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흔(無痕)
【정견망】
처음 대법을 배우다
그때는 일종 어떤 심정이었는가?–이렇게 고심(高深)한 법리는 접촉해 본 적이 없고, 우주・인생・생명 등을 이렇게까지 투철하게 말한 것은 인류의 수많은 서적 중에 없었던 일이라 아주 신기하게 여기고 감동했고, 탄복하면서 행운이란 마음을 품고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책 속의 모든 법리를 장악하려 했다. 이는 인간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론이며, 이 이상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神)은 우리의 이런 순정(純淨)한 마음을 보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 속의 법리를 점화해 주셨기 때문에 당시 법을 배울 때 끊임없이 수확이 있었다. 바로 동수의 말처럼 “하루에 천리씩” 정진(精進)하고 제고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법을 배워도 법을 얻지 못하다
요즘 나는 개인수련에 큰 문제가 있는데, 법을 배워도 마음에 들어가지 않아 큰 고민이었다. 이 문제는 또 아주 보편적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명혜망에 어떤 동수가 다음과 같이 썼다.
“사상이 법에 있지 않고 심각하게 딴 생각을 했다. 법을 공부할 때 내 대뇌는 전혀 조용하지 못했고 늘 머릿속에 속인의 어떤 일이든 흥미를 느꼈다. 늘 뭔가를 떠올리고는 상상의 나래를 펴며 이를 가공하고 편집했는데 이런 난잡한 생각들이 마치 유령처럼 몰래 조용히 나를 따라다녔다. 법 공부, 연공, 발정념을 막론하고 그것들은 늘 슬그머니 나타났지만 대부분 나는 아예 몰랐다.”
“나는 매번 법을 배울 때마다 거의 온몸의 힘을 다 써서 아주 많은 것들을 돌파해야만 법의 문자 표면에 접근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설령 법을 외우거나 또는 묵념(默念)할 때도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거의 법의 문자 표면적인 의미조차 접할 수 없었고, 딴 데 정신을 팔면 자신도 모르게 그곳에 멈춰섰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후회하지만 이미 늦었다. 발정념도 마찬가지였다.”
“진수(真修)하는 한 대법제자로서 가장 큰 관이자 가장 넘기 어려운 것은 바로 법을 배워도 법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는 반드시 법 공부를 해야 한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전법륜』을 읽을 때 사상이 전일하지 않고, 다른 것을 생각하며 수련 중에 전념하지 못한다. 이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같으며, 시간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본래는 제고해야 할 때이건만, 오히려 마음에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문제와 일부 일들을 생각하는데, 제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법 공부를 할 때 사상이 법에 있지 않는다면, 이는 단지 형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 법에 대해서 그리 공경하지 못한 것인데, 그렇다면 법이 드러내 보여줄 수 있겠는가?”(《각지설법 2》〈미국플로리다법회설법〉)
나는 끊임없이 돌이켜 생각해봤는데 최근에야 뭔가 깨달음이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미 수없이 공부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치 책 속의 법리(최소한 문자 표면적인 법리)는 기본적으로 다 장악한 것처럼 내심으로 만족감과 자만심이 생겼던 것이다. 자신이 이미 적지 않은 법리를 장악했다고 여겼고, 심지어 잠재의식 속에서 책의 표면에서는 더 이상의 법리를 보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책 속의 모든 구절이 너무 익숙해져서 “법 공부할 때 한 구절만 말하면 곧 유창하게 나왔고 한 구절을 읽으면 곧 다음 구절이 무엇인지 알았는데”, 너무 익숙하다보니 곧 쉽게 피로감을 느껴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기기 쉬웠다.
그러므로 나는 자신에게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자만과 경시 및 소홀히 여기는 마음이었다. 이는 법에 대해 극히 불경(不敬)한 것인데 법이 어찌 내게 더 고심(高深)한 법리를 일깨워줄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오직 배우기만 하면 수확이 있다”고 망상한다면 이는 웃음거리가 아닌가?
