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우(穀雨)
【정견망】
《홍루몽》의 원래 이름은 《석두기(石頭記)》다. 독자들은 저자의 진실인 듯 환상인 듯한 필법 속에서 아마 대황산(大荒山) 무계애(無稽崖) 청경봉(青埂峰) 아래의 그 돌을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지난 2002년 귀주(貴州) 평당현(平塘縣) 장포향에서 돌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 위에 “中國共產黨亡”이란 6개의 큰 글자가 쓰여 있었다. 중국 과학원 전문가가 현장에 가서 조사한 결과 천연적으로 형성된 바위임이 증명되었다. 중공 CCTV도 이 기석(奇石)에 대해 보도했지만 마지막 ‘망(亡)’자를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아마 여러분 누구라도 《홍루몽》에 나오는 그 ‘통령보옥(通靈寶玉)’을 진짜가 아니라 ‘가짜’(假 賈와 통함)로 여기고 청경봉 아래의 그 돌 역시 그야말로 ‘황당무계(無稽)’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돌[역주: 귀주에서 발견된 장자석(藏字石)을 말함]은 오히려 정말로 실재하는 것이다.
수련의 각도에서 보자면 그들은 내재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조설근은 이미 천기를 꿰뚫어 보았고 ‘보옥(寶玉)’을 빌려 ‘통령(通靈 신령과 통한다는 의미)’하게 했던 것이다. 조설근은 사실 굳이 이 돌 이야기를 빌려 줄거리를 풀어내지 않더라도 책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돌은 책에서 그저 일종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 그것이 없어도 주지(主旨)를 표현하는 데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돌’에 대한 작가의 유별난 관심은 세간 만물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보통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그 의도는 오늘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장자석(藏字石)’에까지 미친다. 이는 단지 작가가 세간의 만상(萬象)에 통달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완곡한 예술적 수법으로 말법(末法) 시기에 세인들을 일깨워주고자 한 것이다.
사실 《석두기》에서 기록한 내용이 바로 ‘중국공산당망’이란 여섯 개의 큰 글자다.
조설근은 문장의 대가로 뛰어난 문필력으로, 돌에 대해 쓰면서 또 과거와 미래를 두루 관통시켰다. 여와가 하늘을 수선한 이야기, 즉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해 오늘날 ‘장자석(藏字石)’에 이르기까지 썼는데 바로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겁난[洪劫]이다.
그의 필법은 일실일허(一實一虛)해서 여와가 하늘을 수선하고 남은 돌[‘통령보옥’의 내력]에 대해 쓴 것이 실(實)이라면, 오늘날 드러난 이 돌은 책에서는 언급할 수 없으니 허(虛)가 된다. 오직 전반 역사의 본모습을 사실적이고 고도로 압축해 한 부의 작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대문호만이 이런 걸작을 창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한 글자도 쓰지 않고 풍류를 모두 얻었다(不著一字盡得風流)”고 할 수 있다.
《홍루몽》이 짊어진 역사적 사명은 오직 이런 결함이 있어야만 완전하다고 볼 수 있다.
중공이 가장 두려워하는 책은 바로 파룬따파(法輪大法) 경서들이다. 이 외에 《구평공산당(九評共産黨)》은 중공이 감히 입에 올리지도 못한다. 이로 인해 유발된 ‘삼퇴(三退)’ 물결은 그야말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켜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사대명작의 작가들은 모두 학식이 풍부하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통달했다는 점이다.
오승은은 고금의 천하의 일을 모두 참고해 책속에 오직 한 구절을 넣어놓았다.
조설근은 특히 말법(末法)의 현 상황을 꿰뚫어보았고 책의 ‘마지막 장면[殘局]’를 이용해 세인을 일깨웠으니 그의 의도는 바로 오늘날의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홍루(紅樓 직역하면 붉은 누각이지만 중공 공산정권을 은유한다)’란 바로 오늘날 사악한 공산당의 대하(大夏 큰 건물)를 말하고, ‘몽(夢)’이란 모든 것이 다 허환(虛幻이란 뜻이다. 중공의 역사와 현실을 보면 이 책에서 현기(玄機)를 얼마나 적절히 표현했는가!
‘홍루’에 빠져 ‘깨어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건물이 무너지면서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홍루’의 진상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홍루를 떠나 목숨을 부지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꿈에서 깨지 못한 사람들을 일깨워줄 사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수련인 뿐이다.
