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동수들이 직접 겪은 교훈들이 주는 경고

금강(金剛)

【정견망】

이 글은 내가 직접 듣거나 본 일부 동수들의 비교적 전형적인 심성(心性)문제 및 그 교훈을 귀납해서 정리한 것이다. 부디 동수들이 이를 통해 교훈과 경고를 얻기 바란다.

1. 색심(色心)을 제거하지 않은 교훈

이 항목을 첫자리에 둔 이유는 이런 종류의 교훈이 실로 아주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다만 한두 가지 사례를 들어 이런 현상을 말해보고 이를 통해 한번 생각해보는데 중점을 두고자 한다.

한 남자 동수는 일찍이 한 기혼 여자 동수를 쫓아다녔다. 몇 년 후 심각한 병업(病業)이 나타나 병원에 입원했다가 약 1년 만에 인사불성이 되었고 극단적인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났다.

한 남자 동수는 부인(동수)이 아주 예쁘고 현명했지만 여전히 다른 한 여자 동수를 주목하며 호감을 표시했다. 이는 그의 부인을 몹시 고통스럽게 했는데 나중에 그에게 심각한 병업이 나타났는데 지금에 이른다.

한 남자 동수의 속인 부인은 그와 아들의 수련을 지지했고 성격도 온순하고 상냥했다. 남자 동수는 부인과 이혼하고 얼마 후 재혼했는데 새로 결혼한 부인은 더 젊고 예뻤다.

사실 이런 종류의 일은 제삼자가 확실히 뭐라 비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는 사람의 자유이고 또 법률을 위반한 것도 아니라서 남이 뭐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혼을 대부분 두 사람의 성격 차이로 여기는데 필경 결혼생활에는 현실문제가 관련되기에 늘 낭만적이고 즐거울 수만은 없다. 서로 불화하고 갈라선 후 각자가 ”편안“하고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 재혼한다. 사실 이런 관념은 이미 신전문화(神傳文化)의 가치관을 크게 위배한 것으로 혼인을 굳게 지켜내려는 의미와 가치를 볼 수 없다.

여기서 필자가 언급한 이런 것들은 특정한 사람과 일을 겨냥한 게 아니다. 당사자 동수들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며 그들이 어떤 상태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어떤 마난(魔難)에 봉착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 하는 그것은 모두 개인행동이며 다른 사람이 뭐라 흠잡을 수 없다.

필자는 단지 이런 종류의 현상들이 지금 아주 보편적이라 수련인이라면 마땅히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한번 말해보고자 한다. 출발점은 진심으로 여러분들이 모두 진정으로 자신의 생명에 유리한 선택을 찾아낼 수 있게 하고 일부 현대관념이 초래한 해로운 사유를 타파하려는 것이다.

동방과 서방을 막론하고 전통문화에서는 모두 혼인을 굳게 지키는 것을 아주 중시했다. 중국 고대에는 혼인을 ”하늘이 맺어준 것“이라 여겼는데, 흔히 혼인은 월하노인(月下老人)이 조종한다고 하는데 바로 신령(神靈)의 배치로 보았다.

서방에서도 교회에서 예식을 거행할 때면 신랑신부가 성직자 앞에서 엄숙하게 혼인서약을 한다. 신랑은 “나는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려 하니 승낙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순조롭거나 힘들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아플지라도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고 아끼겠습니다. 당신에게 영원히 충실할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서약한다. 이 혼인 서약은 절대 아이들 장난이 아니다.

한 남자 동수가 다른 여자 동수와 자주 교류하자 아내(동수)가 이에 불만을 품었다. 남편은 교류하는 것은 모두 수련방면의 일이라고 항변했지만 아내는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그와 이혼했다. 그는 곧바로 다른 여자 동수와 결혼했다.

내 생각에 이 일 자체만 놓고 본다면 남이 비난할 수 없고 남의 사생활이다. 하지만 내가 이 문제를 교류하려는 출발점은 속으로 상당히 걱정되기 때문이다. 재혼한 남자 동수와 그와 늘 교류했던 여자 동수는 서로 상대방에게 호감을 가졌던 것은 아닌가? 이는 물론 자신만이 알 수 있겠지만 신(神)은 아주 똑똑히 볼 수 있다. 또 남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설사 세상을 다 속일 수 있다 해도 자신의 양심이 편안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이혼한 전처에게 미안한 요소는 없었는가?

어쩌면 남자 동수는 다른 여자 동수의 성격이 전처보다 자신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을 수 있고 이 때문에 이혼했을 수 있다. 이런 관념은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무슨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두들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관건은 신(神)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만약 신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는 자신에게 어떤 추가적인 마난을 가져다줄 것인가?

