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天明)
【정견망】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중의의 병 치료는 기공 치료와 아주 가깝다. 중국 고대의 중의사는 기본적으로 다 특이공능이 있었다. 손사막(孫思邈)ㆍ화타(華佗)ㆍ이시진(李時珍)ㆍ편작(扁鵲) 등등과 같은 이런 대의학자들은 모두 특이공능이 있었는데, 의서(醫書)에 모두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흔히 이런 정화(精華)적인 것이 현재는 비판 받고 있으며, 중의가 계승한 것은 다만 그런 약 처방 또는 경험의 모색(摸索)에 불과하다. 중국 고대의 중의는 상당히 발달한 것으로서, 발달한 정도는 현재의 의학을 능가했다.”(《전법륜》)
사실 대부분의 중의사(中醫師)들을 포함해, 오늘날의 사람들은 고대 중의(中醫)가 어떠했는지 제대로 모른다. 중국 고대문화는 신(神)을 믿는 기초 위에 건립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신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공간을 보거나 만질 수 있음을 믿었다. 때문에 당시의 의술은 사람이 병에 걸리게 만드는 다른 공간의 영체(靈體)를 직접 겨냥해 손을 쓸 수 있었다.
가령, 인체의 경락과 혈위(穴位)는 다른 공간의 신체 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현대 의학은 아직까지도 그 속에 담긴 오묘한 이치를 제대로 모른다. 침구(鍼灸)의 본질은 바로 다른 공간에서 사람의 신체에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과거에는 한약의 원산지를 대단히 중시했고, ‘도지(道地) 약재’를 중시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지역의 지리적 환경에 따라 다른 공간에서 대응하는 물질장(物質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매 약재가 존재하는 환경에 따라 다른 공간의 영체에 대한 적응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대 중의사들이 한약을 사용해 병을 치료할 때, 실제로는 약재의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영체를 사용해 질병을 일으킨 다른 공간의 영체를 제약(制約)하는 것이다. 때로 한 가지 약재의 질병에 대한 제약력이 부족하면 여러 약재를 조합해서 사용했다. 고대에는 처방을 만들 때 약재를 배합하는 방식이 아주 엄격했으며 약초의 선택과 복용량을 아주 중시해서 ‘군신좌사(君臣佐使)’ 나눴고 “약을 쓰는 것은 마치 용병(用兵)과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른 공간에서는 아마 한 바탕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고대 명의들은 이런 것들을 잘 알았기에 약을 쓰는 것이 고명(高明)했고 환자에게 구태여 많은 약을 먹일 필요가 없었다. 요즘에는 진정으로 고명한 중의사가 많지 않기에 환자는 수십 첩에서 수백 첩의 약을 복용하지만 효과가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역주: 중의에서 말하는 한 첩은 우리나라와 달리 하루치를 말한다.]
과거에는 약재가 모두 자연산이라 때로 약초를 채집하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절벽에 올라가 채취해야 했다. 약초란 효과가 좋을수록 더 귀한 약재가 되는데 인삼(人蔘 역주: 산삼을 말함)이나 영지(靈芝)처럼 채취가 어려울수록 그것이 지닌 영성(靈性)과 능력은 더욱 컸다. 고인(古人)은 신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랐으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하지 않았다. 때문에 덕(德)은 크고 업력이 작어서 병도 적었고 상대적으로 약물의 작용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무신론(無神論)을 주장하며 “사람이 하늘을 싸워 이긴다”고 외치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큰 업을 짓는다. 또 육도윤회(六道輪迴)로 끊임없이 전생(轉生)하면서 모든 물질의 업력이 다 아주 커졌고 얻는 병도 커졌으며 반대로 약재의 치료효과는 작아졌다. 이외에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환경을 너무 심하게 파괴해 점차 자연산 약초를 구할 수 없게 되었으며 대량으로 인공 재배를 하게 되었다. 이런 유위적인 행동은 생명의 특성을 위배한 것으로 겉으로는 동일한 약재처럼 보이지만 다른 공간에서는 오히려 차이가 아주 크기 때문에 치료효과도 단번에 떨어진다.
우리는 많은 고대 의서(醫書)에서 신적(神跡)에 관한 기록을 도처에서 볼 수 있는데 심지어 정사(正史)에서도 꽤 많이 볼 수 있다.
