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소(穹霄)
【정견망】
아주 오랫동안 법공부가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형식에 흘렀다. 《전법륜(轉法輪)》을 읽을 때 그 어떤 내함(內涵)도 볼 수 없었다. 여기에 법을 공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해지자 내함을 보기가 더욱 어려워졌고 스스로 어떤 제고도 느끼지 못해 일종 의기소침하고 어쩔 수 없어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심을 내리고 법을 외우자 법의 내함이 점차 내게 펼쳐졌고 통독할 때는 아주 평범하게 읽고 지나쳤던 법이었지만 법을 외우는 과정에서 다른 내함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우주 중에는 생명을 만들어내는 많고 많은 각종 물질이 있어서, 이런 물질의 상호운동하에 생명이 생겨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최초 생명은 우주 중에서 온 것이다. 우주공간은 본래 선량한 것이고, 真(쩐)ㆍ善(싼)ㆍ忍(런), 이런 특성이 있는 것으로서, 사람이 태어나서는 우주와 동성(同性)이었다. 그러나 생명체가 많이 생겨나자 일종의 군체(群體)적 사회관계가 발생했다. 그중에 일부 사람은 아마 사심(私心)이 증가함으로써 그들의 층차가 서서히 낮아져 이 한 층차 중에 있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들은 곧 아래로 떨어져야만 했다. 그러나 다른 한 층차 중에서 또 그다지 좋지 못하게 변해 그들은 또 있지 못하게 되었고, 계속 아래로 떨어져 최후에는 인류 이 한 층차 중까지 떨어져 내려왔다.”(《전법륜》)
이 단락 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진아(真我)는 우주특성에 동화했지만 구우주(舊宇宙)는 위사(爲私)한 것이라 우주특성에서 벗어나게 했다. 우리는 전에 구우주에 속한 생명이라 역시 표준에 부합하지 않게 변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법을 바로 잡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대법을 수련하고 대법에 동화되었다. 그렇다면, 내 몸에서 우주특성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구우주의 요소 및 인간세상에서 생긴 각종 집착과 형성된 각종 관념은 모두 진정한 자신이 아니다. 각종 사람마음을 제거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사상업(思想業)을 제거할 때처럼 그것들을 자신과 똑똑히 구별해 그것들을 철저히 제거해야 하며, 그것들이 죽기 전에 발악하면서 반영되어 나오는 각종 염두에 이끌지 않아야만 그것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여러분에게 예를 들어 주겠다. 불교 중에서는 인류사회의 모든 현상이 모두 환상이고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어찌하여 환상인가? 이 확실하고 확실하게 거기에 놓여 있는 물체, 그것을 누가 가짜라고 할 수 있는가? 물체가 존재하는 형식은 이런 것이지만, 그것의 표현 형식은 도리어 이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오히려 일종의 공능이 있어 우리 물질공간의 물체를 우리가 지금 본 이런 상태로 고정시킬 수 있다. 사실 그것은 이런 상태가 아니며 우리 이 공간 중에서도 그것은 이 상태가 아니다. 예를 들어, 현미경으로 사람을 본다면 어떤 모양이겠는가? 온 신체는 성글고, 소분자(小分子)로 구성된 것인데, 마치 모래와 같은 과립(顆粒) 모양이고, 운동하는 것으로서, 전자(電子)는 원자핵을 둘러싸고 운동하고 있고, 온 신체는 모두 꿈틀거리며(蠕動) 운동하고 있다. 신체 표면은 매끄럽지 않으며 불규칙하다. 우주 중의 어떤 물체, 강(鋼)ㆍ철(鐵)ㆍ돌 모두 마찬가지로서, 그것 속의 분자성분은 모두 운동하지만, 당신은 전반 형식을 다 보지 못하는데, 사실 그것은 모두 안정된 것이 아니다. 이 책상 역시 꿈틀거리고 있지만 눈은 오히려 진상을 보지 못하는데, 이 한 쌍의 눈은 사람에게 일종의 착각을 조성해 줄 수 있다.”(《전법륜》)
이 단락 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보는 물체의 표현형식만 환상(幻象)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간세상에서 만나는 일체 사람이며 일체 일이 모두 환상이다. 모순 속에서 많은 때에, 우리는 늘 그 사람이 어떻고 그 일이 어떠하다고 강조하면서 사람과 일이 조성한 착각에 이끌린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이런 것들은 모두 연화(演化)되어 나온 것으로 안으로 찾아 자신의 환상을 닦아내고 우리가 제고하기만 하면 그런 환상은 자연히 소실되고 모순 역시 존재하지 않게 된다. 박해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위험한 상황 역시 환상이며 오직 각종 사람마음이 만들어낸 착각에 이끌리지만 않으면 사악이 해체되고 박해는 소실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또 한 가지는 바로 내외겸수(內外兼修) 공법을 연마(煉)하는 것으로서, 그는 무술도 연마(練)하고 또한 내수(內修)도 하는데, 이런 공법은 도가 중에서 비교적 많이 볼 수 있다. 사람이 일단 이 공법을 배우면 흔히 이런 마(魔)와 마주칠 수 있다. 일반 공법에서는 마주치지 않고 오로지 내외겸수 공법이나 무술을 연마(練)하는 공법에만 있을 수 있는데, 바로 어떤 사람이 그를 찾아와 무예를 겨루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에는 수도(修道)하는 사람이 허다한데, 많은 사람이 무술을 연마하고, 내외겸수를 하기 때문이다.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 그 역시 공이 자랄 수 있다. 무엇 때문인가? 그가 기타 마음(心)ㆍ명(名)ㆍ이(利) 이런 마음을 제거해 버리면 그 역시 공이 자란다. 그러나 그는 쟁투하는 마음을 좀처럼 제거하지 못하며 비교적 늦게 제거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일을 하기 쉬운데, 일정한 층차 중에서 또 나타날 수 있다. 그는 가부좌 중에서 흐리멍덩한 가운데 누구누구가 연공(煉功)하고 있음을 알고는, 元神(왠선)이 신체를 떠나 다른 사람을 찾아가서 누구의 공부(功夫)가 높은지 겨뤄보자고 하여 이 싸움이 일어난다. 