책에 굳이 한 승려[불가]와 한 도인[도가]이 시종일관 등장하는 것은 단순히 구성의 필요 때문만이 아니라 작가가 주지(主旨)를 표현하기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자 또한 구도 방식을 알려준 것이다. 즉 사람들에게 홍루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버리고 자연적인 본성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오직 오늘날의 수련인들 즉 대법제자만이 이런 임무를 감당할 수 있다.
꿈에서 깨어났는데 시간을 나눌 수 있는가? 《홍루몽》 문장이 80회에서 갑자기 중단되거 끝난 것은 바로 이런 함의를 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홍루몽》은 곧바로 일종의 예언서다. 다만 오직 특수한 때가 아니면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홍루몽》이 일깨우려는 것은 바로 아직도 ‘홍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오직 천상(天象)의 변화에 순응해 사악한 각종 중공 조직에서 탈퇴해야만 비로소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금은 사대명작이 깊이 감춰온 천기를 “누설”할 때가 확실히 되었다. 단지 지금 중공의 현 상황과 백성들의 생존 위기만 놓고 보더라도 중공이란 큰 건물은 이미 기울어졌다. 하지만 뒤따서 올 ‘하늘의 견책’은 아직도 그것에게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진실로 두려울 것이다.
또 우리가 전반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이란 입장에서 보더라도 사대명작의 탄생은 필연성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사회생활을 예술적으로 반영한 것에 불과한 게 아니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마음의 양식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중화문화 특유의 구성부분으로 전반 중화민족의 민족성을 형성하고 충실하게 했으며 중국인의 도덕관념・가치관・지향점 및 생활정서를 함양하는 방면에서 모두 적극적으로 이끌고 교화(敎化)하는 작용을 일으켰다.
종합해서 보자면 사대명작에는 이런 기능이 있다.
조금 더 분석해보면 두 가지 큰 방면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바로 ‘의(義)’와 ‘수련(修煉)’이다.
‘의(義)’의 표현에선 《삼국연의》와 《수호전》이 각각 다른 중점을 가지고 서로 어울리며 깊이를 더해준다.
‘수련’에 대한 표현에서 보자면 겉으로는 차이가 아주 크지만 실질적으로 이곡동공(異曲同工 곡은 달라도 교묘한 솜씨는 같음)의 오묘함이 있다.
《서유기》는 신화이야기로 수련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만들어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썼다.
또 《홍루몽》에서 쓴 ‘수련’은 극히 높은 ‘오’성이 필요하다. 사실 수련인이 가장 닦아버리기 어렵고 수련자가 가장 수련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정(情)’이다. 즉 가족간의 사랑, 남녀 사이의 정, 친구 사이의 정, 부모에 대한 정, 사랑과 미움, 기쁨과 즐거움 등이다.
그래서 《홍루몽》을 또 《정승록(情僧錄)》이라고도 부른다. 《석두기》를 베껴 쓴 공공(空空)도인은 “공(空)에서 색(色)을 보고 색(色)에서 정(情)이 생기며 정(情)을 전달해 색(色)으로 들어가고 색(色)에서 공(空)을 깨닫는다.[因空見色,由色生情,傳情入色,自色悟空]”고 했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홍루몽》의 주제는 이렇게 총결할 수 있다.
“인간 세상에서 ‘춘(春)’색(色)을 간파할 수 있다면 자연히 공문(空門)으로 들어간다.”
사대명작은 고금에 명성을 날리며 인류가 흥성했다가 쇠퇴하는 과정 속에서 어느 정도 인류 문명의 방향을 규범하고 이끌어 대법이 널리 전해지는데 특수한 공헌을 했다.
《삼국연의》에서 ‘의(義)’는 이미 사람이 지닌 특유한 내재적인 특성이 되었고, 《수호전》의 ‘호걸(好漢)’은 부면적(負的)인 방면에서 사람의 내심에서 감정의 응어리를 표현함과 아울러 사람에게 필요한 경고를 해준다.
《서유기》는 수련과 ‘정법’의 전달에 어느 정도 인도하는 작용을 했으며, 《홍루몽》은 인류 사회의 현실 및 필연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예술적으로 재현했다.
사대명작이 역사 깊은 곳에서 걸어 나온 것은 마치 역사라는 하늘에서 서로 어울려 찬란하게 빛을 내는 4개의 별처럼 세인들이 밝은 내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생생하게 계시해 준다.
(완결)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3/8/14/277733.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