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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오천문명탐구: 귀곡자의 신비한 능력 탐구

불효(拂曉)

【정견망】

(1) 서문

중화 5천년 신전문화의 기원은 유구하고 찬란하다. 그 중의 점복술(占卜術) 역시 찬란한 진주이며, 그 심오한 이론과 현묘한 방법은 줄곧 학자들의 눈길을 끌어왔다. 왜냐하면 환경이 비교적 어렵고 열악하기 때문에 사람의 생산, 생활, 전쟁 등 모든 활동이 다 사람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종종 행동하기 전이나 돌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책임지고 판단해야 하며, 위험을 피하고 손실을 줄이거나 성공을 추구하기 위해 다양한 점복술이 유행했다.

점복은 결코 일종의 소일거리가 아닌 생존 기술이었으며 또한 매우 중요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선과 악의 문제가 있고, 덕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있다. 선을 행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산과 생활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은 반드시 길하고 흉하지 않지만, 악행을 하면 반드시 흉하니 이는 천리(天理)가 시킨 것이다. 특히 장기적으로 보면 더욱 그렇다. 설사 덕이 없는 행위에 대해 길하다는 점이 나와도 역시 일시적인 즐거움일 뿐이며 보응이 반드시 뒤따를 것이다. 한 명리(命理) 책에서 한 말이 기억난다.

“몸이 좋은 것이 팔자 좋은 것만 못하고, 팔자 좋은 것이 마음이 좋은 것만 못하다”

귀곡자(鬼谷子)는 춘추전국시기 전기적(傳奇的)인 인물로, 본래 성은 왕(王)이고 이름이 허(栩)다. 동주(東周)시기 진 평공(晉平公 기원전 557년~532년, 재위 25년) 때의 인물로 도가(道家), 종횡가(縱橫家), 모략가(謀略家)로 저술이 있다. 초기의 정황은 분명하지 않은데, 말년에 산골짜기에 은거한 것 같다.

알려져 있다시피 선생은 손무자(孫武子 손빈의 조부), 묵자(墨子)와 왕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 평공 시기부터 그의 제자로 알려진 손빈, 방연, 소진, 장의까지 추산해보면 이 때 귀곡 선생은 이미 200살이 넘은 것으로 보인다.

양성(陽城)의 경계에 산이 깊고 숲이 빽빽한 계곡이 있어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는데, 이름을 귀곡(鬼谷 귀신골짜기)이라 했다. 선생은 이곳에 숨어 스스로를 귀곡자(鬼谷子)라 불렀다. 양성은 대우(大禹)의 하왕조(夏朝)가 세운 도읍으로 지금의 하남(河南) 정주(鄭州) 등봉(登封) 경내에 위치한다.

귀곡선생은 고금에 두루 통달하고 뛰어난 재주와 원대한 경륜(雄才大略)이 있어 천지에 통달했다. 그의 학문은 주로 주로 첫째 수학[數學 수술(數術)]로서, 별자리를 장악해 미래를 점 치는데 영험하지 않음이 없었다. 둘째는 병법(兵法), 셋째는 유학[遊學 즉 변론(辯論)], 넷째 ‘세상을 벗어나는 학문(出世學)’으로, 수진양성(修眞養性)하고 복식(服食)하고 도인(導引)해서 병을 물리치고 수명을 늘리며,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고대 수련은 사람 자신이라 할 수 있는 주원신이 삼계를 나가는 것을 말하지 않았고 그저 수련의 기틀을 다지고 연기하거나 또는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파룬따파(法輪大法)야말로 실질적인 수련이라 할 수 있다.]