내 생각에 이런 현상은 심사숙고해 볼 가치가 있다. 필경 인류는 하루 천리씩 미끄러져 내려가는 도덕 속에서 오늘날까지 걸어왔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람들의 도덕에 부합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필자가 보기에 현대 사회의 대부분 사람들은 혼인을 아이들 장난으로 여긴다. 마치 느낌이 좋으면 곧 결혼하고 좋지 않으면 곧 이혼하고 다른 상대를 찾는다. 잠재적인 관념에서 혼인이란 자신의 느낌만 좋으면 그만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혼을 해도 그만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 혼인이란 신(神)이 배치한 운명 중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아울러 이는 모두 사람의 인연과 업력에 따라 배치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배우자를 만나든 오직 상대방에게 원칙적인 문제(가령 도덕적으로 큰 문제가 있는 것)가 없다면 마땅히 혼인을 지켜야 하고 배우자를 선하게 대해야 한다. 설령 상대방이 자신에게 잘하지 못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덕으로 원망을 선해(善解)해야 한다.

동수들의 교류 중에는 또 아주 많은 정면(正面)적인 사례들이 있다.

어떤 이는 분명히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 배우자에 대해 늘 상대방을 선하게 대하고 감화시켜서 바로잡았는데 이것이 바로 대법을 가장 잘 실증한 것이다.

지금 사회에서 일부 사람들은 늘 이혼을 하나의 선택사항으로 여기는데, 사실 전통문화에 따라서 본다면, 혼인이란 선택사항이 전혀 아니다. 이런 선택사항 배후에는 현대의 변이된 이념이 있다.

우리 여기서 사부님의 두 단락 법을 한번 복습해보자.

“이혼은, 나는 당신들에게 최대한도로 속인 사회에 부합하라고 했는바, 당신들이 오늘 이혼을 하든지 결혼을 하든지, 나는 모두 뭐라고 하지 않겠는데, 나는 법리로부터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알려주겠다. 미래에는 이런 일이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는 현대사회의 현 상황이 조성한 것이다. 나도 당신들을 어떻게 하라고 강박할 수 없다. 그러나 미래의 생명은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아태지역 수련생회의설법》)

“당신이 무엇을 하든 모두 한 수련인의 표준으로 가늠하도록 하라. 법률은 이혼을 허락한다. 만약 당신이 뜻(志)도 다르고 추구하는 것도 다르며, 또 당신에게 수련도 못 하게 한다면, 그것은 별개의 일이다. 만약 이런 것이 아니고, 당신 자신이 변덕스럽거나 당신 자신이 무슨 다른 마음이 있다면, 그건 마땅치 않은 것이며, 그건 바로 수련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세계파룬따파의 날 설법》)

한 남자 동수가 일찍이 자신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상대의 외모와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 예쁜 여성에게는 자연스레 태도가 더 좋아진다는 것이다. 그의 말투는 마치 이는 지극히 당연해서 인지상정(人之常情)처럼 여기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사실 그는 확실히 한 가지 보편적인 심태를 말했다. 하지만 이는 더러운 색심(色心)이 아니란 말인가? 수련인이 어찌 이를 당연히 여길 수 있는가?

법리(法理)에 따라 대조해보니, 내가 이해하기에 현재 사회는 십악독세(十惡毒世)라 사람의 도덕표준이 지옥보다도 아래에 있다. 신(神)마저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데 이런 사람은 이미 마땅히 도태되었어야 한다. 다만 중생구도를 위해 남겨두었을 뿐이다.

사실 구세력은 의도적으로 마귀(魔鬼)문화의 관념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사람에게 존재하지 말아야하는 것으로 마치 짐승과 유사하다. 충실과 예의를 말하지 않고 인륜이라곤 없다. 사회도덕이 하루 천리씩 미끄러져 내려가는 이런 사회환경 속에서 우리는 수련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또 갈수록 더 많은 도전과 유혹에 직면하게 되는데 만약 사상에서 마귀문화를 똑바로 구별할 수 없고 바른 도리를 식별할 수 없다면 또 몹시 번거로워질 것이다.

