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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상(商) 37: 노예가 된 기자

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기자(箕子)라는 인물은 그저 ‘어질다(賢)’는 평가만으로는 부족하다. 공자는 그를 은말 세 인(仁)자의 하나라고 했으니 그의 인부터 말해보자.

상조 말년 국력이 점점 약해지면서 사방에서 혼란이 일어나는데 상주왕은 갈수록 어리석어졌다. 이때 기자의 선택은 비간이나 미자의 대처방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미쳤다. 물론 진짜로 미친 건 아니고 미친 척했다.

기자는 상주왕의 백부에 해당하는데 다년간 줄곧 상주왕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노력해왔다. 그러다 주왕이 상아(象牙)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할 때 기자는 이렇게 탄식했다.

“일단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게 되면 반드시 옥으로 된 잔을 쓰게 될 것이고, 옥잔을 쓰게 되면 반드시 먼 곳의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들을 가져올 궁리를 할 것이다. 그러니 수레의 말, 궁실의 사치스러움이 이것으로부터 점점 시작될 것이니 나라가 흥성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주왕이 주색에 빠져 밤새 술을 마시다가 어느 날 한번은 날짜를 잊어버려다. 이에 주변 신하들에게 물어봤지만 모두들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기자에게 사람을 파견해 물어보게 했다.

기자가 자신의 문인에게 말했다.

“일국의 군주와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날짜를 모른다면 천하가 위험해질 것이다. 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날짜를 모르는데 나 혼자만 안다면 그럼 내가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이에 문인에게 기자도 술을 많이 마셔서 날짜를 모른다고 대답하도록 했다.

기자는 이런 인물이었기에 주왕이란 인물이 신하가 간언을 한다 해도 따르지 않을 것이며 상조(商朝)의 말일이 눈앞에 닥친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자에게는 주왕을 떠나 상족의 혈맥(血脈)을 보전하라고 권고했으면서도 자신은 오히려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 떠날 것을 권하자 기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간언했으나 들어주지 않는다고 떠나 버리면 이는 임금의 악(惡)을 치켜세우는 것이고 스스로 백성들에게 기쁨을 빼앗는 것이니 나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다.”

이에 곧 머리를 풀고 노예들과 함께 뒤섞여 미친 척했다. 실로 답답하기 그지없던 때에 그는 조가성 북쪽 상림(桑林)에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 주왕은 기왕이 미친 척 가장한 것을 발견하고 곧 그를 감옥에 가뒀다.

나중에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고 군사가 패배하자 주왕은 스스로 불에 타죽었다. 주 무왕이 조가에 들어와 기자를 석방하니 이때 기자의 나이 이미 51세였다.

2년 후 기자를 존경한 주 무왕이 따로 일정을 내서 기자를 방문해 나라를 다스릴 방략에 대해 물었다.

그는 기자에게 가르침을 청하며 물었다.

“은상은 왜 멸망했습니까?”

그러자 기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무왕은 자신이 실언(失言)했음을 알고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해야 천명(天命)에 순응해 국가를 다스릴 수 있습니까?”

기자는 그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는 무왕에게 대우(大禹) 시대부터 전해져온 천하와 나라를 다스리는 9가지 큰 법칙에 대해 말해주었다. 이 9가지 큰 법칙은 후세 군주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준칙이 되었다. 《상서》에 독립적으로 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홍범구주(洪範九疇)〉라 한다. 이중에 오행학설, 천인상응(天人感應)학설, 왕도(王道)학설은 3천여 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의 귀에도 익숙하다.

기자는 비록 〈홍범구주〉를 무왕에게 전수해주었지만 무왕을 보좌하는 신하가 되려 하진 않았다.

기자는 일찍이 미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조(商朝)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새 왕조의 신하가 되진 않겠습니다.”

그는 무왕에게 자신을 상조와 어느 정도 친족관계가 있는 조선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주 무왕은 그의 요청에 응해 그를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또 지금의 한반도에 해당하는 고조선 지역을 기자에게 봉하고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했다.

기자는 5천명의 상조(商朝) 신민(臣民)들을 이끌고 고국을 떠나 멀리 고조선으로 갔고 그곳에서 ‘기씨조선(箕氏朝鮮 역주: 국내에서는 흔히 ’기자조선‘이라 한다)’을 세웠다. 당시 기자가 데려간 5천 명 중에는 시서(詩書), 예악, 의약(醫藥), 음양(陰陽), 무술(巫術) 등을 사대부 및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이 있었으며 또한 은상의 예악(禮樂), 관제(官制), 음식, 경작, 양식(養殖) 기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자조선’은 지금의 요동반도와 한반도 북부에 해당하며 41대에 걸쳐 약 900년간 유지되었다.

‘기자조선’은 순조롭게 발전했고 수년 후 기자가 주나라 천자를 알현하러 왔다. 도중에 은상의 옛 도읍을 지날 때 궁실은 이미 폐허가 되고 일부 지역은 논밭으로 변해 푸른 벼와 기장이 자라고 있었다. 이에 상심한 기자가 즉흥적으로 시를 짓고 노래를 불러 울음을 대신했다.

보리 이삭은 점점 끝이 뾰족해지고
벼와 기장은 싹이 올라 밝디밝구나
저 교활한 아이가
나에게 친하게 대하지 않았네

麥秀漸漸兮
禾黍油油
彼狡童兮
不與我好兮

여기서 말하는 교활한 아이란 바로 주왕(紂王)을 가리키는데 기자에게는 조카뻘이다.

이 노래는 중국 최초의 문인시(文人詩)로 불리며 제목은 〈맥수(麥秀)〉다. 주왕이 나라를 잃은 아픔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사기》에서는 “은나라 백성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사마천은 또 이 작품에 대해 “소리 내어 울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울먹이려니 아녀자와 같아서”라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기자의 심정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기자는 나중에 조선에서 사망했는데 향년 93세였다.

기자는 당시 태사(太師)로 천문관측을 주관했고 역법(曆法)에도 능통했다. 농사는 그가 만든 달력에 따라 했고 농사와 어업 및 목축을 지도했다. 주왕이 술에 취해 날짜를 모르자 급히 기자에게 사람을 파견해 물어보게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무왕에게 천상(天象)을 관찰하고 경순(敬順 공경히 따름)하는 심법(心法)뿐만 아니라 치국의 큰 방략에 대해서도 아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가 고조선을 개발해 ‘기자조선’을 만들었고 한반도에서 9백년을 통치했다. 지금 북한 지역에는 수많은 기자의 후손들이 있으며 기자와 관련된 풍속들이 아직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한편, 기자가 “머리를 풀고 미친 척하다 노예가 되었고 마침내 숨어 살면서 거문고를 타고 슬퍼하다” 지은 노래가 〈기자조(箕子操)〉다. 〈기자음(箕子吟)〉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 아주 유명한 고금곡(古琴曲)이다.

또 그가 전한 〈홍범구주〉는 《상서》에서도 가장 신뢰받고 가장 중시하는 장(章)이다.

정말로 기자란 인물은 ‘인(仁)’이란 한 글자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어질었을 뿐만 아니라 지혜가 있었는데 큰 지혜가 있었고 그러면서도 의리가 있었다.

참고문헌:
1. 《죽서기년》
2. 《상서‧홍범》
3. 《사기‧송미자세가》
4. 《요사지지(遼史地志)》
5. 《고금악록(古今樂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40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