점복술을 말하자면 그것도 다양하다. 내가 알기로는 천상(天象)으로 점치는 것이 있는데, 예를 들면 당나라 이순풍(李淳風)의 을사점(乙巳占)이 있고, 팔괘로 점 치는 것이 있는데 송나라 소옹(邵雍 소강절)의 매화역수(梅花易數)가 있다. 또 신기묘산(神機妙算), 대육임(大六壬), 자미두수(紫微鬥數), 기문둔갑(奇門遁甲), 괘를 뽑는 효사법(爻辭法), 제비를 뽑는 추첨법(抽簽法), 관상법(相面法), 모골법(摸骨法 뼈를 만져서 점치는 일종의 골상법) 등이 있다.

귀곡 선생도 분명 여러 산법(算法)에 정통했을 것이다. 그러나 방연(龐涓)과 손빈(孫臏, 산을 내려오기 전 이름은 孫賓)의 앞길을 점칠 때, 각각 꽃가지 하나로 (一支山花)로 점을 쳤는데 정확하기 이를데 없어 신단(神斷 신과 같은 판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중화(中華)전통문화(傳統文化)를 바탕으로 점복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으로 결코 점괘 활동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인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점을 봐줘서는 안 되며, 또 남에게 자신의 점을 봐달라고 부탁해서도 안 된다.

(2) 귀곡자의 점

다음은 옛날 이야기에서 줄거리를 발췌한 후 필자가 다시 분석한 것이다 (참고자료는 《동주열국지》다. 명나라 때 풍몽룡이 지음).

방연에 대한 예측

방연은 병법을 배운 지 3년이 넘었고,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물을 길어 오려고 우연히 산 아래로 내려갔는데, 어떤 사람이 위나라에서 후한 돈으로 현인(賢人)을 모집하니 장상을 찾아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방연은 마음이 설레어 선생에게 사직하고 산을 내려와 위(魏)나라의 인재초빙에 응하려 했다. 그러나 선생이 놓아주지 않을까 두려워 머뭇거리며 말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다.

선생은 그의 표정을 살피고 진작 그 뜻을 알고는 방연에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시운이 이미 닿았는데 어찌하여 산에 내려가서 부귀를 구하지 않느냐?”

방연은 스승의 말씀이 자신의 뜻과 맞자 바로 무릎을 꿇고 청했다.

“제자가 마침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가면 제가 뜻을 펼 수 있겠습니까?”

선생이 대답했다.

“너는 산꽃 한 가지를 따오너라. 내가 점을 쳐 주마.” 이에 방연이 산을 내려와 산꽃을 찾았다. 이때가 바로 6월의 무더운 날이라 온갖 꽃이 피었으나 산꽃은 없었다. 방연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한참을 찾다가 풀꽃 한 줄기를 찾아 뿌리째 뽑아 스승님께 드리려고 했다.

문득 “이 꽃은 줄기가 약해서 큰 그릇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땅에 버리고 다시 찾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다른 꽃이 없어서, 돌아서서 전에 딴 풀꽃을 소매 속에 감추고, 선생에게 돌아와 “산에 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생이 말했다.

“꽃이 없다면서 소매 속에 무엇이 들었느냐?”

방연은 숨길 수 없어서 꺼내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꽃은 흙에서 뽑히고 또 햇빛을 받았으므로 반쯤 시들어 버렸다.

선생이 말했다.

“너는 이 꽃의 이름을 아느냐? 마두령(馬兜鈴)이라 하느니라. 열두 송이가 피는데 네가 부귀영달하는 햇수다. 귀곡에서 채집했으니 해를 보면 시들 것이다(采於鬼谷,見日而萎.) 귀鬼자가 위委자 옆에 붙어 있으니鬼傍著委 너의 출세는 반드시 위나라魏에서 하게 될 것이다. 방연은 은근히 신기하다고 여겼다. 선생은 또 말하였다. “하지만 너는 괴롭힘과 맞지 않다. 나중에 남을 업신여기는 일로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리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여덟 글자가 있으니, 너는 기억해야 한다. “양羊을 만나면 영광스럽게 되고, 말馬을 만나면 병든다.”