자만: 법공부의 근본 장애
자만하는 마음은 내 법 공부에서 가장 큰 장애로 아울러 다른 마음들(가령 사상업이나 마의 교란, 경사경법하지 못하고 안일한 마음 등등)의 배후에 숨어 있어 관찰하기도 아주 쉽지 않다.
우리는 이미 수없이 법을 보았다. 어떤 동수는 심지어 《전법륜》을 수십 번 외워서 마치 대부분의 법리를 다 장악한 것처럼 보인다. 수련의 일도 아주 잘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대부분의 법리를 다 장악했는가?”
만약 《전법륜》에서 한 구절을 뽑아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면 전부 대답할 수 잇는가? 신(新)수련생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를 모두 다 합리적이고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 있는가? 내 생각에 만약 원만(圓滿)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 어떤 문제도 그를 난처하게 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불법(佛法)은 원용(圓容)한 것으로 일체 문제를 똑똑히 해석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1) 제6강에서 “그의 정신이 그를 사망하게 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어떤 정신이 사망을 초래한 것인가? 설마 우리가 겨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물질과 정신은 일성”이라는 것만 대답할 수 있는가?
2) 제3강에서 “동물은 사람의 본성을 구비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육도윤회 속에서 고급생명 역시 동물로 전생(轉生)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의 원신(元神)은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3) 왜 동물은 사람의 본성을 구비하지 못해 수련 성취하면 반드시 마가 되는가?
4) 부원신(副元神) 수련의 형식을 우리는 정말 투철히 알고 있는가? 왜 기어코 하나의 사회 형식을 연화(演化)해 수련해야 하는가?
이상은 단지 무작위로 든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어떤 동수는 아마 이미 속으로 명확히 알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단지 아주 많은 법의 내함(內涵)이 글자 표면에 있지 않음을 설명하려는 것뿐이다.
우리가 단지 몇 가지 문제만 물어보아도 소위 “대부분의 법리를 다 장악한 것”과는 차이가 아주 큼을 알 수 있다. 속인은 늘 “진리는 수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치는 따질수록 더욱 분명해진다.”고 말하는데 만약 우리가 겸손하게 마음을 비우고 진지하게 법을 공부하면서 사고한다면 그럼 갈수록 대법의 법리가 무변무제(無邊無際)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자신의 자만심이란 근본적으로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가소로울 정도로 무지(無知)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일부 기본적인 법리에 대해서는 때로 명확했지만 다른 일부 법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하고 미혹되어 아는 듯 모르는 듯 이해한 것 같아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행위에서도 편차가 나타나 극단으로 나아가고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거나 심지어 법을 벗어나게 했다. 동시에 우리 이 법문(法門)의 특징 때문에, 특정한 단계에서는 어떤 법리에 대해 아주 분명하지만, 일단 격리되고 나면 또 “명확”하지 않게 된다.
아울러 우리가 생각하는 “명확함”은 또 단지 일정한 층차 속에서 명확할 뿐이며, 같은 구절의 법이라도 보다 높은 층차의 법리는 사실 똑똑히 모른다. 때문에 일단 자신이 다시 승화할 필요가 있을 때는 명확하지 않은 그 일면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정진(精進)하는 사람은 현재의 인식을 고수하지 않으며, 법속에서 어느 한 구절의 함의를 모종의 인식에 고정시키지 않는데,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인식을 부정하지 않는다.
법리(法理)에 대해, 나는 종종 지금의 인식에 만족해 멈춰 더 나아가지 못한다. 이는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법의 어느 한 면을 보면 이런 인식을 지니고, 법의 다른 한 면을 보면 또 저런 인식을 지니게 한다. 또 자신의 인식과 부합하지 않는 것을 보면 반감을 품고 배척하거나 공격하고 반대한다.
