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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중의(中醫) (하)

유선일(劉仙逸)

【정견망】

2. 독특한 중의

의과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임상에 종사하는 대신 의학기초 연구에 종사했다. 겉모습만 보면 중의(中醫)와는 갈수록 더 멀어져서 더이상 중의를 접하거나 사고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출국할 때 나는 침구와 안마(按摩)에 관한 중의학 교과서를 사는 걸 잊지 않았다. 나중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온 후 미국인들이 점점 더 침구를 받아들이고 있고, 이미 경혈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MRI를 사용해 검증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발견했다. 이 연구는 내게 중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왜 몇천 년 간 사용되어 왔고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한 침구학이 오히려 현대 의학에서 완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반드시 현대과학의 실험을 통해 확인받아야만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게 된 것일까? 대체 무엇이 사람의 눈에 씌워졌기에 몇천 년 간 사실로 존재해 온 것을 무시하게 만들었는가?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전법륜(轉法輪)》을 읽고 나서야 이런 의문들이 단번에 해결되었다. 중의가 걸은 길은 현대의학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현대인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사상이 복잡해져서 더는 진정으로 중의의 정수를 인식할 수 없게 되었으며 다만 경험의 모색과 수법(手法)의 운용만 중시할 뿐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중의의 독특함은 사람을 고립된 개체로 보는 게 아니라 하늘과 땅 및 주변 환경과 통일적으로 보는 것으로 다시 말해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중시한다.

이런 이념 하에서 중의의 병에 대한 인식과 치료방법은 현대의학과는 전혀 다르다. 다시 고대 명의들을 보면 선진(先秦)시기의 편작(扁鵲), 삼국시기의 동봉(董奉)과 화타(華佗), 당대(唐代)의 손사막(孫思邈) 등은 모두 특이공능을 지닌 수도인들이었다. 수련인이 어느 정도 경지까지 수련되면 다른 공간을 볼 수 있다. 때문에 인체 혈위(穴位)의 존재는 절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헛소리가 아니며 수련인이 직접 본 것을 그려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수련에 대해 믿지 않고 오직 현대과학만 믿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자면 이런 상(象)은 그야말로 아라비안나이트와 같을 것이다. 중의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 되는 것으로 중의의 정수를 인식하지 못하고 오해받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고인(古人)은 사람의 ‘덕(德)’을 중시했다. 한 사람의 좋고 나쁨 역시 덕을 표준으로 삼았으며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는 의사에 대해 말하자면 요구가 더욱 높았다. 중의에서 망문문절(望聞問切) 사진(四診)의 선구로 중의 맥학(脈學)의 비조로 불리는 편작의 의술은 신인(神人)의 전수를 받은 것이다.

당시 편작이 근무하던 여관에 장상군이란 손님이 있었는데 편작이 남들과 다른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는 그의 여관에 10년 이상 드나들며 그의 사람 됨됨이를 세심히 관찰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그에게 의술을 전수해주기로 결정했다.

장상군은 우선 편작에게 한 가지 약을 주었고 그리고 나서 자신이 비밀리에 소장한 서적을 편작에게 전수해주었다. 약을 복용한 지 30일이 지나자 편작은 곧 벽을 뚫고 물건을 볼 수 있었고 사람의 인체를 꿰뚫어 보는 특이공능을 지니게 되었다. 이때부터 편작은 곧 의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기・편작창공열전》에는 편작이 세 차례에 걸쳐 제 환후의 질병에 대해 조언한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편작은 인체를 투시할 수 있는 특이공능을 운용해 제 환후의 신체 어느 부분에 병이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고 병이 있는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표현이 있음을 알았다. 만약 장상군이 없었더라면 편작이 어디서 이런 특이공능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또한 그가 제 환후를 한번 보기만 하고 그의 병이 소재한 위치를 알 수 있었겠는가?

이후 편작은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단지 의술이 고명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의 입장을 많이 고려했다. 가령 그가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을 지날 때 현지 사람들이 부녀를 존중한다는 말을 듣고는 곧 ‘대하의(帶下醫 부인과 의사)’가 되었고, 동주(東周)의 수도 ‘낙양’을 지날 때는 주나라 사람들이 노인을 공경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오관과 의사’가 되었으며, 진(秦)나라의 수도 함양에 들어가서는 진나라 사람들이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는 ‘소아과 의사’가 되었으니 세속의 흐름에 따라 유연하게 변신했다. 몇천 년 간 편작의 뛰어난 의술과 의덕은 후인들의 존경을 받아왔으며 때문에 ‘신의(神醫)’라 불렸다.

삼국 시기 남양(南陽)의 장중경(張仲景), 초군(礁郡)의 화타와 함께 ‘건안 시기 삼대 신의(神醫)’로 불렸던 동봉(董奉)은 도를 닦던 수도인일 뿐만 아니라 최후에 도를 얻어 신선이 된 인물이다. 동봉은 인간 세상에서 300년 이상 살다가 신선이 되어 떠났으며 떠날 때 그의 용모는 여전히 30대처럼 보였다.

