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대법제자
【정견망】
동수와 교류하는데 《홍음 5》는 외우기가 특히 어렵다고 했다. 왜냐하면 많은 가사의 내용이 서로 비슷해서 늘 헛갈리기 때문이다. 내가 《홍음 6》을 배운 느낌이 바로 그랬는데, 거의 모든 가사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내함(內涵)이 들어 있었다.
첫째, 전통으로 돌아가면 하늘로 통하고
둘째, 무신론 진화론은 마귀의 속임수이며
셋째, 현대 관념은 독약이다.
현재 《홍음》 경문은 기본적으로 모두 대법 수련인들이 배우고 있는데, 사부님께서는 왜 같은 내함의 경문을 수십 편이나 발표하셨을까? 법 공부는 자신을 대조하기 위함인데, 사부님께서 거의 동일한 내함의 법을 수십 번 반복하신 것은 설마 아직 법을 얻지 못한 속인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일까? 전통문화와 사부님의 경문을 대조해보고, 주변의 많은 동수들을 보고, 다시 자신의 행동과 사상을 대조해 본 후,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법제자들이 의식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이 있음을 알았다. 의식하지 못하면 고칠 수 없고 또 우리의 상태가 지금 이 순간 세간의 표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아래에서는 내가 본 수련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현대 관념과 이런 관념과 전통 관념의 대립점에 대해 말해보겠다.
1. 군권천수와 자유평등
전통문화에서는 군권천수(君權天授)를 강조하는데 한 왕조의 황제 그는 바로 ‘천자(天子)’로 즉 하늘이 만백성을 위해 선정한 군주다. 군주가 된 사람은 도덕의 다양한 방면에서 반드시 자신에게 아주 높게 요구해야 하며 만백성의 도덕적인 모범이 되어야 한다. 사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계층의 높고 낮음과 귀하고 천함에는 엄격한 규범이 있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은 반드시 높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시해야 한다. 즉, 사람 세계(人界)의 법칙은 마찬가지로 우주대법과 대응하는데 피라미드형이다. 이 사회에서 매 사람의 지위와 처지는 하늘이 이 생명이 지닌 덕에 따라 배치하는 것으로 이는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이것은 정태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동태적으로 말하자면, 생명이 어느 계층에 있든, 설사 고위층이라도 부도덕한 짓을 하면 윤회전생(輪迴轉生) 중에서 또 지위가 낮아지고, 낮은 층이라도 힘든 생활 속에서 업을 갚고 동시에 덕을 쌓고 선을 행하면 윤회전생 중에서 지위가 높아질 수 있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생명의 자유와 평등은 마땅히 대법에 부합해야만 한다. 하지만 수련인이 만약 머릿속에 온통 현대 관념 속의 자유와 평등뿐이라면 다시 말해 덕(德)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위치를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럼 아주 쉽게 자신의 투쟁심, 과시심, 시기심 등의 집착심을 덮어 감추거나 합리화하기 쉽고, 이를 통해 노력하고 대가를 치르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주변 사람들의 이런 집착심에 이끌리기 쉬워지는데, 묵묵히 조용한 마음으로 오직 안을 향해 자신을 수련하는 상태가 되기 힘들다.