자신이 인식한 법리를 고수하는데 어찌 법은 원용(圓容)하고 박대정심(博大精深)한 것임을 모른단 말인가! 우리는 단지 자기 경지(境界)속의 법리만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며 현재 우리가 아는 것보다 높은 법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또 법의 전부(全部)를 볼 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법리를 다 장악했다”고 잘난 척하는 것이다.
매일 법을 공부함에도 오히려 장기간 한 층차에 머물러 자신의 진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마 장기간 법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해 심성(心性)이 장기간 그 층차에 맴돌도록 조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법리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면 심성과 경지 역시 함께 제고되는데 그것들은 서로 상보상성(相補相成)한다.
마치 우리가 애초 德(더)와 업력(業力)이 상호 전화하는 법리를 알고 난 후 법리상에서 인식이 제고된 후 심성이 승화되었기 때문에 행위에서도 더는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우리가 어떤 방면의 법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 필연적으로 그 방면의 심성을 승화시킨다. 법리에 대해 점점 더 명확해질수록 다시 말해 갈수록 더 원만을 향해 나아가는데 수련 원만한 사람이 될 때까지 줄곧 그렇다. 그의 경지 아래에서는 그 어떤 법리든 다 일목요연하고 그 어떤 질문이든 다 대답할 수 있다.
이전에 나는 또 이런 일념(一念)을 품었다. 즉 아주 많은 문제들은 원만한 후에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으로 오직 안일만 생각하고 생각을 게을리 한 것에 대한 핑계에 불과하다. 원만의 과정 중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원만한 후) 내가 마땅히 알아야 할 법리의 대부분을 이미 점차적으로 깨닫거나 또는 수련하는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이 원만한 후에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설사 제아무리 고층차의 주(主)나 왕(王)일지라도, 또한 수많은 왕들 중 하나일 뿐이다. 무변(無邊)한 우주대법(宇宙大法)은 우리가 아무리 배워도 다 끝이 없는 것으로 법의 전부를 배울 수 없는데 무엇 때문에 자만하는가?
자만이 더 발전해 나가면 바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독선과 자심생마(自心生魔)가 된다. 자심생마는 사부님께서 아주 무겁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도 무척 경계했지만 자만은 오히려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기에 종종 쉽게 알아채지 못했다. 심지어 그것은 ‘겸허(謙虛)’ 배후에 숨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법 공부를 방해하며, 아울러 자만이라는 물질을 소리 없이 쌓이게 한다.
이는 마치 오랜 기간 우리들 속에 잠복한 특무(特務)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또 소리 없이 파괴와 방해 작용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나는 장기간 자신의 법 공부가 마음에 들어가지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뒤의 근본 원인이 바로 자만이란 이 물질이 축적된 결과임을 몰랐다.
자만이란 이런 물질의 위해(危害)를 알고 난 후, 나는 곧 정념(正念)으로 그것을 제거할 수 있었고, 그 후 다음 법을 배우니 마치 수련 초기처럼 마음이 넓고 상쾌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안일심: 마가 틈을 타다
자만과 안일한 마음이 더해져 나로 하여금 법 배후의 내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문제를 사고하는 것도 아주 피곤하고 또 고생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고생을 겪고 싶지 않아 법에 대한 이해도 곧 “웬만하면 된다”는 것에 만족했다.
많은 때 나는 사상이 나태한 것을 무위(無爲)나 공(空)로 여기면서 둘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다. 만약 정말로 아무것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럼 정말 공(空)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법리를 사고하고 싶지 않으면서 오히려 속인의 일은 아주 흥미진진하게 말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대부분 내가 법리를 사고하고 싶지 않은 것일 뿐 무위나 공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안일심과 나태심이 장난을 친 것이다.
때로 나는 자신이 사부님에 대한 의존이 지나친 것을 발견하는데, 그 무엇이든 사부님의 설명에 의존하면서, 스스로 깨닫거나 사고하려 하지 않았다. 대법의 법력(法力)은 끝이 없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은 이 법이 얼마나 크겠는가를 생각해 보라. 사실 나는 여전히 다만 그것을 개괄적으로 여러분에게 말했을 뿐이다. 진정한 이해는 당신이 착실하게 수련하는 중에서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닦으며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미국법회설법》〈샌프란시스코법회설법〉).
