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紫穹)
【정견망】
【원문】
전갱(籛鏗)이 바로 팽조이고 팔백 살을 살았다.
허손은 원래 정양 읍재로 한집안이다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
바라는 피안을 말하고 자부는 신선들이 사는 선궁을 말한다.
상방(上方)이니 범찰은 모두 불교 도량이고
진우나 예주는 모두 선경을 가리킨다.
籛鏗即是彭祖,八百高年;
許遜原宰旌陽,一家超舉。
波羅猶云彼岸,紫府即是仙宮。
曰上方、曰梵刹,總是佛場;
曰真宇、曰蕊珠,皆稱仙境。
【주석】
(1) 전갱(籛鏗): 팽조(彭祖)를 말한다. 원래 성은 전(錢)씨고 이름이 견(鏗)이다. 오제(五帝) 시기 전욱(顓頊)의 현손(玄孫)으로 하대(夏代)에 태어나 상대(商代)에 팽성(彭城)에 봉해졌는데 전설에 따르면 팔백 세(일설에는 767세라고 함)를 살았다고 한다.
(2) 허손(許遜): 동진(東晉) 사람으로 자(字)는 경지(敬之)이고 여남(汝南 지금의 하남)사람이다. 일찍이 오맹(吳猛)과 함께 도를 배운 적이 있고 나중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정양현령을 지냈다. 나중에 관직을 버리고 돌아와 강호를 두루 다녔다. 전설에 따르면 136세까지 살았으며 374년 8월 초하루 일가족 42명과 함께 일제히 하늘로 날아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3) 바라(波羅): “바라가(波羅伽)” 또는 “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도 하는데 원래 산스크리트 어를 번역한 말이다. 의미는 피안(彼岸)에 도달한다는 것으로 다시 말해 성불(成佛)한 후의 경지를 말한다.
(4) 자부((紫府): 도가에서 신선들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
(5) 상방(上方): 신불(神佛)이 거주하는 천계(天界)를 가리킨다. 범찰(梵刹)에서 범(梵)은 청정하다는 뜻이고 찰(刹)은 장대를 말하는데 다시 말해 경번(經幡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각종 깃발)을 걸어놓는 기둥을 말한다. 승려들이 거처하는 곳에 깃발을 매달아 여러 사람에 알리던 데서 유래한 단어로 나중에 불교 사찰이란 뜻으로 쓰였다.
(6) 진우(真宇): 진인(真人)이 거처하는 곳.
(7) 예주(蕊珠): 도가 이론에 따르면 하늘에 신선들이 사는 곳을 예주궁(蕊珠宮)이라고 한다.
【평가】
공자는 《논어 술이》에서 “(나는) 전술하되 창작하지 않고 믿음을 갖고 옛것을 좋아하니 우리 노팽에 비기고자 한다.(述而不作,信而好古,竊比於我老彭)”라고 했다.
즉 나는 고대의 사상과 문화를 전하고 서술하기만 할 뿐 자신의 주장을 새롭게 내세우거나 고치지 않고 고대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깊이 믿어 의심하지 않으며 도를 좋아한다. 이에 나는 자신을 팽조와 비교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볼 수 있다시피 공자 역시 팽조를 도(道)를 얻은 고인으로 확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몹시 흠모하며 따르고자 했다.
또 “한 사람이 도를 얻으면 닭과 개까지 하늘로 올라간다(一人得道,雞犬升天)”는 성어가 있는데 동진시기 도가 수련인이었던 허손(許遜)이 하늘로 날아오른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그럼 여기서 팽조에 대한 전설과 허손에 대해 알아보자.
고사 1: 팽조의 전설
팽조(彭祖)는 중국문화에서 장수(長壽)의 상징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고대황제 전욱(顓頊)의 현손(玄孫 4대 손자)이다. 은나라 말기에 이미 760세였는데 겉보기에는 젊은 사람과 같았다.
팽조는 젊을 때부터 평정하고 소박한 생활을 즐겼고 명리를 도모하지 않았다. 은나라 왕이 그 명성을 듣고 대부로 봉했으나 그는 뜻이 없다는 듯이 늘 병을 핑계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는 수신(修身)과 도인(導引)술에 능해 청춘이 오래 머물렀고 성격이 침착하여 종래로 떠벌린 적이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무슨 도술(道術)이 있다고 말하는 말을 듣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신기한 능력을 보여준 적도 없다. 왜냐하면 신선의 능력은 원래 속인에게 나타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길을 떠날 때는 아무도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고 누가 그를 따라 가면 그의 종적을 금방 놓치곤 하였다. 비록 집에 수레가 있었지만 탄 적이 거의 없었다. 어떤 때는 몇 십일 혹은 몇 백일을 먹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일체가 모두 정상으로 돌아와 있어 집안 사람들도 무슨 구별을 할 수 없었다.
은나라 왕(王)이 직접 찾아와 도술을 구했지만 팽조는 한 글자도 알려주지 않았다. 돈과 재물을 좋아하지 않았고 은왕이 셀 수 없는 진귀한 보물을 보낸 적이 있으나 그는 받자마자 빈궁한 백성들에게 보내주었다.