손빈을 점치다

손빈이 귀곡자에게 방연이 보낸 편지를 보여드렸다. 선생은 방연이 이미 때를 얻어 크게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 편지를 써서 손빈을 데려가려고 하면서 스승에 대한 안부 인사는 한 글자도 없었다. 이 사람은 각박하고 본분을 망각한 사람이니 따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방연은 천성이 교만하고 질투심이 강해서 만약 손빈이 간다면 어찌 둘이 양립할 수 있겠는가? 이에 손빈더러 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또 위왕(魏王)의 초대가 정중하고, 손빈 자신이 이미 가려는 마음이 급해서 막기 어려웠다. 이에 귀곡자는 손빈에게 산꽃 한 가지를 가져오게 해서 그 길흉을 점치려 했다.

이때는 9월이라 손빈은 선생의 책상 위에 병 속에 노란 국화 한 가지가 공양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뽑아 올린 후 즉시 꽃병에 돌려놓았다.

이를 보고 귀곡자가 말했다.

“이 꽃은 이미 꺾어진 것으로 보아하니 온전하지 않다. 하지만 성질이 추위에 강하고 서리에도 죽지 않으며 비록 훼손되어도 큰 흉은 아니다. 그리고 병에 담긴 것을 좋아하여 사람이 소중히 여긴다. 꽃병은 금(金 금속)으로 만든 것으로 종이나 솥 종류에 속한다. 결국 서리와 눈의 시련을 거쳐야지만 명성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 꽃이 다시 뽑혀왔으므로 한동안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병으로 돌아가므로, 너의 공명은 결국 고향(제나라)에 있다. 내 너를 위해 그 이름을 바꾸어 줄 테니 출세(進取)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손빈의 이름에서 ‘빈(賓)’자 왼쪽애 육달월(月)을 추가해 ‘빈(臏)’이라 했다.

자서(字書)에 따르면, 빈(臏)이란 다리를 자르는 형벌의 이름이다. 지금 귀곡자가 손빈(孫賓)을 손빈(孫矉)으로 고쳤으니, 제자의 다리가 잘리는 일이 있을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천기를 누설하려 하지 않았다. 이 어찌 이인(異人)이 아닐 수 있겠는가?

다음 같은 염옹(髯翁 수염을 기른 노인이란 뜻)의 시가 있다.

산꽃을 손에 들고 길흉을 아니
시초점이나 거북점보다 더욱 영험하구나
가소롭구나 오늘날 점 치는 사람들아
부질없이 귀곡자를 팔아 점괘나 그리고 있구나

山花入手知休咎
試比蓍龜倍有靈
卻笑當今賣蔔者
空將鬼谷畫占形。

떠날 때에 귀곡자는 또 비단 주머니 하나를 주며 말했다.

“반드시 위급한 처지에 빠졌을 때 이 주머니를 열어보거라.”

손빈은 이에 스승에게 절을 올리고 위왕의 사신을 따라 산을 내려와 수레에 탔다.

(3) 귀곡자가 점을 친 원리 탐구 

매번 이 두 단락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필자는 귀곡자의 묘수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에 실제로 선생의 점이 진실로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방연이 위나라를 섬기다 죽음을 받을 것을 예측했는데 꼭 12년 만이었으므로, 열두 송이의 꽃이 피어 번영한 모양과 들어맞았고, 방연이 손빈을 괴롭혀서 발이 잘리는 형벌을 당했는데, 나중에 손빈의 묘책에 의해 수습되었으니, 바로 선생이 말한 “반드시 남을 괴롭히는 일로 남에게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는 말과 맞아 떨어진다.

방연이 위나라에 들어가가 상국(相國 재상) 왕착(王錯)이 혜왕(惠王)에게 그를 천거했다. 방연이 입조할 때 혜왕이 마침 양찜을 먹으려고 했으니, 이른바 ‘양을 만나면 영광스럽다’고 한 것이다, 마릉도에서 복병을 만나 화살을 맞고 죽으니 역시 ‘말을 만나 병든다’는 것이다.