즉, 법의 보다 많은 세부적인 것들은 수련인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이 역시 사부님께서 우리가 수련하고 자기 세계를 원만하도록 의도적으로 남겨두신 것이다. 비록 내가 제아무리 깨달아도 역시 사부님 설법의 범위를 넘어설 수는 없지만, 석가모니가 우주대법 중에서 자신의 ‘계정혜(戒定慧)’를 증오(證悟)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자신의 과위를 증오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사부님께 의존했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만을 스스로 이해하고 깨달으려고 했을 뿐 사부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지금껏 생각해보지 않았으며 또 감히 생각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문제가 생기면 사부님이나 다른 동수에게 물어보려고 기다렸다.
기계적이고 경직되어 극단적으로 법을 인식
속인 중에 속인의 관념이 있다면, 수련 중에도 점차 법에 대해 고정된 인식과 관념이 형성되어 불법(佛法)의 다면성, 불법의 원용(圓容)과 박대(博大)를 똑똑히 보지 못하게 한다. 아울러 ‘법무정법(法無定法)(《파룬따파의해》〈창춘파룬따파보도원설법〉)의 내함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게 한다.
예를 들어 사부님께서는 살생을 금지하는 법을 말씀하셨지만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만약 정말로 전선(前線)으로 나갔다면 아마 밀라레빠의 사부처럼 그것을 흑업(黑業)으로 행하게 하고 선과(善果)를 맺는 인연관계로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정진요지 2》〈대법은 원용하다〉)
사부님께서는 또 진정한 수련인은 당연히 병을 치료하고 약을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신수련생이나 정진하지 않는 수련생은 재량껏 해야지 강제로 할 수 없다고 하셨다.
또한 절대로 공능을 사용해 병을 치료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수련인이 자비심에서 우러나와 작은 범위에서 소리 없이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씀하신 등등이다.
이렇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의 다면성은 그 사례가 아주 많다. 우리는 법의 다른 일면의 보다 높은 이치로 자신의 이 일면의 집착을 덮어 감출 수 없지만 그렇다고 또 법의 이 일면을 고수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자만에 안일이 더해져, 법의 다면성을 생각하지 못하면, 현 단계에서 법의 요만한 인식을 고수하게 하는데 이는 또 나로 하여금 법을 편협하고 고정되며 경직되게 이해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내가 이해한 법으로 다른 사람과 일을 가늠할 때, 자신이 장악한 척도 역시 아주 편협하며 아주 좁은 범위 내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늘 이것은 법에 있지 않고 저것은 법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기면서 동수들 사이에 모순과 간격을 조성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은 “대부분의 법리를 다 장악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물론 지식인으로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지식인이 대법을 배우는” 습관인 한 글자씩 글자를 파고들거나 지식을 깊이 탐구하는 것을 피해야 하지만 또한 보다 많은 수련생들이 또 다른 극단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법을 공부할 때 깊은 이해를 추구하지 않고 그럭저럭 대충대충 하는 것이다.
동시에 또 다른 극단을 피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즉 어지럽게 깨닫거나 심지어 사오(邪悟)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극단으로 걸어갈까 두려워 아주 많은 때 다른 사람들과 법리(法理)를 논의하거나 탐구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또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법리 탐구에 집착하거나 또는 사오(邪悟) 경향이 있다고 말할까 두려워 종래로 가급적 법리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늘 다른 사람이 법리를 토론하는 것을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저지했다. 법 공부 초기에는 마땅히 대법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토론에는 적은 시간을 써야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극단으로 치달아 아예 토론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데 이 역시 법에 대한 미혹이자 오해다.
