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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명작 시해(試解) 2

곡우(穀雨)

【정견망】

만약 《삼국연의》가 ‘의(義)’라는 한 글자로 천고를 관통시켰다면, 특히 후인들에게 ‘의(義)’에 담긴 함의가 무엇인지를 알려줌으로써 심층(深層)의 문화를 표현하고 사람의 사상을 풍부하게 했다.

그렇다면 《수호전(水滸傳)》은 여러 강도들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내 사람들에게 “도적에게도 도(道)가 있음”을 알려준다.

강도에게 “비석을 세우고 전기를 써주는” 것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일부 강도들에 대해서는 민간에서 수백 년간 전해 내려온 전기(傳奇)가 있어서 민중들이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럼 왜 강도에게 “비석을 세우고 전기를 써주게” 되었을까? 이 안에 담긴 역사적 연원은 무엇일까? 후인들에게 설마 이런 강도행위를 본받으란 말인가? 우리는 여전히 적당히 얼버무려 대답할 수 없다.

우리 한번 각도를 바꿔서 문제를 보자. 사람에게는 선(善)과 악(惡)이 함께 존재하는데, 이는 독립적인 개체 생명에서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이치가 반영된 것이다. 상생상극은 모든 것을 제약하며, 모든 것은 또 상생상극을 나타낼 수 있다. 수련의 각도에서 보자면, 사람에게는 불성(佛性)과 마성(魔性)이 있는데, 인간 세상에서 표현되는 것은 단지 선악(善惡)과 좋고 나쁨이다.

단지 사회도덕과 윤리가 사람들더러 각자 악을 누르고 선을 행하며 각자 편안히 자신이 맡은 일을 하도록 요구할 뿐이다. 반대로 인류의 패괴(敗壞)는 매 사람에게 해를 끼치며, 인류의 죄악은 사람에게 너무 일찍 자신을 도태하게 만든다. 중국 고대에는 깊은 내포와 현묘한 이치를 지닌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우주관이 있었는데, 사실 이 역시 인생관과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에 있다.

기왕에 ‘악’이 사람이 본래 지닌 것이라면, 사람이 사회에서 하는 모든 것은 선악과 관련이 있다. ‘악의 억제’는 필연적이며 이는 도덕적 차원의 요구이다. 단독으로 ‘악(惡)’만 말하자면 또한 악으로 악을 다스리는[以惡治惡] 내포도 있다. 그렇다면 ‘악(惡)’의 표현은 필연이 된다. 이성적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악’을 표현할 때도 마땅히 따라야 할 바가 있다.

“성(聖)·용(勇)·의(義)·지(智)·인(仁)”은 전국시대 강도의 대명사로 통했던 유명한 강도 도척(盜跖)이 후대에 남겨준 강도의 ‘도(道)’다. 강도의 ‘도’를 떠나 사람이 ‘악’을 저지르면 곧 따를 ‘도(道)’가 없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수호전》에서 여러 강도들의 이야기를 전한 것은 이미 항간 백성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강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정의로운 강도가 이렇게 사람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광범위하게 생존할 공간을 찾아낸 것이다.

사람은 이성적이지만 또한 복잡한 것으로 때로는 사물에 대한 심리적인 수용과 실제 현실 사이의 간극이 매우 크다.

사람은 이규(李逵)의 천진하고 솔직하며 지극한 효도는 용납할 수 있지만, 살인하고 약탈하며 인육(人肉)을 먹을 때면 더는 이규의 인성이 어떻든 따지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십자파(十字坡)’의 장청(張靑)과 손이랑(孫二娘)의 협의(俠義)는 또 사람고기로 공방을 연 것에 대한 혐오를 심리적으로 차단했다.

왜각호(矮腳虎) 왕영(王英)의 호색과 고상조(鼓上蚤) 시천(時遷)의 좀도둑질은 ‘호걸(好漢)’들의 의협심 아래 일종의 양념으로 등장한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이해할 수 있는데 왜 이런 사람들을 위해 “비석을 세우고 전기를 써줘야 하는가?” 왜냐하면 이는 인류의 생존과 발전에 필요하기 때문인데 사람의 ‘악’ 역시 사람답게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잘 다스려지는 태평한 사회라면 이렇게 많은 강도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관(官)의 핍박을 받아 백성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말에도 아주 일리가 있다. 인류는 바로 이렇게 발전한 것으로 기복이 있고 흥망성쇠가 있다. 강도가 생겨나는 환경은 반드시 난세(亂世)인데 조정의 기강이 어지러운 것이야말로 강도가 자생하는 온상이다. 사람들은 탐관오리를 몹시 미워하는데 이는 어느 정도 민중들의 마음에서 일어난 반발을 반영한다. 이러한 의식의 표현이 바로 그들 마음속 ‘호걸’들이 백성을 위해 사납고 폭력적인 자들을 제거해 선량한 백성들을 편안히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호걸’들이 협의(俠義)를 행하는 방식은 오직 “악으로 악을 제압하는” 것뿐이다. 사람들에게 있어 ‘강도’에 대한 정의는 이미 자연스럽게 ‘호걸’로 변했다. 강도들의 모습을 그려낸 시내암(施耐庵)의 본래 의도는 이들을 정면적으로 묘사해 사람들 마음속의 ‘악(惡)’을 규범 하는 동시에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 경계로 삼게 하고 또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강도에 대해 하나의 완전하고 풍부하면서도 명확한 개념을 갖게 한 것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3/8/8/2777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