사실 신전문화 속에서 올바른 도리는 사람을 속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진정으로 한 사람이 덕(德)을 잃지 않게 하고 자신에게 재난을 초래하는 업(業)을 짓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사람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것으로 사람이 계속해서 훼멸로 미끄러져 내려가지 않게 하고 되돌아갈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대법홍전25주년 뉴욕법회설법》에서 사부님께서는 제자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제자: 신경문 ‘다시 만들다(再造)’에서 “전통으로 돌아가면 길이 하늘로 통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부: 그렇다. 여러분 알다시피 전반 인류의 문화는 신(神)이 배치한 것으로, 이 길은 신과 긴밀히 연결되고 통해 있는 것이다. 천당으로 되돌아가려면, 당신이 이 길에서 걷지 않으면 어떻게 걸어가겠는가? 현대파 의식, 그 괴상한 모습, 그런 모양의 두발(頭髮), 큰 귀걸이를 뚫어 넣고, 코에도 링을 걸고 마약을 흡입하면서 그가 신(神)의 그곳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여러분 알다시피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오로지 그 전통의 길이야말로 비로소 신과 가장 가까운 것인데, 왜냐하면 그 길은 신이 배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2.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은 교훈

이런 종류의 심성문제로 초래된 병업이 사실 더 흔한데 필자가 관찰한 것만 해도 아주 많다. 물론 병업의 원인은 다방면이며 이것은 단지 필자가 한 가지 각도에서 개인의 작은 인식을 말할 뿐이다.

한 협조인 동수는 능력이 대단히 뛰어나서 아주 많은 대법 일을 했는데 사람 속에서는 성공한 인물에 속했다. 일을 할 때도 적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거뒀는데 다년간 이렇게 했다. 하지만 수시로 훈화하는 태도로 남들에게 말을 했다. 나중에 심각한 병업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야 마땅히 자신에게 상처 받은 동수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점화를 받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한 아주머니 동수는 아주 정진하는데 밤낮 가리지 않고 대법 일을 했다. 학벌도 좋고 능력이 강했지만 말투 속에 늘 남을 무시하는 게 있었다. 늘 누구는 사람마음이 무겁고 누구는 아직 걸어 나오지 못했으며 누구는 인식이 높지 않다는 등등을 말했다. 나중에 심각한 병업으로 침대에 다년간 누워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내 기억에 전에 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정말이지 칼처럼 예리했는데 말재간도 좋았고 법리(法理)를 말하는 것도 청산유수라 일반인은 그녀를 말로 이길 수 없었다. 그녀는 노제자라서 또 많은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당시 동수들 사이에서도 큰 위망(威望)이 있었다.

또 어떤 아주머니 동수 역시 아주 정진했는데 늘 속인 남편에게 화를 내곤 했다. 남편이 일을 잘하지 못하며 무능하다고 탓하곤 했는데 남편의 성격이 아주 좋아서 개의치 않았다. 나중에 그녀는 심각한 병업이 나타난 후에야 이를 생각해냈고 남편에게 사과했다. 남편은 여전히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중에 아주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또 다른 한 아주머니 동수는 여러 방면에서 아주 정진했지만 한번은 남편에게 화를 낸 후 뇌출혈이 생겼다. 그 후 줄곧 행동이 불편하다. 그녀는 자신이 장기간 남편에게 화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거대한 난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정말 가슴이 아픈데 이런 것들은 자신이 우주 중의 “선악에는 보응이 따른다(善惡有報)”는 법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초래한 심각한 교훈이 아닌가? 동수들은 늘 “선악에는 보응이 따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진상을 알릴 때도 늘 언급하지만, 내가 이해하기에 “선악에 보응이 따르는” 것은 절대로 우리가 보기에 큰일이라고 여기는 것들, 가령 대법제자를 박해할 수 없다거나 재물을 탐해서 목숨을 해치는 것 등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모든 생활 속 여러 방면에 두루 퍼져 있는데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대할 때의 언행 및 일사일념(一思一念)을 포함한다.

자신의 매 일념(一念)의 심층(深層) 출발점이 선(善)에서 나왔는가 아니면 불선(不善)에서 나왔는가? 내심에서 우러나와 남을 선량하게 대했는가? 상대방의 감당능력과 감수를 고려했는가? 어떻게 해야만 정말로 상대를 위하는 것인지 고려했는가? 대법제자의 매 일념은 모두 수많은 신(神)들이 눈동자조차 돌리지 않고 주시하고 있는데 이를 중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神)이 얼마나 지혜로운가? 신은 우리 매 염두의 심층 미세한 곳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지 모두 속속들이 볼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신이 문제를 봄에 그는 총체적으로 보고, 입체적으로 보나, 사람은 단지 표면상에서 본다. 어떤 때 대법제자가 내 곁에 있으면, 당신의 일사일념, 당신의 표현에 대해, 나는 아예 당신의 표면, 당신의 행위를 보지 않고, 나는 당신의 진정한 그 동기를 보며, 나는 당신의 진정한 사상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본다. 이 과정 중에서, 표면상 표현되어 나오는 것, 비록 그것이 당신의 행위이고 당신이 책임져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의 근본을 본다.”(《대법홍전25주년 뉴욕법회설법》)

개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 문제는 실질이 아니라 표상이며 심성문제야말로 실질이다. 설사 태도에 문제가 없더라도 마음속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바르지 않고 선하지 않으며 남을 무시한다면 다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때로 눈빛이나 표정에서 의도치 않게 드러나기도 한다. 전통문화에서는 오만한 마음을 아주 중시하는데 절대로 오만한 마음이 있어선 안 된다. 당신은 비록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남을 무시하는 당신의 그런 눈빛이나 아주 사소한 경멸하는 표정이나 염두를 신(神)이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은 아는가?