다른 공간에서도 이런 정황이 나타나는바, 어떤 사람이 그를 찾아와 싸우고 때리며, 싸우지 않으면 정말로 그를 죽이려 하여 곧 서로 싸우는데, 오고가며 싸운다. 잠만 자면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그와 무술을 겨루며 싸워 온밤을 다 쉴 수 없게 한다. 사실 이런 때 바로 그의 쟁투심을 버리는 것인데, 만약 그가 이 쟁투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그가 늘 이러하며 장기적으로 이렇게 나아가면 몇 년을 더 끈다 해도 이 층차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 사람 역시 공을 연마(煉)할 수 없게 되고 이 물질신체도 견뎌내지 못하며 정력 소모도 너무나 커서 잘못하면 끝장이다. 그러므로 내외겸수 공법 중에서 이런 정황과 마주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주 보편적이다. 우리 내수공법 중에서는 이런 정황이 없으며 그것이 나타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방금 말한 이 몇 가지 형식은 모두 비교적 보편적으로 존재한다.”(《전법륜》)
한동안 나는 이 단락이 ‘무술기공’ 절(節)에 있다고 여겼는데 나중에야 ‘연공초마’ 절에 있음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쟁투심을 없애지 않으면 아주 위험하며 쉽사리 마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또 그 어떤 집착심도 제거하지 않으면 모두 “잘못하면 끝장”(《전법륜》)을 초래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쟁투심을 없애지 않으면 사람을 불러와 그와 무술을 겨루게 만들며, 색욕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색마를 불러올 수 있으며, 명을 구하는 마음을 없애지 않으면 그로 하여금 명을 구하는 마음을 제거하게 하는 일을 만나게 할 수 있고, 이익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이익을 손실 보는 일을 만날 수 있고, 정(情)을 제거하지 않으면 정의 교란에 봉착하게 만드는 등등이다.
그런데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 중에 만나는 것은 절대로 아주 편안하고 즐거운 일이 아니며 모두 속인 중의 고난과 번거로움이다. 그 마음을 줄곧 제거하지 않으면, 그 마음의 요소를 제거할 일이 한 차례 또 한 차례 올 수 있다. 세간에서 대응하는 것은 바로 속인 사이의 마난이 커져서 결국에는 갈수록 커져서 수련자의 의지를 훼멸시켜 끝장나게 만든다.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나는 나의 공을 내가 데리고 있는 제자에게 사람마다 한 몫씩 나누어 주었는데, 모두 백여 종의 공능을 합성한 에너지덩이였다. 그들의 손을 모두 봉해 주었는데, 이렇게 해도 어떤 제자의 손은 여전히 물려서 터지고, 물려서 물집이 생기거나 물려서 피가 나는, 그런 일이 늘 나타났다.”(《전법륜》)
전에 이 단락 법을 읽을 때는 좀 의문이 들었다. 사부님의 공(功)으로 제자들의 손을 모두 봉해주셨는데 왜 작디작은 영체에게 물려서 터지고 물려서 물집이 생기거나 물려서 피가 나는 등 물리는 정도도 같지 않은가? 내가 깨달은 것은 사부님의 공이 제자를 보호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제자 자신의 문제다.
수련과정 중에서 사부님께서는 사실 매 제자마다 공을 나눠줘, 제자가 박해에 반대하고 사악을 제거하며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사명과 능력을 부여하셨다. 그런데 왜 어떤 수련생은 박해로 사망하고 어떤 이는 박해로 감옥에 들어가며, 어떤 이는 유리실소(流離失所)하며, 어떤 이는 정정당당하게 법을 실증하는 길을 걸어감에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다른 요인을 제외한다면, 내가 깨달은 것은 사부님께서 누구에겐 두텁게 대하고 누구는 가벼이 대하며 제자마다 서로 다른 공을 주신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 주시는 것은 모두 같은바 모두 《전법륜》 속에 눌러 넣으셨고 모두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 속에 있다. 그러니 자신의 신사신법(信師信法) 정도를 보아야 하고 또 자신이 사부님의 요구에 따르는 정도를 보아야 한다. 아울러 발정념 자체가 공능을 운용해 악을 제거하는 것이니 이를 어느 정도 중시하는 가도 공능의 효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主元神(주왠선)은 바로 자신의 사유(思維)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자신은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진정한 당신 자신이다.”(《전법륜》)
나는 한동안 발정념을 하면서 늘 입정(入靜)하지 못했고 온갖 잡념이 다 생겼다. 한번은 정념을 발하는 과정 중에 이 단락 법을 생각했다. 다시 말해 나는 발정념을 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자신이니 다른 난잡한 생각들은 모두 자신이 아니고 모두 제거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서서히 조용해질 수 있었다. 내가 깨달은 것은 법공부, 발정념, 연공과정 중에서 오직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비로소 자신의 주원신이 할 수 있고, 오직 이렇게 해야만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매번 사상이 다른 곳에 흘러가거나 다른 잡념의 교란을 받는다면 이는 곧 자신의 주원신이 신체를 다른 것에게 맡긴 것이니 다시 말해 그 어떤 작용도 일으킬 수 없다.
이상은 자신이 법을 외우면서 얻은 작은 체오다. 층차에 한계가 있으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여러분들의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zhengjian.org/node/2783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