손빈의 벼슬길도 선생이 한 말 그대로였다. 군더더기는 말하지 않겠다.

헤어질 때 선생은 비단 주머니를 주면서 위급할 때 “열어보라”고 당부했는데, 바로 손빈이 방연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열어 보니 “미친 척 가장하라(詐瘋魔)”였다.

말하자면, 선생이 비단 주머니를 준 것은 한편으로는 손빈을 도왔지만, 사실 방연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 것이니 바로 남을 속이는 일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사람에게는 각자 명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제 밖의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귀곡자는 산꽃 한 송이에 의지해 그렇게 신기하게 두 제자의 앞날과 운명을 설명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방법은 ‘역경’이나 ‘팔괘’, ‘오행’도 아닌데 도대체 어느 가의 셈법인가? 왜 신기하게 정확한가? 현기(玄機)는 어디 있는가? 도리는 어디에 있는가? 요즘 말로 표현해서 원리는 무엇인가?

‘천기’는 괘를 구하는 자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운명인데 다시 말해 생명의 암호라 할 수 있다. 천기는 바로 우주의 다른 층차와 다른 공간의 진상이다. (‘천기’는 ‘현기’가 아니다)

귀곡 선생의 산법의 이치가 어디에 있는지 그 원리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아무리해도 알 수 없어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다른 글을 쓰면서 홀로그램 이론(全息論 옛날 사람들의 천인합일 우주관)이 떠올랐고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홀로그램 이론은 현대 명사이다.)

인체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매 사람은 각자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국부(局部)에는 사람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세포에는 반드시 사람의 모든 정보가 있어야 한다. 홀로그램 이론은 정태적일 뿐만 아니라 동태적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은 전 과정의 변화 과정을 내포한다! 마치 고정된 기울기가 있는 기울기(직선: y=kx, k는 기울기, x는 독립 변수, 시간을 나타낼 수 있음) 와 같이 작은 부분을 잘라내면 전체 법칙을 나타낼 수 있으며 탄도 곡선도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있다. 사물의 발전은 규칙적이다.

그런데 왜 점을 치려는 본인이 직접 산꽃을 찾게 했을까. 바로 본인의 정보를 빼내는 것이다!

정태적인 것은 손빈과 방연이 각각 올린 산꽃가지이고, 동태적인 것은 꽃을 찾는 과정에서 당사자의 모든 거동과 행위이다.

산꽃의 속성, 특성 및 습성은 당사자의 특성을 반영한다. 동태의 모든 움직임과 변화는 발전 과정이며 당사자의 향후 미래 전망이다!

우리는 먼저 동태를 살펴보자. 방연의 행동은 6월 무더운 날, 꽃을 찾을 때 마두령을 하나 찾았는데, 그것이 “큰 그릇이 아니라며”이 땅에 버려졌고, 또 오랫동안 찾았지만 성과가 없어서, 다시 돌아가서 이전에 찾은 꽃을 소매에 숨겼다. 꽃은 이미 햇볕에 시들었다. 돌아와서 사부님께 꽃이 없다고 속였다가 들통이 난다. 이것이 바로 방연이 남을 업신여기는 상이다. “귀곡+에서 채집하고(采於鬼谷) 해를 보고 시들었다(見日而萎)고 했으니 ‘鬼+委’가 되면 곧 위(魏)가 되니 그는 분명 위나라에서 벼슬길에 나설 것이다.

정태적으로 보자면, 그 마두령은 열두 송이 꽃이 피니 꽃이 핀것은 번영하는 것이라 방연이 열두 해 동안 번영할 것이다.

‘양을 만나면 영광스럽고 말을 만나면 병든다’는데 대해 나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계절로 따지면 마침 6월에 방연이 출산했는데 6월은 지지로 따지면 ‘미(未)’로 즉 미월이다. 미는 양에 속하므로 ‘양을 만나면 영광스럽다’가 된다.