이렇게 오랫동안 일찍이 자신이 잘 나갈 때 남을 무시하고 깔보는 표현이 있다가 결국에는 심각한 병업으로 고생하거나 심지어 세상을 떠난 동수들이 얼마나 많은가?

필자는 이 문제의 근원은 여전히 전통문화의 결핍으로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가늠하는 표준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일부 능력 있는 동수들은 능력이 약한 이들을 무시하고, 일부 똑똑한 동수들은 말이 어눌하거나 충직한 그런 이들을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真(쩐)ㆍ善(싼)ㆍ忍(런), 이런 특성은 우주 중에서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표준이다.”(《전법륜》)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능력의 크기나 말재주, 똑똑한 정도나 성공 여부로 사람을 가늠하는 것은 사실 다 틀린 것이다. 이는 법리에 근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통적이고 바른 이념(전통이념은 도덕과 인품에 근거해 사람을 가늠한다)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바로 현대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한 남자동수는 아주 순박하고 착실하지만 일부 동수들은 그를 좀 홀시하고 말투에서도 좀 무시했다. 그가 무능하고 머리가 나쁘며 야무지지 못하다는 등등이었다. 사실 내가 보기에 좋고 나쁜 관념은 전부 반대로 된 것으로 수련의 각도에서 본다면 이 동수의 심성은 상당히 좋다. 다만 현대관념으로 본다면 그는 확실히 사람들의 존중을 받는 유형에 속하지 않을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너무 착실해서 이득을 보지 못하고 늘 손해만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수련인이 가늠하는 표준은 어디에 있는가? 고대에 칠선녀(七仙女)가 마음에 들어 했던 동영(董永)은 소박하고 정직한 유형이 아니었던가? 그때 선녀가 선택한 사람을 현대인의 표준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역주: 동영과 칠선녀 이야기는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효자 동영이 부친이 돌아가시자 초상 치를 돈이 없어 어느 부잣집에서 만냥을 빌린다. 초상을 무사히 치르고 나서 돈을 갚기 위해 부잣집에 자신을 노비로 팔려고 가는데 칠선녀가 변신한 여인을 만나 아내로 삼는다. 하늘나라 선녀가 효성이 지극하고 순박한 동영을 돕기 위해 내려와 마침내 빚을 모두 갚아준다.]

모(某) 항목의 협조인은 능력이 아주 뛰어난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동수들에게 늘 훈화하는 말투로 대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남을 훈계했는데 눈빛에서도 무시하는 빛이 역력했다. 나는 속으로 그녀를 위해 걱정스러운데, 사실 이런 마음은 얼마나 불선(不善)한 것인가? 그럼에도 스스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당신에 이렇게 견책 당한 상대방은 얼마나 힘들고 괴로우며 체면이 말이 아니고 고통스러운지 생각해보았는가?

내 생각에 아직도 이 방면의 문제에 대해 아마 많은 동수들이 말할 가치도 없는 작은 일이라 여길 것이다. 당사자 동수는 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성격이 좋지 않고 또 급하기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사실 본질적으로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이 문제의 근원은 불선(不善)한 마음에서 온 것이다.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했다. 아주 작은 표현과 아주 큰 표현은 사실 같은 하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오만한 마음을 천국세계로 가져간다면 대각자(大覺者)마저도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 아닌가!

전통문화 이야기를 보면 마음이 선량한 사람은 심지어 동냥하는 거지를 대할 때조차도 늘 존중하고 공경하는 태도로 보시했다. 기독교에서는 오만을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기는데 사실 이것은 아주 도리가 있다.

어떤 동수는 자신이 장기간 나쁜 성격과 화를 잘 내는 문제를 고치지 못했다고 제출했고 또 어떤 동수는 자신이 다년간 드센 성격을 고치지 못했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고치지 못하는 관건은 오직 표상만 보고 본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표상으로는 성격이 나쁘고 드센 것이지만 본질은 불선(不善)이다.