사상업의 교란이 심각
사고하려 하지 않는 데는 또 다른 하나의 요소가 있는데 바로 사상업(思想業)의 교란이다. 매 하나의 물질은 모두 대뇌와 일정한 연계가 있다. 이중 많은 것들이 사상업과 유사한 것을 형성하며 여기에는 자만이란 이런 물질을 포함한다. 법리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면 경지가 제고되고 그럼 업력이 죽기 때문에 이 물질 역시 사상업의 형식으로 반응되어 나와 우리가 더 높은 법리를 사고하지 못하도록 저지할 수 있다.
익숙한 것은 쉽게 피로해진다
속인들 속에서도 심미(審美) 피로, 인지 피로, 학습 피로, 업무 피로 등이 있다. 장기간 날마다 같은 책을 읽으면 비록 모두 이치상 당연히 이래야 한다고 아는데 아마 많은 경우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이미 피로감이 있을 것이다. 또는 내가 법속에서 보다 고심한 이치를 볼 수 없고, 수확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피곤하며, 책 속의 매 한 구절이 모두 아주 익숙하다고 여기는 것 역시 그럴 수 있다.
이는 사상업이 나의 대뇌 속에 반영한 생각인데, 그것이 우리더러 피곤하고 지치게 만들어, 점차적으로 내가 법을 적게 공부하게 하거나 더 나아가 공부하지 못하게 하는데, 최후에는 법 공부를 포기하고 수련을 포기하게 만든다. 이것은 수련 중에서 한 가지 부드러운 킬러다. 마치 더운 물에 개구리를 삶는 것처럼 우리가 서서히 수련을 포기하게 만든다.
마가 사람을 교란하고 저지하는 또 다른 방법은 바로 우리의 피로감을 극대화시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인내심과 의지력을 소모시키는 것이다. 내가 법이 너무 익숙하다고 느낄 때면, 이때 나는 이미 마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성해야 하며 경계심을 지녀야 하는데 수련이란 언제 어디서나 늘 마난(魔難)이 있게 마련이다.
소홀히 여기는 마음
자만에 지나친 익숙함이 더해지면 쉽사리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기 쉽다. 그래서 법을 공부하면서 딴 데 정신이 팔려 마음이 법에 없고, 주의가 산만해지는데 심지어 아주 좋지 않은 생각까지 한다. 이는 법에 대한 큰 불경(不敬)으로 법 배후 층층의 불도신(佛道神)들은 절대 우리에게 더 높은 법리를 점화해주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이때 이미 자신이 법을 배우지 않으니 아마 부원신(副元神)이 배워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이 한 문은 바로 주원신(主元神)에게 주는 것이다.
형식만 중시하고 실질을 가볍게 여김
법을 공부하면서 형식을 중시하고 수량을 중시하며 속도를 중시한다. 마치 임무를 완성하고 할당된 수량을 완성하는 심태로 학습한다. 이렇게 법 공부 형식 자체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심성 제고에 소홀한 것 역시 내 법 공부가 마음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이유의 하나다.
법 공부는 마땅히 속도를 추구하지 말고 질을 중시하고 효과를 중시해야 한다. 법 공부를 위해서 법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구하면서 법을 공부
명혜망에서 어떤 동수는 또 말했다.
“법 공부에 구함이 있다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해 법을 공부하고 수련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몸이 견디기 힘들고 어디가 아프니 빨리 법을 공부하고, 연공하며, 발정념을 한다.
또는 수련 과정에 속인 중에 무슨 번거로움이 생기는 이것은 구세력의 교란이니 빨리 법을 공부해 안으로 찾으라고 한다.
또는 나 혼자의 힘에는 한계가 있으니 빨리 동수를 찾아가 단체 법공부와 단체 발정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하면서 법을 공부하면 목적이 이미 순수하지 않기에 법의 보다 높은 내함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구함이 없이 법을 공부해야 한다.
