두려워 말하지 못하면 용기(勇)가 아니며, 허물이 있어 간언해도 쓰이지 못하고 죽는다면 지극한 忠이다.”라고 여겼다.
비간은 주왕이 하루 종일 달기(妲己)와 적성루(摘星樓)에서 환락을 즐기는 것을 알기에 적성루로 왕을 찾아가 그곳에서 죽음을 기다렸다. 죽기 전에 그는 오직 한 가지 일만 했으니 바로 주왕을 훈계해 깨우치도록 노력한 것이다.
하지만 주왕은 끝까지 자신을 물고 늘어지는 비간에게 몹시 화를 내며 말했다.
“그대는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하는가?”
비간이 대답했다.
“저는 선량과 인의에 근거해 간언합니다.”
그러자 주왕이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내 듣자하니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가 있다고 하는데 믿을만한 것인가?”
이에 비간을 살해한 후 그의 심장을 꺼냈다.
당시 조가(朝歌)는 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으로 적심대(摘心台)의 실물이 존재한다. 적심대란 명칭은 원래 적성루에서 따온 것이다. 상주왕 때 저 유명한 녹대(鹿台)를 만들었는데 녹대 자체가 이미 아주 높았지만 대 위에 다시 누각을 지어 더 높이 올리고는 이름을 ‘별을 따는 누각’이란 뜻에서 적성루라 한 것이다. 손만 뻗으면 별을 딸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높다는 뜻이다.
상조(商朝)가 멸망한 후 적성대는 곧 폐기되었고 적성대란 이름도 적심대로 변했다. 그러니 후대 어느 임금이 또 이곳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한대(漢代)에 적심대 위에 청석으로 패방(牌坊)을 만들어 충렬방(忠烈坊)이라 불렀고 적심대는 이후 사람들이 비간을 기념하는 장소로 변했다.
주 무왕은 상을 멸망시킨 후 굉요(閎夭)에게 “비간의 무덤에 봉분을 만들게 했다.”
한편, 비간이 피살되자 당시 임신 중이었던 부인 진씨(陳氏)와 노비가 다행히 탈출에 성공했다. 조가에서 멀지 않은 돌산인 ‘선인제(仙人梯)’란 산굴속에 몸을 숨기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견(堅)이라 했다. 나중에 천하가 평정된 후 주 무왕이 이들을 찾았다. 견이 출생한 장소가 장림(長林)이었기 때문에 무왕은 그에게 임(林)이란 성을 하사했다.
비간의 인(仁)은 ‘충(忠)’에서 연유한다.
비간은 사후 단순한 경앙이 아니라 그야말로 엄청나게 숭배되었다. 비간의 묘는 ‘천하제일묘(天下第一墓)’로 불렸고 비간의 사당은 ‘천하제일사당(天下第一廟)’으로 불렸다. 사당 안에 공자가 새긴 비석이 있는데 이는 ‘천하제일비’로 불린다.
비간의 묘에 봉분을 만든 것은 무왕이 주왕를 토벌한 후 실시한 3가지 큰 일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비간의 묘는 역사책에 기록된 최초의 언덕 식 분묘라서 ‘천하제일묘’로 불리는 것이다.
몇 십 년 전 중국 ‘문화혁명’ 기간에 수많은 사당과 사찰이 파괴되었지만 비간의 사당은 조금도 손상 받지 않고 지금까지 원래의 묘우(廟宇)가 그대로 남아 있다. 때문에 비간의 사당을 ‘천하제일사당’라 한다.
비간의 묘 안에 공자가 남긴 유일한 석각문자인 ‘은비간막(殷比干莫)’이 있는데 여기서 막(莫)은 묘(墓)와 통한다. 다시 말해 ‘은비간묘(殷比干墓)’란 뜻이다. 그러므로 비간의 사당 안에 ‘천하제일비’가 있는 것이다.
비간의 사당 안에는 또 당태종, 강희제, 이백 및 다른 여러 제왕과 장상, 문인묵객(文人墨客)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비간은 단심(丹心)으로 의(義)를 취하고 인(仁)을 이뤘으며 중화문화 속에서 충의(忠義)가 대를 이어가며 전해지도록 아로새겼다. 가히 천고에 불후(不朽)하다고 말할 수 있다.
비간 사당에는 또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가 쓴 ‘조비간문(吊比幹文)’ 비석이 남아 있는데 이 작품도 걸작으로 꼽힌다. 여기서 그중 몇 가지 구절만 인용해보자.
“외후(嵬侯)가 포를 떠서 젓갈로 담긴 것을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형후(邢侯)는 이미 육포가 된 것을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미자가 떠나가는 것을 그대는 알지 못했는가? 기자가 노예가 된 것을 그대는 몰랐단 말인가? …중략…. 오호라 충직한 선비여! 그대가 어찌 나의 신하가 아니겠는가?”
당나라의 명신(名臣) 이한(李翰)은 《상소사비(商少師碑) 상나라 소사인 비간의 비》에서 이렇게 적었다.
“비간은 왕의 숙부로 친밀하기가 지극했고 나라의 원로대신으로 지위가 아주 높았다. 지위가 아주 높았기에 그 위태로운 것을 보지 않을 수 없었고, 관계가 친밀했기에 그 조상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탕(成湯)의 업적이 장차 물에 떠내려가고 상왕(商王)의 운명이 장차 끊어지려 하니 패망에서 구하기 위해 마침내 간언하다 죽었구나. 심장을 가른 게 아픈 게 아니라 나라가 망한 것을 아파했구나! 이는 공(公)의 뜨거운 충심이 표현된 것이니 이렇게 경계로 삼노라!”
참고문헌:
1. 《맹자잡기(孟子雜記)》
2. 《사기‧은본기》
3. 《사기‧송미자세가》
4. 《상서‧무성(武成)》
5. 《사기‧주본기》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407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