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진(李道真)
【정견망】
16. 서방 대도(西方大道)
동방과 서방의 문화 차이는 대단히 큰데, 그것들의 기점(基點)과 발전 방향이 서로 달라서 하나는 표(表 서방)가 되고 하나는 이(里 동방)가 된다. 서방문화는 사람의 표면 물질세계에서부터 발전하고 인식한 것이라 기점이 낮고 사람의 표면문화에 속하기에 내함(內涵)이 그다지 많지 않다.
반면 중화문화(中華文化 동방문화)는 직접 인체, 생명, 우주를 연구한 것으로 표면에서 보이지 않는 심층(深層)의 층면을 겨냥해 연구하기에 기점이 매우 높아서 표면세계에 대한 인류의 인식을 훨씬 뛰어넘어 사람의 표면이 아닌 배후의 내함에 중점을 둔다.
앞에서 우리는 중화문화와 역사의 관점에서 치국(治國)의 도(道)가 발전한 과정을 체계적으로 논의했다면, 앞으로는 서방 문화의 각도에서 다시 한 번 치국의 도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이 문장을 볼 때 본 시리즈 제7편 ‘도가치국’을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된다.
앞에서 우리는 도가의 치국에 대해 논의했는데, 서양 문화 체계에서 중국 도가에 대응하는 것이 바로 철학(哲學)이다. 이는 동일한 사상 체계가 부동한 층면과 부동한 문화 속에서 부동하게 표현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노자(老子)와 동시대 사람으로, 많은 학자들이 서방의 소크라테스가 동방의 노자에 상당한다고 여긴다. 필자가 보기에 확실히 그렇다. 그들은 각각 동방과 서방의 대도(大道)며, 동서방 문화 중에서 비슷한 지위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주로 고대 그리스의 대성인(大聖人)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사상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소크라테스 이전까지 고대 그리스 철학의 방향은 주로 세계의 본원적인 구성에 대해 연구했다.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해서 철학의 방향이 세계 연구에서 자아 연구로 변했다. 그는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과 추구는 무궁무진(無窮無盡)하고, 외부 세계는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에 인류가 여기에서 얻는 지식 역시 불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확실하고 완벽하며 누락이 없는 영원불변한 진리를 추구했는데, 이는 외부 세계에서는 구할 수 없고 반대로 되돌아와 자신에게 구하고 자아를 연구해야만 궁극적으로 정확한 인지(認知)를 찾을 수 있다.
노자는 인간세상을 떠나기 전에 총총히 오천언(五千言)을 남겼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아무런 문자도 남기지 않았다. 그에 관한 사상은 모두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이 회억한 것을 기록해 만든 것들이다. 하지만 회상 과정에서 편차가 생길 가능성이 아주 큰 데다, 제자들이 또 종종 기록할 때 소크라테스의 말속에 자신의 생각을 섞어 넣어 소크라테스의 원뜻을 왜곡시켰다. 특히 가장 주요한 기록자 플라톤이 그런데, 후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뜻을 똑똑히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소크라테스는 서방의 대도(大道) 성인이다. 그가 서방세계에 남겨준 것은 생명이 되돌아 승화해 신(神)으로 수련 성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야말로 서방 대도라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것은 중국에서 노자가 남긴 것과 비슷하지만 동방과 서방의 문화 층면이 다르기 때문에 표현 방식이 달라서 곧 철학이라 부른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진정한 것은 바로 그의 ‘정신적 산파술’인데, 이것이야말로 서방 철학의 진정한 수련방법이자 생명이 되돌아 승화할 수 있는 길이다.
소크라테스의 모친은 산파로, 다른 사람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특수한 방법을 통해 다른 사람이 정확한 생각을 갖도록 유도하고 그를 도와서 진리를 인지하게 했는데 그는 이를 가리켜 ‘정신적 산파술’이라 불렀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변론하며 문제를 토론할 때, 당시 다른 소위 ‘소피스트(현자)들’처럼 자신의 지식이 얼마나 풍부하며 지혜롭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문제를 제기한 사람에게 오히려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이 그의 질문에 대답할 때 그가 한 대답에 대해 차근차근 캐묻고 반문함으로써 서로 모순에 도달하게 함으로써 상대방 스스로 황당함을 깨달아 잘못된 인식을 포기하게 했다.
최후에 이르러 소크라테스는 끊임없는 계발과 유도를 통해 상대방이 궁극적으로 정확한 관점을 말하게 함으로써 영원불변하며 정확한 진리를 도출하게 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이 궁극적으로 정확한 관점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속에 원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며 그는 단지 질문을 통해 상대가 이런 정확한 관점을 찾아내고 명확히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이 진리를 알도록 이끄는 자신의 이런 유도 방식을 가리켜 ‘정신적 산파술’이라 불렀다. 이것은 사실 서방의 도가 수련방법인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 설명을 읽어보기 바란다.