이 한 점에 대해 내가 직접 겪은 체험이 있다. 전에 나는 장기간 유사한 문제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는데 선량과 선량하지 않은 각도에서 안으로 찾아본 후부터 기본적으로 2년 만에 대부분의 문제를 바로잡았다.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의 감수에 주의하며 언제 어디서나 다른 사람의 감수를 고려한다. 간단한 일임에도 나는 다년간 해내지 못했고 또 당문화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기본적인 인성을 상실했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기억하다시피, 나는 늘 당신들에게 한마디 하는데, 대법제자는 어떤 일을 함에 모두 우선 다른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매번 한 사건이 발생하거나 일종의 정황이 나타날 때, 설사 작은 일일지라도 나의 첫 일념(一念)은 우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 다른 사람을 우선해 생각하는 것은 이미 자연스러운 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2002년 보스턴법회설법》)

자신이 적극적으로 일을 한다고 여기는 동수가 있었는데 발언 중에 여러 차례 자신이 보기에 적극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 동수를 겨냥해 각종 무시하는 말들을 했다. 그녀가 한 말은 모두 그들은 어떻게 노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어떻게 위험한가 하는 것으로 모두 자신을 치켜세우고 남을 폄하하는 말이었다.

사실 내가 이해하기에 더욱 높은 각자(覺者)일수록 아래 생명을 대하는 것이 더 자비로운 것으로 더 높을수록 더욱 자비롭다. 사람 중에서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무시하며 풍자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많은 동수들이 묵묵히 일을 하고 있지만 겉으로 보이지 않는데 왜 기어코 남이 무엇을 하는지 보려고 하는가.

또 설사 일부 동수들이 정진하지 못하지만 이 역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큰 단체에서 줄곧 아주 정진하는 이가 있고, 비교적 정진하는 이도 있으며, 정진하지 못하는 이도 있고, 수련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등 서로 다른 상태에 처한 동수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는 모두 장기간 이성적으로 마주해야 할 한 가지 현실이다. 수련이란 억지로 강요할 수 없으며 정진하는 정도 역시 억지로 구할 수 없는 것이다. 각종 방면에서 모두 정진하는 정도가 서로 다른 문제가 있는데 이를 단칼에 해결하고 통일할 방법은 없다.

가령 한 동수는 심성방면에서 잘 지켰고 남을 대할 때도 늘 선량하고 진실했다. 하지만 좀 산만한 습성이 있어서 늘 일부 활동에 빠지곤 했다. 다른 한 동수가 여러 차례 그녀가 산만하다고 지적했다. 사실 지적한 동수는 비록 활동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하지만 늘 남에게 심하게 화를 내거나 심지어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화를 냈다. 내가 보기에 산만한 동수보다 이 동수의 문제가 훨씬 더 심각했다. 그러므로 어떤 동수가 이 방면에서 정진하지 못하거나 또는 저 방면에서 정진하지 못하거나 또는 각 방면에서 정진하지만 심성에 문제가 있는 동수도 있으며 상황이 아주 복잡하다.

내가 이해하기에 물질과 정신은 일성(一性)이기 때문에 그 어떤 방면이든 늘 물질의 장애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석자 두께의 얼음이 하루아침에 언 게 아니기 때문에 단번에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동수들의 서로 다른 상태를 이해하고 존중해야만 한다.

물론 만약 선심(善心)과 진심(真心)에서 우러나와 정진하지 못하는 동수가 더욱 정진하기를 희망한다면, 그럼 마땅히 이지적이고 지혜로우며 자비롭게 해야지 사람마음과 감정으로 해서는 안 된다.

내가 관찰해보니, 일부 동수들은 다른 사람이 정진하지 않는 것을 겨냥해 늘 쉽고 거친 방식을 사용한다. 하는 말에도 늘 가시가 돋쳐 있고 사람을 위협하며 모자를 씌우거나 강경하게 비판한다. 직접 이렇게 하거나 또는 은연중에 이렇게 한다. 설사 은연중에 이렇게 하더라도 사실상 의미는 같은데 사람은 모두 아주 총명해서 당신이 말하는 배후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것들은 모두 당문화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일부 동수들이 반대로 나아가게 했고 본래 정진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장기간 비판과 지적을 받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수련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초래된 손실을 누가 감당해야 하는가? 사부님께서는 “강제로는 사람마음을 개변할 수 없다”(《정진요지 2》)고 하셨다. 어찌 악(惡)한 방식으로 좋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겠는가?

내 기억에 사부님께서는 정진하지 않는 동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법리를 말씀하실 때, 상대방 마음의 매듭이 어디에 있는지 보고 마음의 매듭을 풀 수 있게 도와주라고 하셨다. 물론 나 역시 동수들이 아주 바빠서 대부분 이럴 시간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최소한 선의(善意)적으로 남을 대함이 가장 기본적이다. 쉽고 거친 방식은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데, 설사 자기 자식마저도 이렇게 단속할 수 없는데, 어떻게 독립적인 사상을 가진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겠는가?

일부 동수들이 다년간 소제자(小弟子)와 함께 수련한 다양한 방식과 이후의 결과를 통해 한두 가지 귀감으로 삼을 만한 것이 있다.

