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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의 다자녀 허용에서 생각난 것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1980년 9월 25일,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은 당원 및 단원들이 앞장서서 “한 부부에 한 아이만 낳을 수 있다”는 명령을 앞장서서 집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바로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산아제한의 시작이었다. 이후 양심을 저버린 참혹한 낙태 사건이 전국 도처에서 발생했다. 이후 40년 동안 낙태로 사망한 아이의 수는 약 3억 3천만 명에 달한다. 이는 중국 5천년 역사상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인구 위기와 고령화의 위험에 직면한 중공이 갑자기 2자녀 3자녀 정책을 낳을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사람들더러 더 많은 아이를 낳도록 장려하고 있다. 과학이며 인성(人性)은 아예 중시하지 않는 중공은 인류의 생명을 마치 손 안의 장난감처럼 여기면서, 마음대로 조작하고, 멋대로 백성을 잔혹하게 박해했다.

여기서 나는 내가 직접 겪은 한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1985년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내 몸에 병이 나서 요녕성 금주(錦州) 부속 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4인실에 입원했는데, 내 맞은 편 침대에는 한 여인이 기관을 절개해 튜브를 삽입한 채 숨을 쉬었는데, 병세가 매우 위중했다. 당시 식당에 가서 밥을 사서 먹으려면 식량표가 있어야 했고, 환자나 가족에게는 매번 죽 한 그릇과 꽃 빵 한 개만 팔았다.

그녀의 집은 수중(綏中) 농촌이라 식량표가 없었다. 때문에 성이 정(丁)씨였던 그녀의 남편은, 1미터 80센티미터의 건장한 몸에, 하루에 겨우 꽃 빵 하나만 먹으니 배가 고파서 견디기 힘들었다. 며칠 입원하면서 친해진 후 나는 그를 정 오라버니라 불렀다. 당시 남편이 근무하는 직장이 병원 근처에 있었다. 나는 남편더러 매일 점심 직장에서 쌀밥으로 도시락을 만들어 오라버니에게 드리게 했다. 그는 이 도시락을 점심과 저녁 두 차례 나눠 먹으며 배고픈 문제를 해결했다.

그때 나는 양곡점에서 일했기 때문에 우리 집은 식량에 대한 문제는 없었다. 정 오라버니의 아내가 걸린 병은 길리안바레 증후군이었다. 이 병명은 외국인 의사 두 명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환자가 아주 희소했다.

어느 날 내가 오라버니에게 물었다.

“언니는 어쩌다 이 병에 걸렸어요?”

그가 대답했다.

“우리 농촌에서는 힘든 농사를 짓는데 위로 딸만 둘이 있어. 아들이 하나 있어서 나중에 집에서 힘든 일도 해주길 원했지. 그 시절에는 둘째도 낳지 못하게 했는데 우리는 셋째였지. 임신한 후 흑룡강성 언니네 집에 갔다가 10월 산달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지. 그때 공산당에서 누가 아이를 가졌는지 신고하라고 했어. 이웃 사람이 아내의 배가 부른 걸 보고 바로 대대에 신고했어. 대대장과 부녀주임은 트랙터를 몰고 바로 우리 집에 왔지.

다짜고짜 임신 9개월 된 임산부를 끌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임산부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지. 내가 애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내를 현지 병원으로 끌고 가서 유산시키려 했어. 현지 병원에서는 자신들은 9개월 된 태아를 사산시킬 기술이 없다고 해서 다시 금주 부속병원으로 보냈어. 이때 담당 의사는 이미 퇴근했고, 일단 산모를 먼저 입원시켰는데 다음날 9시에 수술한다고 했어.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아내 혼자 아이를 낳았어. 아주 통통한 아들이었지. 나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밤새 아이를 고향에 돌려보냈어.”

다음 날 오라버니가 병원에 돌아왔을 때 산모는 놀라움과 추위, 그리고 여행 중의 피로 때문에 생명이 아주 위독했다. 아내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오라버니는 집안에 있던 모든 것(돼지·소·TV 등)을 팔아야 했고 때문에 밥값조차 없었던 것이다.

나는 입원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퇴원했다. 퇴원할 때 오라버니는 우리 집 주소를 적어 놓았고, 내가 퇴원한 후에도 남편이 열흘 동안 밥을 배달해준 후 그들도 퇴원했다.

설 쇠기 전 어느 날, 나는 마침 집에서 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대문 밖에 옷차림이 남루한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누가 동냥하러 온 줄 알았다. 그때 어머니가 마침 우리 집에 계셨는데 “뭘 좀 주거라.”라고 했다. 내가 대문에 나가서 보니 바로 정 오라버니였다. 등에는 뭔가 물건을 메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모자 상태를 물어보니, 오라버니는 둘 다 죽었다고 했다. 아이 할머니가 아이를 거뒀는데 5개월밖에 살지 못했다고 했다. 두 사람의 소중한 목숨이 공산당에 의해 잔인무도하게 사라진 것이다.

나는 오라버니를 우리 집에 붙잡아두고 설을 쇤 후 가게 했다. 그해 여름에 오라버니가 또 찾아왔는데 큰딸이 모내기를 하다 독사에 물려서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했다. 무슨 약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형편이 어려워 살 돈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많은 약을 사서 오라버니에게 주었다. 그해 9월 우리는 고층건물로 이사했고 그 후로 더는 연락이 없었다. 어느덧 36년이 흘렀는데 정 오라버니와 딸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당시 오라버니는 겨우 삼십대였다.

오라버니 가족들이 겪은 고난을 돌아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흘러내리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다. 둘째를 절대 낳지 못하게 했던 그 시절, 나는 20대 젊은 엄마들이 소나 말처럼 불임수술을 강요당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소위 계획출산 정책은 중국의 인구 불균형과 남녀인구 불균형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인구위기와 고령화를 초래했다. 어떤 학자들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노인 인구의 4분의 1이 중국에 있다고 한다. 특히 중공은 사람 목숨과 관련된 중국 전통의 이념을 뒤엎어 사회 전체가 더는 사람의 생명을 중시하지 않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피를 흘리거나 죽는 것에 대해 매우 무감각해졌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람의 도덕을 몰락시켜 인심이 옛날과 달라진 것이다.

나는 지금 일흔이다. 우리 집도 줄곧 중공의 폭정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내가 두 살 때 아버지는 우파로 몰려 노동교양소에 보내졌고, 나 또한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노동교양소에 보내졌다. 하늘은 중공의 잔인한 만행을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이 중공을 멸망시키는 큰 막이 이미 올랐다. 부디 중국인들이 중공의 사악한 진면목을 똑똑히 보고 중공 관련 조직에서 빨리 탈퇴해 중화민족이 다시 태어나는 그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