정신적 산파술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한데, 바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지(無知)의 위치에 두어야 하며 반드시 자신의 무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여기에 담긴 함의는 아주 큰 것이다. 일반인들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무지하다고 인정한 것을 그저 겸손한 것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허위적이고 교활한 궤변 수단이라 여기지만, 사실 세상 사람들은 그 배후에 담긴 진정한 내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성인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한다.
앞서 시리즈 제7편 도가치국에서 우리는 도가의 치국 사상에 대해 언급했다. 인류의 지혜와 인식은 모두 상생상극 기제(機制) 속에서 생성된 것으로 모두 정반(正反) 양면이 일체로 나온다. 즉 선(善)한 편이 있으면 동시에 악(惡)한 편이 있고, 성실한 이가 있으면 동시에 기만적인 이가 있고, 위가 있으면 동시에 아래가 있는데, 이렇게 되지 않으면 만들어낼 방법이 없다. 만약 완전히 부면(負面)적인 요소를 제거해 사회를 가장 완벽하고 조화로운 상태로 되돌리려면 그럼 반드시 상생상극 속에서 후천적이고 인위적으로 형성된 각종 지혜와 인지를 버리고 도(道)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도가치국이 걸어간 길이다.
왜 《성경》에서는 사탄이 뱀으로 변신해 하와를 유혹해 지혜나무의 열매를 훔쳐 먹게 했으며 또 이로 인해 아담과 하와가 선악(善惡)을 분별하는 지혜를 갖추게 되자 하나님이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냈다고 말하는가?
하나님이 만든 백인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원래 에덴동산에서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살고 있었으며 그곳은 고통이 없고 자유자재하며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사실 가장 초기 인류가 도(道)속에서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무위(無爲)의 다스림 하에서 가장 조화로운 생활 상태였다. 그러나 사탄이 하와를 유혹하고, 하와가 아담에게 지혜의 나무 열매를 먹도록 부추겼을 때, 그들은 곧 사람의 ‘지혜’가 생겨나 선악을 구별할 수 있었다.
지혜의 열매를 훔쳐 먹기 전에 그들은 선악에 대해 몰랐는데, 왜냐하면 그 때 그들은 선천적으로 순진무사(純真無邪)한 상태에 처해 있었고, 도(道)속에 있어서, 늘 도(道)속에서 본성에 따라 행동했기에 악(惡)이 없었다. 때문에 선(善)이 있는지도 몰랐으며 본성은 오히려 지극히 선했다. 이때 선은 모든 악의 요소를 제거했고 도(道)속에 숨어 이름도 없었기에 악이 생겨날 곳이 없었다. 즉, 무명(無名)의 선(善)이자 지극한 선(至善)이었다. 그러므로 이때 그들의 본성은 지극히 선해서 선악을 몰랐고, 순진무사(純真無邪)해서 아무런 오염도 없었다.
지혜의 열매를 먹고 사람의 지혜가 생겨나 선악을 인지할 수 있게 된 후부터 아담과 하와의 심령은 이미 타락했고 오염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원래의 선천적으로 순진(純真)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고 이미 대도에서 벗어났다. 이에 원래 가장 행복하고 조화로운 상태가 깨져버렸고 그들은 더 이상 순결하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살 자격이 없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 환경이 열악한 지상으로 내보내 살아가게 했고 그들의 심령을 깨끗이 씻고 다시 도(道)속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그들을 행복하고 아름다운 신(神)의 나라로 돌아올 수 있게 했다. 이것은 사실 치국의 도가 발전한 과정을 축소시켜 보여주는 한 차례였다.
대체로 정법(正法)과 정도(正道)는 그 목적지가 다 같은 것으로, 가는 길은 달라도 같은 곳으로 돌아간다. 성인 소크라테스가 인류에게 남긴 정신적 산파술 역시 같은 도리(道理)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더러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고 스스로를 무지의 위치에 놓게 한 것은 사실상 바로 인류가 후천적으로 타락하는 과정에서 상생상극에서 생겨난 다양한 사람의 지혜와 인지를 포기하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혜는 진리가 아니며, 생명이 오염된 후 상생상극에 빠져 생겨난 것으로 불완전하며 오히려 사람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어 인류가 선천의 순진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인류가 진리를 인식해 대도로 되돌아가는 길을 가로 막아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조화로운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후천적으로 형성된 지혜와 인지를 포기하는 것이 진리를 얻고 대도로 되돌아가는 전제가 된다.