우선 좋은 사례를 들어보자. 어떤 동수는 소제자에 대해 아주 잘 참고 선의(善意)적으로 포용하며 이해했다. 철이 없고 정진하지 못하며 각종 좋지 않은 상태에 있는 소제자를 야단치거나 화를 내거나 강요하지 않았고 엄격하게 자신의 심성을 지키며 선의적으로 도리를 말해주며 이끌었다. 그러자 이 소제자가 성장한 후 진정으로 착실하게 수련하며 정진하는 제자가 되었다.

반대로 어떤 동수는 소제자에게 늘 화를 냈다. 표면적으로는 엄격하고 엄숙했지만 배후에서는 선의와 포용 및 이해가 부족했다. 소제자를 대하는 문제에서 원리원칙만 따졌고 늘 법리로 상대를 억눌렀다. 자신은 비록 표면적으로는 정진했지만 심성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때문에 소제자가 성장한 후 기본적으로 수련하지 않거나 또는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각종 상태가 나타났다.

필자가 보기에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소제자를 대하는 것도 그렇고 다른 동수를 대하는 것도 그런데, 만약 진심으로 상대방을 돕고자 한다면 그럼 선택한 방식과 결과가 서로 관련이 있고 대응되어야 한다. 당문화의 쉽고 거친 방식은 사람을 밀어낼 수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도 상대방의 양보를 얻어낼 수는 있다. 반면, 법리(法理)에 따라 하는 방식은 자비롭고 선의적으로 해야만 흡인력이 있고 남에게 따스함을 느끼게 해서 상대가 자발적으로 다가오게 할 수 있다.

일련의 문장들을 읽은 후 나는 당문화란 바로 인성(人性)이 없는 것으로 사람과 인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했다. 당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남의 부족을 보면 악(惡)을 사용하고 몽둥이로 때리면서 상대방이 즉시 고치길 바란다. 단칼에 자르려 하는데 정말로 단번에 좋지 않은 부분을 잘라내려 한다. 상대방이 제고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어느 방면에서 어떤 구체적인 곤란과 고통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상대방을 전면적으로 보면서 상대방의 장점을 보지 못한다.

사실 수련이란 자발적인 것으로 각 방면에서 정진하는 정도는 매 사람마다 자신에 대해 책임지는 정도의 체현이다. 또한 매 생명마다 여러 방면의 업력 및 한계와도 관련이 있다. 이는 한 가지 엄숙한 일이며 모두 개인의 선택이다. 일부 동수들은 자신이 보기에 정진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동수에 대한 태도가 마치 상대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대하거나 상대방이 마치 자신에게 무슨 빚을 지은 것처럼 대하는데 마치 상대방을 비판하고 투쟁하려는 것 같다.

어떤 동수는 한두 마디 말로 사람을 고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사실 이는 완전히 당문화의 사유다. 이런 방법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매 사람의 수련은 남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는 것으로 또 남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다. 마치 기독교 신자들이 교회에 몇 번이나 나가는지 또는 얼마나 헌금했는가 하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런 것들은 모두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남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고 동시에 남들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헌금을 했든 상대방이 얼마나 적게 헌금을 했든 모두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하며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 무슨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내 생각에 모두들 마음속에서부터 남을 감시하는 당문화 사유습관을 개변해 남을 존중해야 한다. 만약 진심으로 선의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 제고하게 하려면 그럼 마땅히 선의적으로 교류하고 각종 올바른 도리를 나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아울러 도리를 똑똑히 말하고 투철하게 말해서 쉬운 것에서부터 어려운 데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태도 역시 인내심과 선의를 가지고 진정으로 다양한 방법이 상대방의 진정한 생명에 대해 어떤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또 이것은 하나의 장기적인 과정이라서 한두 번 말한다고 즉시 효과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마땅히 이런 사상준비가 있어야 하며 하면서 구하지 말아야 한다. 조급하게 서두르는 당문화의 그런 사유로 쉽게 대하지 말아야 한다.

3. 이익 방면에서 교활한 교훈

필자가 이 방면에서 언급하려는 것은 다단계판매나 자금 모집 등 대법 원칙에 위배된 심각하게 잘못된 행위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것도 어기지 않았지만 오히려 많은 교활한 마음이 포함된 행동을 가리킨다. 아마 남을 힘들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바로 표면적으로는 당당해보이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자면 남을 해칠 수 있는 것이다.

이 방면에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일부 교훈적인 현상만 말해보겠다.

모(某) 동수는 일찍이 교활한 마음으로 이익 방면에서 아주 많은 이득을 취했다. 남에게 큰 고통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뭐라 말할 수 없었는데 그는 아주 빨리 급사했다.

