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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상(商) 38: 앞과 뒤가 달랐던 주왕

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은나라의 거울이 멀리 있지 않으니 바로 하나라 임금의 재위 시절에 있노라.(殷鑒不遠,在夏後之世)”

이 구절은 우리가 흔히 듣는 익숙한 구절인데 원래 출전은 《시경》에서 나왔다. 여기서 은(殷)은 상(商)의 별칭이고 감(鑑)이란 거울을 뜻한다. 즉 앞 사람의 교훈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역사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탕서・목서(牧誓)》에 근거해서 상주왕에 관한 교훈을 총괄해보자.

전후(前後)의 주왕

중국 하남성 학벽(鶴壁)시는 몇 개의 현(縣)과 향진(鄕鎭)을 포함하는 지급시(地級市)로 과거 상주왕이 살았던 곳이라 주왕의 흔적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주왕이 살던 지명은 조가(朝歌)로 그의 조상인 무정(武丁)이 이곳에 터를 잡고 무을(武乙)과 제을(帝乙)이 모두 이곳에 살았다. 원래 지명은 ‘매(沬)’라서 ‘매읍(沬邑)’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주왕의 부친 제을이 조가로 개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상주왕이 바로 이곳에 살았다. 이 지명은 그 후 줄곧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조가로 불린다.

주왕이 최후로 불에 뛰어 들어 죽은 녹대(鹿台)는 바로 조가 성안에 있다. 당시 조가성의 심장부이자 국고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동쪽에 거교촌(鉅橋村)이 있는데 상나라 말기 식량창고가 있던 곳이다. 녹대 바로 옆에 왕채(王寨), 신채(申寨), 유채(劉寨) 세 마을이 있는데 일찍이 주왕을 위해 싸우던 조가 수비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또 군대에 말 먹이 등 물자를 공급하던 초둔촌(草屯村)이 있고, 소를 키우던 곳인 우장(牛莊)이 있으며, 가죽으로 갑옷이나 말안장 등을 만들던 화피촌(化皮村)이 있고, 관리들이 관인(官印)을 교환하던 교사촌(交卸村)이 있다.

주왕의 의식주와 일상생활은 모두 녹대를 중심으로 조가 성 안에서 이뤄졌다. 서쪽에는 왕실에서 꽃을 재배하던 화와촌(花窩村)이 있고 서남쪽엔 주왕이 사냥할 때 사용하던 매와 사냥개를 기르던 응견촌(鷹犬村)이 있는데 지금은 고성촌(古城村)으로 이름이 변했다. 성 동북쪽 어파촌(魚坡村)은 물고기를 기르던 곳으로 옛날 현지(縣志)에서는 ‘은어지(殷魚池)’라 했다. 북쪽에는 희장(姬莊)이 있는데 여기서 희(姬)란 미녀를 말한다. 즉 왕궁에서 춤과 노래를 담당하던 가무교방(歌舞敎坊)과 음악을 담당한 악대(樂隊)가 있던 곳이자 거주지로 미녀들의 집결지였다. 서쪽에는 당장(唐莊)이 있는데 주왕의 침궁인 ‘궁당(宮堂)’이 있던 곳이다.

또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적성루(摘星樓)는 주왕이 비간을 살해한 곳이다. 주왕이 사망한 후 이곳은 폐허가 되었고 지금은 단지 높이 13미터 둘레 100미터 가량의 흙을 다져 만든 대만 남아 있다. 원래는 높은 대가 있었고 그 위에 또 누각(樓閣)을 세워 손만 뻗으면 하늘의 별을 딸 수 있을 정도로 높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아마 상당한 위용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주왕이 주 문왕(文王)을 감금한 유리(羑里)도 비교적 근처에 있는데 조가에서 북쪽으로 60리 가량 떨어진 곳이다. 지금도 옛 지명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 문왕이 유리에서 7년간 있으면서 《주역》을 추산했다고 한다.

주왕의 장례지 역시 조가에 있는데 주왕의 이름을 따라 신촌(辛村)이라 불린다. 현지(縣志)에는 “전설에 따르면 신촌(辛村)은 상조(商朝) 최후의 제왕인 신(辛 주왕)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이곳에 그를 장사지냈기 때문에 신촌이라 한다.”고 했다.

“지명이란 살아 있는 역사의 화석”이란 말이 있다. 살아있는 화석인 이들 지명을 통해 우리는 주왕이 세운 일부 공업(功業)과 일부 어리석은 일들에 대해 알 수 있다.

한편 조가 사람들이 상주왕에 대해 민간의 방식으로 평가한 것이 있는데 《주왕과 마동(馬童 말을 돌보는 아이)》이라 한다. 다음은 그 이야기다.