그럼 ‘말’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마두령이라는 이름의 식물은 꽃이 피면 마치 마두령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두령이란 바로 말 목에 거는 반원형 방울이다. 이것이 바로 이 꽃이 최종적으로 열매(實)를 맺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말을 만나면 병든다고 했다.

또, 《동주열국지》에 따르면, 방연이 죽었을 때는 주현왕 18년 겨울인데, 그것은 기원전 351년, 경오년으로 바로 말띠 해였다. 반대로 12년을 거슬러 방연이 하산하여 위를 섬긴 때는 기미년(己未年)으로 양띠 해였다! 어찌 양을 만나면 영광이고, 말을 만나면 병들지 않겠는가! 물론 선생은 이미 결말을 보았기 때문에 뚜렷이 말하지 않았다.

선생이 손빈에게 산꽃 한 가지를 가져오라고 하여 점을 치려고 했다. 이때 9월은 절기로 한로(寒露)이고 서리가 내리는 절기인데, 공교롭게도 선생의 책상 위에 있는 꽃병에 노란 국화 한 가지가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뽑아 올렸고, 즉시 병으로 되돌려놓았다’고 했다.

병 속의 꽃은 이 꽃이 이미 부러졌음을 나타내는데(하지만 방연은 ‘뿌리째 뽑았다’), 손빈이 하체를 망가뜨릴 것이라는 징조가 아닌가? 그러나 국화는 추위에 잘 견디고 서리에도 죽지 않기 때문에 큰 피해는 없다. ‘공양병 속에 들어 있었으니 사람이 아끼는 것’은 쇠로 만든 병이며, 대개 큰 그릇에 속하며 반드시 광화(光華)로 둘러싸여 명성을 떨칠 것이다.

여기서 “다시 뽑혔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승진”처럼 좋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좋지 않다. 이것은 식물이니 뽑히면 흙을 떠난 상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로 단정한 것이다. “여전히 병으로 돌아가면, 다시 흙으로 돌아오고 재배되는 상이다. 그러므로 공명은 고향땅에 있다고 단언했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국부가 전체이다! 그래서 귀곡 선생은 당시 당사자의 ‘선택과 움직임’을 관찰하여 귀납한 판단은 바로 제자의 특질과 전 과정이었다! 다른 사람의 점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홀로그램론'(‘천인합일’)의 우주관이 바로 점술의 근본 원리다!

(4) 신은 무엇을 줄지 아신다

아마 어떤 사람은, 사람의 정보가 많은데 왜 그런 것만 표현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 확실히 이런 것들을 표현했고, 귀곡 선생은 표현된 모든 정보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때 방연이 앞날이 어떠냐고 물었고, 손빈도 떠날 때 선생이 그를 예측해 주었다. 이것은 ‘천기’를 묻고 하늘에 묻고 있는 것인데, 제자와 선생은 모두 이 일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관련 정보가 활성화되거나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정보는 드러날 필요가 없고, 표현된 정보는 모두 측정과 관련되어 낭비가 없다. 즉, 신(神)은 어떤 정보를 주어야 하는지 아신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점을 물었을 때 생각이 특정 주파수를 내면서 관련 우주 물질과 공명을 일으키며 그렇게 하여 효과가 생겨서 튀어나와서 작용하게 된다. 그래서 피험자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안 되고, 그렇게 표현하게 된다.

옛사람들이 ‘움직임이 없으면 점을 치지 않고, 묻지 않으면 점을 치지 않으며, 어떤 일이 없으면 점을 치지 않는다’고 한 것도 아마 이런 이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 문장을 통해 필자도 좋은 현상을 말하고 싶다. 솔직히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어떤 방면의 인식은 미성숙하고 심지어 물음표가 있었지만, 글쓰기가 지속되고 수정됨에 따라 며칠 동안 자주 영감을 받아 문제를 해결했고 사로(思路)가 열렸는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이 꽃이 다시 뽑혔으니 일시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는 선생의 판단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문제를 몇 번이고 되짚어보다가 문득 알고 보니 꽃이 뽑힌 것이 좋은 일이 아니라 흙을 떠나는 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것들이 이런 식이었다. 나는 이것이 고층의 지혜로운 조언이라는 것을 안다.