또 모 동수는 일찍이 이익 방면에서 가급적 많이 차지했는데 남이 감당할 수 있는가 여부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많은 동수들에게 상처를 주었는데 몇 년 후 몸에 심각한 문제가 나타났다.

모 동수는 자신의 직책을 이용해 이익과 편리를 취했는데 사용한 수단이 좋지 않고 교활했다. 그럼에도 누구도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 큰 병업 마난을 겪었다.

내 기억에 전통문화 이야기 중에 신(神)은 교활한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고 했다. 어떤 인과응보 사례를 보면 당사자가 뚜렷하게 큰 잘못을 하진 않았지만 평생 도처에서 교활한 마음으로 이익을 많이 취하는데 머리를 썼다. 때문에 평생 기본적으로 이익을 얻기만 하고 손해를 보지 않았고 결국에는 엄중한 악보를 받았다.

사실 단지 분명하게 이익을 취하는 것만이 잘못이 아니다. 대법제자라면 마땅히 법에 따라 일을 해야 한다. 그럼 법에서 언급한 그런 부원신(副元神) 수련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택분배를 대했는가 하는 이야기 역시 제자들이 마땅히 이익방면에서 참조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이치는 모두 반대로 된 이치다. 사람은 모두 이익 보길 좋아하고 손해 보는 걸 싫어한다. 그렇다면 바른 이치에 따라 보자면 가급적 이익을 차지하지 말고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 다른 사람이 좋은 점을 많이 얻게 하는 것만이 자신에게 가장 좋고 가장 수지맞으며 가장 총명한 것이다. 마땅히 이렇게 반대로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사부님의 설법을 다시 복습해보자.

“우리 정말로 어리석은 이 바보를 말해 보자. 이 이치는 고층차에서는 전부 다 반대로 된다. 바보는 속인 중에서 크게 나쁜 일을 하기가 불가능하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다투고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며, 명예를 구하지 않아, 그는 德(더)를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오히려 그에게 德(더)를 줄 것이다. 그를 때리고 그를 욕하면 모두 그에게 德(더)를 주는데 이런 물질은 극히 진귀하다. 우리 이 우주 중에는 곧 이런 이치가 있다. ‘잃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하며, 얻으면 잃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 바보를 보고 모두 그를 욕할 것이다. “너, 이 바보야.” 입을 열어 욕함에 따라 한 덩이 德(더)를 던져준다. 당신이 이익을 점하면 얻은 한 편에 속하는데, 그러면 당신은 곧 잃어야 한다. 다가가서 그를 발로 한 번 찬다. “너 이 바보야.” 자, 한 덩이 德(더)를 또 묵직하게 던져주었다. 그는 누가 그를 괴롭히고, 누가 그를 발로 한번 차도, 그는 허허 웃는다. “당신은 해봐라. 어쨌든 德(더)를 나에게 주었으니 나는 조금도 밖으로 밀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고층차의 이 이치에 따른다면 누가 약은가? 바로 그가 약은 것이 아닌가? 그가 가장 약다.”(《전법륜》)

4. 경험

박해가 시작된 이후 20여 년을 걸어오면서 동수들이 직접 겪은 교훈들은 우리가 대조하고 자신을 반성할 수 있도록 대량의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본문은 일부 교훈을 중점으로 말했는데 사실 경험 역시 아주 많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일부 동수들은 묵묵히 세 가지 일을 잘하며 아주 정진하지만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른 동수에 대한 태도 역시 줄곧 자비롭고 상화하며 평등하게 대하는데 남을 대함에도 늘 자상하고 선의적으로 이해한다. 말하는 것도 평화롭고 조용하며 겸손하고 공경해서 큰 소리를 내거나 톤을 높이지 않는다. 심지어 눈빛이나 표정 속에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 그 어떤 무시하는 마음이 없다.

이런 동수들은 줄곧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마난이 아주 적고 또 아주 평온했다. 나는 이 역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좋은 경험이라고 본다. 진정하게 수련에 소양이 있는 이런 동수들 역시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단지 대부분 묵묵히 심성을 엄격히 지키며 엄격하게 실천하고 수구(修口)하며 마음을 닦기에 자신을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때문에 사람들 속에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병업으로 세상을 떠난 아주머니 동수가 다른 아주머니 동수에게 걸어 나오지 않았고 대법 일을 많이 하지 않는다고 무시한 적이 있다. 사실 당시 그녀의 비판을 받은 이 아주머니 동수는 어린 손자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세 가지 일을 하는데 시간적인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아주 자비롭고 순정했다. 때문에 대법 일을 하는 시간은 분명 많지 않았지만 전반적인 언행이나 경지에서 선량하고 무사(無私)함이 체현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손자들이 다 성장한 후 전력으로 세 가지 일을 하는데 투입했고 지금은 이미 아흔이 가까운 나이임에도 수련상태가 줄곧 아주 좋다.