상주왕은 원래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파견해 세상에 내려온 인물로 낮에는 하계(下界)에서 일을 했고 밤이면 하늘에 올라가 보고하곤 했다. 또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했으며 백성들을 위해 많은 좋은 일들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천궁(天宮)에 돌아가면서 마동(馬童)에게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심심했던 마동이 문 앞에 있던 나뭇가지를 흔들어 장난을 쳤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그 ‘상수(霜樹 서리나무)’는 한번 흔들면 날씨가 갑자기 서늘해져서 하계에 큰 서리를 내리는 것이라 모든 곡식과 작물이 전부 얼어 죽었다. 이 재앙은 작지 않아서 온 세상이 그 해에 수확이 없었다. 상주왕은 더 이상 속세에 내려올 염치가 없자 마동을 자신의 모습으로 변모시키고 자신의 옷을 입혀 속세에 내려 보내 주왕 역할을 하게 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당부했다. “너는 많은 일을 관리한 능력이 없으니 대신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거라.” 마동은 조정의 일을 모르니 그저 자링 앉아서 술 마시고 놀 줄만 알았으며 이렇게 서서히 나라를 망가뜨렸다.

즉, 조가 사람들이 보기에 나중의 주왕(紂王)은 원래의 주왕이 아니며, 진짜 주왕은 큰 공업을 세웠지만 나중에 수하를 다스리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속세에 내려오지 못한 것이다.

신을 업신여기고 제사를 버리다

한편 《상성・목서》에서 “어리석게도 제사지내는 일을 폐기해 보답하지 않았다”라고 한 것은 신령(神靈)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포기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일이 발생한 것은 비교적 후기의 일이며 주왕 즉위 초기에는 신령과 조상에 대해 여전히 공경했다.

제신(帝辛) 시대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지는 청동기 중에 주왕(紂王)이 진행한 제사에 대해 새긴 명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령 사시필기정(四祀邲其卣)이라는 청동기에는 이런 명문이 있다.

“주왕 제신 즉위 4년 을사(乙巳)일에 왕께서 말씀하셨다. 문무제을(文武帝乙)께 소태정(邵大庭)에서 의(宜)라는 방식으로 희생을 사용해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이튿날인 병오일에 사란 제사를 지내고 정미일에 자(煮)제사를 지냈다. 을유일에 왕께서 저(杵)에 계셨다. 4월에 필(邲)이 왕에게 상을 하사받으니 바로 왕이 제사를 지낸 다음날이었다.“

즉, 제신이 즉위 4년 을사일에 부친인 제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제사가 끝난 후 필이란 인물에게 일부 돈과 조개를 주어 포상하자 필이 이 영예를 기념하기 위해 청동정을 만든 것이다.

갑골문에도 제신이 제사활동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고 또 전쟁 도중에도 제사의식을 진행했다. 신령(神靈)은 없는 곳이 없으니 산을 지나거나 강을 건널 때 또 군대를 출정하거나 개선할 때도 제사를 지냈다. 이에 관련해 많은 갑골문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후기에 들어오면 상주왕이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기록들이 역사서에 많이 등장한다. 갑골문 출토는 적어도 이 한점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아주 심각한 것이다. 가령 후세에 표현된 그런 놀라운 이야기들에 비해서도 훨씬 심각한 것이다.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천명(天命)의 보살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잘못이며 이는 신을 업신여기고 제사를 태만히 한 것이다.

산실된 사료(史料)가 아주 많지만 《묵자》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묵자가 주 무왕을 등장시켜 태서의 문장을 인용해 상주와이 제사를 버렸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상서・태서》에 이르길 주왕(紂王)이 오만불손해서 천제와 귀신을 섬기지 않고 그의 선조들과 천지의 신령을 버려두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운명이 있으니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태서》라는 문장은 목야 전투 2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하늘의 명을 받은 주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기 전에 이미 “하늘도 그를 버려 보호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천자(天子)로서 하늘이 부여한 특권을 누리면서 오히려 경앙(敬仰)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이는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며 순종하지 않는 것과 이치가 통하는 것이다.

또 “어리석게도 왕실 친척들을 버리고 등용하지 못한 것”은 다른 제후 왕실의 조상들에게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주 심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위험하다. 왜냐하면 귀족들이 그에게서 멀어지면 원래의 종법(宗法)제도 역시 점차 해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심이 흩어지면 왕실(王室)은 곧 위험에 처하게 된다. 목야 전투에서 가장 선두에 섰던 병사들이 무기를 거꾸로 든 것은 가장 직접적으로 이것을 체현한다.

참고문헌:
1. 《학벽교구문사자료(鶴壁郊區文史資料)》
2. 《상대사 은의 유적과 귀감(商代史 殷遺與殷鑒)》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4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