심하면 또 무의식중에 본능적으로 중공이 선전하는 소위 “황제를 말에서 끌어 내린다”는 사악한 관념을 받아들이게 하고,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의 강렬한 질투심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구체적인 표현은 대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면서도 곳곳에서 자기중심이고 자신의 사람 속 능력에 집착한다. 어떤 항목의 협조 임무를 다른 동수에게 맡기면 마음속으로 그와 협력해 일을 원용(圓容)하려 하지 않고, 묵묵히 힘겨루기를 하거나 심지어 스스로 별개의 팀을 이끈다. 마음속으로 아마 자신이 진상을 알리는 일을 확실히 동수보다 더 잘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오히려 대법수련의 요구와 배치된 것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전통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련인은 또 자신의 재능을 곳곳에서 자랑하면서 남의 결점을 지적하는데, 일을 하기만 하면 일일이 도리에 맞고 의욕이 넘친다. 수련을 말하면 가볍게 말하거나 글을 쓰지만, 자신의 사람마음이 폭로되고 제거된 과정은 종래로 말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은 본래 누구보다 잘 닦은 것 같고 언제나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는데 오직 눈앞에 보이는 것만 치중하고, 장래를 상관하지 않는다. 사실 지위가 높은 사람 역시 덕행을 지키지 않으면 역시 스스로 낮은 지위로 강등될 수 있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다년간 왜 수련인들이 서로 승복하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으며 비협조적인 경우가 그렇게 흔했을까? 사부님께서 비슷한 내함을 지닌 경문 수십 편을 발표하셨는데 대체 누구를 깨우치려 하신 걸까? 전통문화로 돌아간 수련자는 매우 겸손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피라미드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 모르고, 또한 주변 동수 누가 더 잘 닦았고 누가 더 높은 지위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어떤 동수에 대해서도 겸손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가 일을 하면 조율하기 쉽고, 무조건 협력해 모두들 정해진 목표를 향해 함께 힘을 쓰고, 묵묵히 보충하고, 묵묵히 대가를 치르며, 묵묵히 자신의 마음을 닦는다. 끊임없이 보다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는데, 심성이 낮은 그 어떤 사람이나 일에 이끌리지 않는다. 이런 수련자야말로 진정으로 수련의 내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하루하루 더 높은 위치로 나아가는 착실한 수련자다.
자신이 이 문제에서 현대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자면 스스로에게 다음 몇 가지 문제를 질문해보고, 또 자기 내면의 반응을 솔직하게 보면 된다.
1) 신분이 존귀한 사람에 대해 고인(古人)처럼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릴 수 있는가?
2) 나는 평온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만약 내가 지금 피라미드의 바닥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내심에서 우러나와 공경하며 선망이나 시기, 또는 운명의 불공평함을 불평하지 않을 수 있는가?
3) 각종 방면에서 나보다 더 좋은 그런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운이 좋기 때문이지 별로 대단할 게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2. 음양평형과 남녀평등
전통문화에서는 음양평형을 중시하는데, 구체적으로 인류의 남자와 여자 사이의 상호관계로 나타난다. 전체 인류 각 민족은 전통 속에서 남자는 모두 양강(陽剛), 위무(威武), 바깥일을 주관했고, 여자는 모두 음유(陰柔), 겸손, 집안일을 주관했다. 이는 본래 천체 운행의 법칙에 따라 결정된 것으로 음양이 각기 제자리를 얻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가문의 전승(傳承)은 늘 남자의 핏줄로 규범화되고, 여자가 남의 집에 시집가면 곧 시댁 사람이 되는데 왜냐하면 자녀들이 시댁의 핏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수천 년간 존재해 온 이런 전통은 사실 우주 구조와 대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관념에 조종당한 여자들은 상술한 전통 사상을 받아들이기가 아주 어렵다. 수십 년간 중공 마귀의 통치를 받아온 중국 여자들은 갈수록 더 사나워지고 있다. 여기에는 대법을 수련하는 여(女)제자를 포함한다. 사실 더없이 완고한 현대 여성 관념을 내려놓고, 션윈(神韵)무용극 《한요(寒窯)》속의 여주인공처럼 진정으로 독립적이고 강인하지만 동시에 가장 겸손하고 선량하며 굳세고 용감한 여성이 될 수 있는가? 친정이 아무리 부귀하더라도 가난한 남편의 집을 지키는 심성 상태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수련과제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기에 대법 속에서 생명의 음양은 원래 동태적인 평형을 이룬다. 사부님께서는 법(法)에서 남자로 전생하려면 덕을 쌓아야 한다고 명시하셨는데, 생명의 윤회 속에서 자신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여길지라도 그것을 얻으려면 오직 확고하고 착실히 수련하는 한 길을 걷는 수밖에 없다. 여자가 만약 남자와 같은 생명의 지위를 얻고 싶다면, 착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닦고, 선을 행하며 덕을 쌓아야 하는데, 아마도 내생에 남자의 인생 과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남자가 덕을 지킴에 소홀히 하고 평생 나쁜 짓을 아주 많이 해서 자신의 덕을 훼손한다면 다음 생에는 여자의 삶을 살 수도 있고, 덕행을 중시하지 못한 전생의 남자가 가져다준 고난을 체험할 수도 있다.