맺음말

편폭의 제한으로 본문에서 언급한 것은 단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사실 20년간 각종 교훈과 경험이 아주 많다.

내 생각에 수많은 동수들이 모두 중시하고 자신을 대조해보아야 할 이런 피의 교훈들이 다년간 많이 누적되었을 것이다. 이런 교훈들이 설마 아직까지도 우리를 놀라 깨어나게 하지 못한단 말인가?

법리에 따라 대조해보면, 내가 이해하기에 사부님께서는 줄곧 세상을 떠난 동수들을 지켜보고 계셨다. 비록 그들이 이런 저런 심성문제로 구세력의 틈을 타게 해서 박해 받아 끌려가는 유감을 남기긴 했지만 대다수는 다 원만했다.

다른 한편, 그들이 남긴 교훈은 법을 실증하고 법리를 실증하는 것이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며 여전히 세간에서 수련하고 있는 우리에게 소중한 참조를 남겨주었다. 우리는 이런 교훈을 보면서 엄격하게 자신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이들 동수들이 치른 다른 종류의 감당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수련이란 원래 아주 어려운 것으로 생명에게 있어 가장 큰 일이자 또한 가장 엄숙한 것이다. 이들 동수들 및 그들이 걸어갔던 길 역시 우리가 소중히 여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과거에 나는 마음을 닦을 줄 몰랐기 때문에 이상 3가지 교훈이 거의 다 있었다. 어떤 것은 언행(言行) 방면에서 나타났고 어떤 것은 사상방면에 나타났다. 돌이켜보면 정말 너무나도 위험했다. 나는 미혹 속에서 대법의 법리를 중시하지 않았는데, 이는 마치 장님이 말을 타고 벼랑 끝으로 달려가면서도 모르는 것과 같았다. 늘 “선악에는 보응이 따른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지만 줄곧 자신이 선량한 사람이라고 착각했고 자신의 불선량(不善良)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아예 몰랐다.

내 기억에 가족이 한번은 나에게 나의 문제는 성격이 나쁘거나 함양이 부족한 게 아니고 또 쉽게 화를 내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본질상에서 선량하지 않고 너무 자사(自私)하다고 했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나는 비로소 이 말의 의미를 명백히 알 수 있었고 또한 비로소 진정으로 선(善)과 불선(不善) 방면에서 자신을 찾아 제고할 수 있었다. 더는 근본적인 문제는 회피하고 지엽적인 문제만 상대하지 않게 되었다.

최근에 와서야 알게 된 것은 내가 과거에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 남을 무시했을 때 사실 그때 신의 눈으로 본다면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나는 과거에 무엇을 근거로 남을 무시했는가? 때로 누구는 반응이 느리고 두뇌회전이 느리다고 했고, 때로는 누구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여겼으며, 때로는 누구는 이해력이 떨어지고 총명하지 않다고 여겼는데 심지어 때로는 누구는 외모가 보기 싫다고 여겼다.

또 내가 새벽에 일어날 수 있었을 때는 또 일어나지 못하는 동수들을 무시했고 또 일부 사람마음이 무거운 동수들을 무시하는 등등이었다. 이런 마음들은 모두 얼마나 불선(不善)한가? 하지만 나는 그때 확실히 자신을 제대로 몰랐는데 바로 문화(전통문화의 결핍)가 없었다. 때문에 그저 도리만 알았을 뿐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를 깨닫고 나서 일찍이 마음속으로 이들 동수들에게 사과했는데 물론 사존께도 참회했다. 또 일찍이 내가 한 말에 상처를 입은 일부 동수들을 직접 찾아가서 사과했다. 왜냐하면 시간이 오래 지나고 상황이 변해서 대부분의 동수들은 직접 찾아가 사과할 기연(機緣)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우주의 법리에 따른다면 사람이 무슨 일을 했든 모두 다 갚아야 한다. 일찍이 남에게 상처를 입힌 사실이 있다면 이것은 이미 다른 공간에 놓여지는데 설사 생각만 했을지라도 일일이 파일에 기록된다. 이렇게 내가 지은 업력은 앞으로 하나하나 내가 겪을 마난(魔難)과 대응한다. 나로서는 전혀 보완할 수 없고 오직 자신이 앞으로 더는 이런 잘못을 짓지 않도록 일깨워줄 뿐이다.

매 하나의 바르지 못하고 선하지 못한 염두는 모두 앞으로 겪을 하나하나의 마난과 대응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감히 더는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

이상은 여러분들에게 참고로 제공하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9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