은왕 주변에 채녀(采女)라고 불리는 여자가 있었는데 270세나 되지만 15,6세 소녀처럼 젊어보였다. 은왕은 채녀를 보내 도술을 구하였다. 채녀가 팽조에게 정수를 배워 은왕에게 전수해주었고 은왕이 시험해 보니 확실히 효험이 있었다. 그래서 은왕은 사심이 생겨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는 누구든 팽조의 도술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심지어 팽조를 해쳐 뿌리를 제거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팽조는 그의 마음을 일찍이 알고 종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70여 년이 지난 후 유사(流沙)의 서쪽에서 그를 본 사람이 있었다. 팽조가 은나라를 떠날 때 이미 770세 였다.
(출처: 신선전(神仙傳))
고사 2: 허천사(許天師)가 온역을 잠재우다
허손(許遜)은 자가 경지(敬之)로 남창(南昌) 사람이다. 삼국시기 동오(東吳)의 적오(赤烏) 2년(239년)에 태어났고 중국 역사상 유명한 도가 수련인이다. 소위 사대천사(四大天師) 중 한명이다.
허손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배움을 좋아했는데 한번은 사냥을 나갔다가 화살을 쏘아서 사슴을 잡았는데 뱃속에 있던 새끼가 땅에 떨어지자 엄마 사슴이 자신의 상처는 돌보지 않고 혀로 새끼를 핥아주다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허손은 이 장면을 보고는 몹시 슬퍼하며 또 후회했다.
이에 그 자리에서 활과 화살을 부러뜨리고 집에 돌아왔다. 이후 널리 책을 읽으며 천문, 지리, 음양오행 등을 공부했는데 특히 도가수련 서적을 좋아했다. 나중에 당시 유명한 도사였던 오맹(吳猛)을 스승으로 삼고 그 진전(真傳)을 이어받아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품행이 단정하고 도덕이 고상해서 멀리까지 이름을 날렸다. 그러자 조정에서 이를 알고 여러 차례 관직에 초빙했다. 나중에 어쩔 수 없이 진(晉) 무제(武帝) 태강원년(280년) 정양(旌陽)현령에 부임하니 이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허손은 정양현에서 도덕과 인효(仁孝)를 제창하고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여러 조치들을 시행해 많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해 정양에 온역(瘟疫)이 발생했다. 당시 상황이 상당히 심각해서 사망률이 70~80%에 달했다. 허손은 이에 오맹에게 배운 신방(神方)을 가져다 사람을 구했는데 부주(符咒 부적과 주문)으로 병을 치료했다.
부주가 닿는 곳마다 환자는 단번에 치유되었고 심지어 환자가 평소 앓던 오래된 고질병도 같이 치료되었다. 이 소식이 다른 군(郡)에까지 전해지자 역병에 걸린 백성들이 잇따라 정양을 찾으니 하루 사이에 도처에서 병을 치료하러 온 사람이 천명이 넘었다. 이는 정양 현성(縣城)의 수용능력을 초과한 것이다.
허손은 이에 성 밖 10리가량 떨어진 강변에 대나무로 표시를 하고 부수(符水 부적을 태운 물)를 강물 속에 던진 후 환자들이 대나무가 표시된 곳에서 강물을 마시게 하니 병이 모두 좋아졌다. 그는 또 연로하고 몸이 약하거나 중병환자들이 올 수 없는 것을 고려해 사람더러 강물을 떠다가 그들에게 먹이게 했다. 그러자 강물을 먹은 사람들은 모두 좋아졌다.
촉(蜀) 지역 백성들이 이에 노래를 지어 그의 공덕을 찬양했다.
“사람들은 훔치지 않고
관리들은 간사하거나 속이지 않네
우리 군자께서 사람을 살리시니
병이 어찌할 수 있으랴
人無盜竊,吏無奸欺
我君活人,病無能為”
나중에 강 맞은 편 강좌(江左 역주: 장강 하류 남쪽 지방을 지칭)지역 백성들 역시 물을 길으러 정양에 왔다. 이에 허손이 그릇에 물을 담고 부주(符咒)를 물에 넣게 한 후 사람을 시켜 맞은 편 강가에 이 그릇을 두게 했다. 또 마찬가지로 대나무로 위치를 표시해 사람들이 부수를 마시기 편하게 했다. 강좌에서 역병에 걸린 백성들 역시 이에 전부 치료되었다.
당시 강가에 대나무를 심어 표시한 곳은 지금 촉강(蜀江)이라 불리는데 또는 금수(錦水)라고도 한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허손이 역병을 잠재울 때 사용한 것은 일반적인 한약 처방이 아니라 부주신방(符咒神方)이었다. 이는 수련과 관련된 초상적인 법력(法力)인 셈이다.
나는 여기서 허손이 온역을 잠재운 원인을 간단히 분석해보고자 한다.
첫째, 그는 수련인으로 그 한 법문의 법력으로 가지(加持)했기 때문이다.
둘째, 백성들이 모두 그의 수련과 그가 수련한 법문에 대해 믿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만약 백성들이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들 역시 절대 그의 부주(符咒)나 부수(符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원주: 이상 두 이야기는 모두 정견망에서 인용)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3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