대법이 전해져 나온 후 우리로 하여금 동태적이고 발전적이며 변화하는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남자든 여자든 막론하고 모두 덕을 지키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 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남녀평등이다. 그러나 현대 관념의 남녀평등은 사악한 것으로 생명의 차이는 각자의 덕(德)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 천법(天法)을 인정하지 않다. 여권운동의 일체 내포는 다 반(反)전통적이다. 이런 것들은 《공산주의 유령은 어떻게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가》란 책에 아주 전면적으로 논술되어 있다. 관건은 대법 수련인이 지금 이 순간 자신 역시 현대 관념에 의해 조종당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여자 동수들은 자신에게 솔직하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1) 내 남편은 아내인 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감사하며 보살펴주는가?
2) 나는 정말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상태로 돌아가 남편을 돕고 자식을 가르치는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가?
3) 나는 정말로 남편의 집을 자신의 집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일생을 이 집에 바치고, 그의 모든 가족을 돌보려 하는가?
4) 비록 아이를 낳는 것이 이렇게 힘들지라도 신령(神靈)에게 운명을 맡기고, 모든 것을 자연에 순응하며, 자신과 인연 있는 생명을 아이라는 방식으로 나와 인연을 맺게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수련(修煉)이란 극히 엄숙한 것이며 심성(心性)에 대한 요구는 엄격하고 무정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만약 수련인이 위의 질문에 모두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럼 오늘날 세계의 심각한 음양반배(陰陽反背), 여자가 멋대로 낙태하고 성적으로 문란하며, 이혼, 성전환 등의 난잡한 현상은 대체 누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가? 우리는 인류가 구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데, 우리가 만약 바른 관념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통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겠는가?
3. 목숨을 바치는 대법수호와 교활한 위험 회피
대법을 수호하는 것은 대법제자의 천직이자 본분이다. 선과 악, 정(正)과 사(邪), 좋고 나쁨의 대립 속에서 대법을 수호할 수 있는 이것은 대법제자들이 매 차례 관을 넘는 중에서 지나야 하는 신(神)의 고험이다. 1999년 사악이 파룬궁을 박해했을 때, 대법을 수호하기 위해 일체를 버릴 수 있는가 여부는 생사의 고험이었다. 많은 동수들이 그 관을 통과했지만, 또 많은 동수들이 당시 생사의 고험에 직면하지 않았고 생명으로 대법을 실증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렇다면 해외에 나와서 시험을 다시 칠 기회가 있을 수 있는가?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법정〉에서 “내가 다시 여러분들에게 알려주겠다. 외부인은 영원히 모두 법을 파괴할 수 없으며 법을 파괴하는 것은 다만 내부 수련생일 뿐이다.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셨다.
대법이 전파된 지 30년 동안 내부 수련생들이 법을 어지럽힌 일들은 사실 끊임없이 나타났다. 개인적인 이해로 그것은 수련 중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며, 아마도 많은 동수에게 보충 시험의 기회를 준 것이다. 누군가의 행위가 법을 파괴하는 것일 때,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이를 구별할 수 있는가? 또 구별했다면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가?