(5) 귀곡자의 점은 어떤 유형에 속하는가?

그렇다면 귀곡선생의 점은 어떤 유형에 속하는가? 그것은 ‘취상취의(取象取意 상을 보고 뜻을 취하는)’ 점법에 속하며, 이는 선생의 점을 보는 과정에서 이미 밝혀졌다.

(6) 결말

귀곡선생이 신처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던 이유를 고찰해보면, 첫째, 선생은 그 시대의 사람이었고, 사회 환경과 문화는 모두 전통적인 “반신(伴神 신을 동반한다는 의미)”의 환경과 문화였다. 선생은 경서를 충분히 읽었고, 경력이 풍부하고, 이론이 전면적으로 깊었으며(또한 독특한 연구 저술이 있었다), 나이가 비교적 많았다.(당시 200여 세) 또한 산중에서 정심하게 연마하고, 수행하여 그 제자가 나가서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선생은 이 산을 두루 다니며, 특히 각종 화초와 나무에 대해 손바닥 보듯 알고, 그 습성을 연구하며, 인정에 대해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산꽃으로 점치는 법”을 독창적으로 만들어냈다.

셋째, 제자에 대한 이해가 깊다.

넷째, 선생은 오랜 세월 동안 조용히 수행하며 어려서 세상에 들어가, 고도의 산술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능이 이미 보통이 아니며, 이미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등의 공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보고 안 것을 제자에게 분명히 말해줄 수 없었고, 천기를 곧바로 누설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그걸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데는 어느 정도 조건이 갖춰져야 했다.

귀곡 선생과 공자는 ‘동년배’에 속하는데 나이 차이도 별로 없다. 유가의 대표적 인물인 공자(기원전 551년~479년)는 향년 72세였다. 귀곡자가 세상을 떠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200세 이상이다.

노자는 위 두 사람보다 조금 앞서는데 세상을 떠난 연도는 알 수 없고 한때 조정에서 관리로 일했다.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160여 세, 혹은 200여 세를 살았다고 한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귀곡자보다 20살 정도 나이가 많지만 같은 시대에 속하는 사람인 것 같다.

위의 연령 분석을 바탕으로 귀곡자 사상은 노자의 영향을 그리 받지 않았고 공자의 사상은 더더욱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그는 스스로 체계를 형성했다. 귀곡자의 저서인 《귀곡자(鬼谷子)》(또는 《패합책(捭闔策)》이라고도 함)에서 대략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노자 및 공자와 비교해 보면, 귀곡자는 은사(隱士)라고 부르는 것이 명실상부하다. 귀곡자도 인품을 매우 중시했다. 자신이 주석한 《손자병법》을 방연에게 가르치지 않고 충후한 손빈에게 가르쳤다. 그는 방연이 “좋은 선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책을 얻은 자가 선용(善用)하면 천하의 이익이 되지만, 그것을 선용하지 않으면 천하의 해가 된다”고 말했다.

오늘날 공산 사령이 붙은 중국 공산당은 “과학을 숭상하고 미신을 반대한다”며 전통문화를 악랄하게 비판하고 헐뜯으며 무신론・진화론을 설파하고 당, 단, 대원들을 묶고 세상 사람들을 독해하는 것은 사람더러 신(神)과의 연결을 차단시켜 신에게 죄를 짓게 만들어 사람을 심연(深淵)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오천년을 전승해 온 전통문화가 무너지면 사람도 위험해진다.

이 글은 단지 개인의 관점을 서술했을 뿐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9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