마난이 크거나 시간이 길어지면 대부분 법공부에 문제
장기간 많은 법리에 대해 미혹되거나 오해하거나 또는 전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큰 마난이나 장기적인 마난을 초래할 수 있다. 만약 법리에서 돌파할 수 있다면 아마 마난도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수련 중에서 당신은 허다한 시달림(魔難)에 부딪힐 것이다. 오로지 여러분이 참답게 법을 배우면 어떠한 난이든지 당신은 넘길 수 있으며, 당신이 오로지 참답게 법을 배우면 그 어떤 풀기 어려운 마음속의 매듭, 넘기지 못하는 것도 모두 법 중에서 답을 찾을 수 있고, 풀 수 있을 것이다. 이 한 부의 법, 그는 어떻게 사람이 되고, 어떻게 천인(天人)이 되는지를 포함하고 있다. 또 나는 여러분에게 어떻게 해서 불(佛)ㆍ도(道)ㆍ신(神)이 되고 더욱 높은 경지중의 신이 되는지를 알려주는데, 그가 당신 마음의 매듭을 풀어주지 못하겠는가? 그가 당신의 사상을 열지 못하겠는가? 그가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겠는가? 다 할 수 있다.”(《북미제1기법회설법》)
대법을 소중히 여겨야
석가모니는 가장 낮은 법(法)인, 나한법(羅漢法)을 남겼고, 그나마도 흠결이 많고 불완전했지만 사람들은 더욱 소중히 여겼다.
반면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창세주(創世主)의 지혜이자 완전한 한 부의 우주대법이다.
“사실 천체(天體)는 너무나 커서 우주에 대한 부처의 인식을 벗어났다. 도가의 태극 역시 작은 층차(小層次)에서 우주를 이해함이라, 속인 이 한 층에 이르러서는 이미 실질적인 법(法)이 없게 되었다. 다만 우주 변두리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좀 수련할 수 있게 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속인은 가장 낮은 층차의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한 불법(佛法)을 알지 못하게 했다.”
“法輪大法(파룬따파)는 우주의 특성[불법(佛法)]을 만고(萬古)이래 처음으로 사람에게 남겨놓은 것으로, 사람에게 하늘로 올라가는 한 부의 사다리를 남겨놓은 것과 같다.”
(《정진요지》〈불교의 논술은 불법의 가장 약소한 일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침 정법(正法)이란 전례 없던 큰일을 만났고 직접 창세주(創世主)께서 인간세상에서 법을 전하시는 기연(機緣)을 만났기 때문인데 이런 기연은 영원히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몹시 소중히 여기고 단단히 학습하고 이해해야 하는데 기연이 일단 지나가면 후회해도 늦는다.
결론
진지하게 법을 공부하고, 법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으로 간주하면서, 자만심을 경계하고 극복하면서, 매 구절마다 왜 그런지 묻고, 진지하게 사고하며 깨닫자, 서서히 법의 무한한 내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수확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며 열정이 있었고, 마치 법 공부 초기 굶주리거나 목마른 상태에 가까워졌다.
매번 “매 한 차례 법 공부를 마치 내가 처음 법을 배우는 것과 같은” 마음을 품고 “내가 아는 것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고 나는 단지 무량한 우주에서 무량한 모래 중의 한 알에 불과해, 차이가 아주 멀고, 매 한 차례 법 공부는 모두 새로운 시작”이란 심태로 《전법륜》을 공부해야만 끊임없이 보다 높은 층차의 법리를 볼 수 있다. 또 이렇게 해야만 현재 국내와 국외 수련에 대한 구체적인 지도 작용을 하는 법리를 볼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은 우주의 법이며 생명을 성취하는 법으로, 그를 얻으려면 반드시 착실하고 착실하게 마음을 조용히 하고 끊임없이 학습하여 그를 읽고 이해해야 하며, 법의 요구에 따라 처신하고 하나의 수련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비로소 대법제자이다.”(《아르헨티나법회에 보내는 축사》)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8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