《사기・편작창공열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편작(扁鵲)은 발해군(渤海郡) 막읍(鄚邑) 출신으로 성은 진(秦)이고, 이름은 월인(越人)이다. 젊어서 남의 객사(客舍)에서 관리인으로 지냈다. 객사의 손님 중에 장상군(長桑君)이라는 은자가 간혹 머물렀다. 그런데 오직 편작만이 장상군을 특출한 인물로 여겨 언제나 그를 정중하게 대했다. 장상군 역시 편작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장상군은 그가 객사를 드나든 지 10여 년이 되었을 때 은밀히 편작을 불러 자기 앞에 앉히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비전(祕傳)의 의술(醫術)을 알고 있는데, 벌써 늙어서 그대에게 전해주려 하네. 그러나 절대 남에게 발설하지 말게나.’
이에 편작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장상군은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그 속에 든 약을 편작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 약을 복용할 때에 깨끗한 풀잎에 맺힌 이슬이나 빗물에 타서 마신 후 30일이 지나면 사물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된다네.’
그러고는 비전의 의서(醫書)를 전부 꺼내어 편작에게 주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아마도 보통 사람이 아닌 듯했다.
편작은 장상군의 말대로 약을 복용한 지 30일이 지나자 편작은 담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게 되었다. 이런 능력으로 병자를 진찰하니 오장(五臟) 속 병근(病根)이 있는 부위를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맥을 짚어서 아는 체 했다.”
말하자면 장상군은 편작을 10년 이상 관찰한 후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고 이에 금지된 처방과 비밀의 약을 그에게 전수하면서 ‘상지지수(上池之水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풀잎에 맺힌 이슬이나 빗물)’로 30일 동안 복용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편작은 그가 말한 대로 약을 복용한 후 벽을 투과해 사물을 볼 수 있었다. 그런 다음 그는 이 방법을 사용해 사람의 내장이 병든 상황을 보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진맥을 해서 아는 것처럼 가장했다.
-‘또 같은 편에서 중서자란 인물이 편작에게 하는 말을 통해 고대의 유명한 의사 유부(俞跗)의 뛰어난 의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옛날 유부라는 명의가 있었는데 병을 치료할 때 탕액, 예쇄(醴灑 약술), 참석(鑱石 돌침), 교인(撟引 기공), 안올(案扤 안마), 독위(毒熨 약 찜질)를 쓰지 않고 옷을 풀어헤쳐 잠시 진찰해보는 것만으로 질병의 징후를 보았고, 오장 수혈(腧穴)의 모양에 따라 피부를 가르고 살을 열어 막힌 맥을 통하게 하고 끊어진 힘줄을 잇고, 첫수와 뇌수를 누르고, 고황과 횡격막을 바로하고, 장과 위를 깨끗이 씻어내고, 오장도 씻어 정기를 다스리고 신체를 바꾸어놓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삼국지・방기전(方技傳)》에는 화타(華佗)의 탁월한 의술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마비산으로 환자를 마취시킨 후 외과수술을 했다. 2001년 6월 28일 중문 명혜망에 게재된 〈5,000년 전 산동에서 발견된 두개골 수술 사례(山東發現五千年前開顱手術實例)〉라는 기사를 보면 중국 고대의 의학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사료에 기록된 고대 신의(神醫)들의 병 치료에는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즉, 질병에 대한 진단이 신속하고 간결했으며 치료방법이 기이한 효과가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전공분야만 평생 공부하는 지금 의사들과 달리 그들이 장악한 기술은 아주 전면적이었다. 사실 그들은 모두 초상(超常)적인 공능을 갖고 있었기에 질병의 본질을 볼 수 있었고 각종 치료방법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것이다.