서방 철학 역시 줄곧 상생상극의 이치를 연구해 왔는데, 예를 들면 변증법(辨證法)에서 말하는 소위 대립과 통일은 상생상극에 대한 한 가지 논술이다. 소크라테스도 상생상극의 이치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다.
가령 플라톤이 기록한 《파이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여보게들, 사람들이 쾌감이라 부르는 감정은 참 이상하기도 하지! 쾌감은 그와 정반대로 여겨지는 고통과 놀랍도록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말일세. 한 사람이 이 두 감각을 동시에 느낄 수는 없지만 누가 둘 중 하나를 쫓아가 잡으면 그는 거의 언제나 다른 것도 잡게 된다네. 그것들은 마치 같은 머리에 달린 두 몸과 같다네.…중략…. 우리가 보기에 이 모든 것들이 그것들의 대립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선과 악, 공정과 불공정 등 수많은 대응하는 대립면이 있기 때문이라네.”
이것은 노자가 말한 상생상극과 의미는 같지만 단지 표현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진정한 대도진리를 얻으려면 반드시 인류가 후천적으로 상생상극에서 생긴 인위적인 지혜와 인지를 버리고 이러한 장애를 타파해야만 한다. 때문에 소크라테스 ‘정신적 산파술’의 전제는 자신의 무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후천적으로 형성된 모든 사람의 지혜와 인지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지는 사실 인류의 후천적인 지혜와 인지를 포기한다는 뜻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뜻이 아니다. 상생상극에서 뛰쳐나와야만 대도로 돌아갈 수 있고, 사람의 인지를 포기해야만 참되고 진정한 진리를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큰 지혜다. 그래서 신(神)은 세인에게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소크라테스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신탁한 것이다.
그렇다면 설마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만 하면 곧 대도 진리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는 단지 기본 전제일 뿐이다. 우리 다시 소크라테스의 정신적 산파법의 핵심을 다시 읽어보자.
소크라테스는 먼저 자신을 무지의 위치에 놓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청한다. 다른 사람이 그의 문제에 대답할 때 소크라테스는 그의 대답에 대해 차근차근 캐묻고 반문함으로써 상대방의 결론이 저절로 모순이 되고 흠집투성이임을 알게 만든다. 이를 통해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잘못된 인식을 버리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끊임없는 계발과 유도를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정확한 관점에서 말하도록 유도해냄으로써 이를 통해 영원불변하고 완벽한 진리를 도출해낸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사람의 지혜는 상생상극 속에서 후천적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완벽할 수 없고 허점투성이다. 왜냐하면 상생상극 자체가 바로 하늘만큼 큰 구멍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생상극에서 나온 지혜는 완벽할 수 없고 진리가 될 수 없다.
앞의 몇 장에서 우리는 상생상극은 사실 평형 위치를 벗어나고 대도(진리)를 벗어난 파동이며, 그 평형 위치야말로 완벽하고 흠이 없으며 영원불변하는 대도(大道) 진리이며, 상생상극은 대도 진리를 벗어난 후의 파동이라 그 자체가 하나의 허점이라고 설명했다. 단지 인류는 늘 상생상극 속에서 물결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누구도 이 구멍을 볼 수 없을 뿐이다. 이를 대상무형(大象無形 큰 상은 형상이 없다)이라고 한다.
사람의 지혜는 상생상극의 산물이기 때문에 범인(凡人)의 지혜에는 모두 구멍이 있다. 대도(大道) 성인 소크라테스는 인류의 후천적 지혜와 인지를 버리고 상생상극에서 뛰쳐나와 대도 진리의 층면에 섰기 때문에 인류 지혜의 모든 빈틈을 통찰할 수 있었다. 때문에 캐묻고 반문하는 과정을 통해 그 누구의 결론도 스스로 모순되게 만들어 허점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자신의 잘못과 오류를 깨닫게 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인지를 바로잡게 만든다. 최후에는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인도를 거쳐 사람의 사유가 진리의 방향으로 발전하게 하고, 바로 잡게 만들어 마침내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데, 완벽하고 영원히 정확한 결론을 도출하게 한다.
이 과정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후천적으로 형성된 잘못된 관념과 인지를 포기하고 바로잡는 과정으로, 결국에는 진리를 알고 대도로 돌아가게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또한 생명이 되돌아 승화하는 것이자 반본귀진(返本歸真)의 과정이다.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남긴 정신적 산파술은 사실 서방 철학의 수련방법이며 서방 철학은 사실 서방의 도가 수련법문이다. 도가(道家)는 낮은 층차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사용할 수 있고, 고층차에서는 생명이 되돌아 올라가 신(神)으로 수련 성취할 수 있게 하는데, 서방 철학 역시 마찬가지다.
원문위치: https://zhengjian.org/node/263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