전통문화 속에서 정직한 선비는 자기 마음속의 정도(正道)를 지키기 위해 온갖 마난을 감당하거나 심지어 담담히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여러분이 역사상의 장수와 재상 명신(名臣)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전통 문화의 내함을 한번 보충해볼 수 있는데, 역사 속의 진정한 군자와 충신들이 어떻게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지키는 것을 선택했는지 한번 참고할 수 있다. 반면 능력이 아주 뛰어나고, 문채도 탁월한 그런 소위 재상이나 간신들이 존재하는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만약 오늘날까지 대법 수련자의 머릿속에 여전히 수많은 변이된 현대관념이 남아 있다면, 가령 어떻게 해야 명철보신(明哲保身)하고,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며, 대법을 파괴하는 언행을 보면서도 입으로는 교활하게 내부 화합을 수호한다는 구실로 대법수련 속에서 대법을 수호할 수 있는지 여부의 고험을 회피하면서, 남에게 죄를 짓지 않으려 하고, 계란으로 바위를 칠 수 없다는 등의 현대의 패괴한 관념을 자신이 처세하는 도로 삼는다. 그렇다면 지금 마귀가 세상을 통치하는 것 역시 우리의 순결하지 못한 마음과 더없이 패괴(敗壞)한 관념이 빚어낸 것이 아닌가?
많은 경우 우리는 이런 불평을 들을 수 있는데, 지금의 수련환경이 어떻게 나쁘다고 하지만, 그러나 환경은 우리 매 사람이 만든 것이다. 만약 이 환경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전통 관념을 지니고 있고, 과감히 목숨을 걸고 대법을 수호하는 사람들이라면, 환경은 분명 아주 좋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이 환경 속에서 대부분 사람들의 머릿속이 온통 현대관념이라면, 그럼 환경 속에 끊임없이 번거로움과 문제가 나타날 것이며, 자신을 해치고 남도 해치고, 사람마다 모두 나를 해치는 국면을 형성하게 되는데 즉 말법말겁(末法末劫)의 인류 사회처럼 될 것이다.
수련이란 하나의 점진적인 과정이다. 어떤 동수들은 일찍이 진실을 말해 법을 수호했지만 결과적으로 내부에서 좌절을 겪었고, 이때부터 경험을 총괄해 이런 수련 과정을 회피한다. 사실 좌절 그 자체는 바로 제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과감하게 진실을 말하고, 과감하게 대법을 수호함은 단지 심성의 한 관문을 통과한 것에 불과할 뿐이며, 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여부는 수련상에서 계속 제고할 필요가 있다.
진실을 말하고 법을 수호하는 과정 속에서 진선인(真・善・忍)을 해낼 수 있었는가? 각종 사람 마음을 품고, 동수들에게 오해와 공격을 받았을 때 아무런 원망이나 후회도 없을 수 있는가? 동시에 대법을 수호하려던 초심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심성을 지속적으로 제고할 수 있는가?
만약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을 닦을 수 있다면 환경은 반드시 좋아질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정법(正法)은 반드시 성공한다”(《정진요지 3》〈문안〉)고 말씀하셨으니 인류는 장차 반드시 바로잡힐 것이다.
또 “전통으로 돌아가면 길이 하늘로 통하리니(走回傳統路通天)”(《홍음 5》)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것(전통)은 미래 인류의 유일한 상태이다.
사부님의 정법은 이미 최후에 이르렀고, 우리가 정법을 수련할 기회도 곧 사라질 것이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방면은 단지 우리의 수많은 현대관념 중 몇 가지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마땅히 가급적 빨리 자기 뇌 속의 변이된 각종 현대 관념, 다시 말해 머릿속의 독약을 쏟아버려야 한다!
우리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상대방의 현대 변이관념을 보면 제때에 선의로 바로잡아주고, 매 대법제자가 다 전통으로 돌아가, 사부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우리의 본성을 일깨워주기 위해 쓰신 수십 편의 경문에 부끄럽지 말아야 한다.
이상은 개인이 법공부와 수련 중의 작은 깨달음이다.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89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