리홍쯔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중국 고대의 과학은 우리가 현대 서방에서 배운 과학과는 같지 않으며, 그것이 걷는 것은 다른 한 갈래 길로서 다른 상태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현재의 이런 인식방법으로 중국 고대의 과학기술을 인식해서는 안 된다. 중국 고대의 과학은 인체ㆍ생명ㆍ우주를 겨냥하여 직접 이것을 향해 연구했기 때문에 걷는 것은 다른 한 갈래 길이었다. 그때 배우러 다니는 사람은 모두 가부좌를 중시했으며, 앉는 데는 자세를 중시했고, 붓을 잡는 데는 기를 운행하여 호흡함을 중시했으며, 각 업종은 모두 마음을 깨끗이(淨心) 하고, 호흡 조절(調息)을 중시했는데 전반 사회는 모두 이런 상태에 처해 있었다.”(《전법륜》)
이런 상태는 수련 상태와 비슷한데 한 사람이 속인이란 가장 낮은 층차를 돌파해 속인의 층차보다 높은 곳에 서서 속인의 이치를 보면 자연히 분명해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가면 세상을 구하고 물러나면 사람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 고대의 유생들은 “훌륭한 재상이 되지 못할 바에야 좋은 의사가 되라”고 했다.
고대의 독서인들, 특히 의학을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주역》 연구를 중시했는데 원래 의학과 역학은 근원이 같아서 ’의역동원(醫易同源)‘이란 말도 있다. 우리는 법 공부를 통해 《주역》은 사전(史前)문명에서 남겨진 것으로 우리 은하계 범위 내의 이치를 말하고 있으며 이는 속인보다 높기에 자연히 사람의 의학에 대해 지도 작용이 있음을 안다.
고대에는 각종 다양한 업종에서 모두 ‘덕(德)’을 중시했다. 덕이 높고 성망이 높다는 단어가 있고,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들은 무덕(武德)을 말했고, 의술을 행하는 사람은 의덕(醫德)을 중시했다. 또 전승과정에서 “자격이 미달되는 사람에게는 전수하지 않는” 원칙을 강조해서 덕행이 좋고 오성이 뛰어난 도제(徒弟)를 찾지 못하면 차라리 관속에 가져갈지언정 함부로 전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반 사회의 도덕 수준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낮아져서 갈수록 많은 좋은 것들이 실전(失傳)되고 있다. 이것 역시 사실 사람의 도덕이 안 되어 신(神)에 의해 문명이 억제된 표현의 하나이다.
현대인들이 중의학을 공부하면 늘 너무 방대하다고 여기는데, 의서(醫書)가 너무 많아서 평생을 봐도 다 볼 수 없다고 여긴다. 아울러 몇 천 년 동안 수많은 명의들이 너무나 많은 주장을 내놓고 다양한 학파로 나뉜다.
현대인들은 고인(古人)의 정화적인 것들을 모두 어리석은 미신으로 간주하면서 그저 고인이 남겨놓은 약 처방과 경험 속에서 더듬으며 기어 다닐 뿐이다.
사실 일부 고대 의서에 기록된 처방은 아주 대단하지만 현대 의사들은 이미 더는 사용 방법을 모르고 여전히 고인들이 허풍을 떤다고 여긴다. 지금 세대는 이전 세대의 것을 전부 배우지 못했고 다음 세대는 또 지금 세대의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이렇게 점차 쇠퇴해져서 지금은 그저 일부 정화적인 것들이 겨우 민간에 좀 흩어져 있을 뿐이다.
지금의 중의 병원에서는 병을 진찰할 때 혈액 검사 소변 검사에 의존하고 수액을 사용하며 사진촬영에 의존하는데, 심지어 뼈를 바로잡는 정골(整骨)도 톱과 강철못을 사용해서 하며 큰 병의 치료 역시 주로 양방에 의존한다. 진단에 있어서도 갈수록 더 현대화된 기기에 의존하고 있다. 때문에 많은 중의사들조차 스스로 이도저도 아니라고 여긴다[역주: 전통적인 중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양의도 아니라는 의미].
다른 각도에서 인류 의학의 역사를 총괄해보면 인류는 늘 질병에 맞서 패배해 왔다. 사람들이 현존하는 질병에 대해 충분한 치료 기술을 습득할 때면 곧 치료할 수 없는 새로운 질병이 나타난다.
리훙쯔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우주 중에는, 불가(佛家)의 말에 의하면, 속인 중의 일은 모두 인연(因緣) 관계가 있어서, 속인들에게는 바로 이렇게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존재한다는, 이런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전에 나쁜 일을 하여 생긴 업력(業力) 때문에 병이나 마난(魔難)이 조성된다.”(《전법륜》)
때문에 사람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벗어날 수 없는데 다시 말해 사람은 영원히 질병을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속인을 뛰어넘는 것으로 신(神)이 사람의 업을 없애기 위해 배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