《신선전》에는 그가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 구도한 특이한 행적들이 나오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행림춘완(杏林春暖 행림의 봄이 따뜻하다는 의미)’이다.

동봉은 산에 살면서 밭을 일구지 않았고 날마다 사람들에게 병을 치료해주었는데 돈을 받지 않았다. 중병환자의 경우 병이 나으면 살구나무 5그루를 심게 했고 가벼운 환자는 1그루를 심게 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자 십만여 그루가 되어 살구 숲[행림杏林]을 이뤘다. 동봉은 또 산속의 여러 짐승들과 새들을 불러 그 아래에서 놀게 했는데 잡초가 자라지 않아서 마치 김을 매서 정리한 것 같았다. 나중에 살구가 익자 숲속에 풀로 만든 창고를 하나 짓고 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살구를 사고 싶은 사람은 와서 나를 찾지 말고 곡식 1그릇을 가져다 놓고 대신 살구 1그릇을 가져가시오.”

그런데 매번 곡식은 적게 놓고 살구를 많이 가져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숲속의 호랑이 서너 마리가 쫓아와서 으르렁거렸다. 그가 깜짝 놀라서 급히 달아나다 넘어져 살구를 떨어뜨리고 집에 돌아와서 보면 정확히 자신이 두고 온 곡식 양만큼만 남아 있었다.

또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빈손으로 와서는 살구를 훔쳐갔다. 그러자 호랑이가 그를 집까지 쫓아가서 물어 죽였다. 가족들이 그가 살구를 훔쳤기 때문에 발생한 일임을 알고 동봉을 찾아가 살구를 돌려주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을 빌었다. 그러자 죽었던 사람이 바로 살아났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살구를 사려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양을 가늠했고 누구도 속이는 사람이 없어졌다.

동봉은 매년 살구를 팔아 얻은 곡식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먹을 것이 부족한 여행객들에게 여비를 보태주었다. 이렇게 매년 약 3천 곡(斛 역주: 1곡이 10말이다)을 써도 오히려 많이 남을 정도였다.

이렇게 그의 행림(杏林 살구나무 숲)은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후인들은 동봉의 은혜를 기려 ‘행림춘완(杏林春暖)’, ‘행림에 명성이 가득하다’라는 표현으로 그의 미덕을 찬양했다.

세상에서 좋은 의사가 되려고 생각한다면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당대(唐代) 명의 손사막은 고희를 지난 노년의 나이에 《천금요방(千金要方)》과 《천금익방(千金翼方)》을 저술했다. 이중 《천금요방》의 서론에 해당하는 내용이 바로 ‘태의습업(大醫習業)’과 ‘태의정성(大醫精誠)’이다.

여기서 그는 의사가 갖춰야 할 의덕과 의술에 대해 강조했다. 특히 태의정성은 후세 의사들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할 의덕(醫德)에 대한 선서가 되었다.[역주: 마치 서방에서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있는 것과 유사하다]

“창생(蒼生)을 위하는 큰 의사”가 되려면 반드시 “의학의 근원에 널리 통하고 근면하고 부지런해야 하며” 병을 치료할 때는 “반드시 마음을 안정시키고 무엇을 바라거나 구함이 없어야 하며 먼저 크게 자비롭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 널리 생명의 고통을 구하려는 서원이 있어야 한다.”

진료를 청해오는 집이 있으면 “귀천(貴賤)이나 빈부(貧富)를 가리지 않고 나이가 많든 적든 예쁘거나 못났거나 친분을 가리지 않고 민족도 따지지 않으며 모두 동일하게 대해야 한다. 모두 마치 자기 가족처럼 대해야 하며 이리저리 재거나 따지지 말고 스스로 길흉을 고려해 신명을 아끼고 보호해야 한다.”

환자가 진료를 청하면 “환자가 고뇌하는 것을 보면 마치 자기가 그것을 둔 것과 같이 하여 깊은 마음으로 안타깝게 여겨 험한 것, 낮과 밤, 추움과 더움, 배고프고 목마름, 피로를 피하지 말고 한마음으로 달려가 구제해야 한다.” 만약 이렇게 할 수 없다면 곧 생명의 큰 도적이다.

​아울러 손사막은 또 의사가 환자의 집에 왕진을 갔을 때 지켜야 할 규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환자의 집에 들어가서는 그 집이 아무리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어도 좌우로 한눈을 팔아서는 안되며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 소리가 들려도 즐겨서는 안되며 진수성찬을 대접받아도 맛이 없는 것처럼 먹어야 하며 좋은 술이 눈앞에 있어도 없는 듯이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만약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사람과 신이 함께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의술에 정통할 수 있는가?

“반드시 《소문》, 《갑을경》, 《황제침경(黃帝鍼經 영추)》, 《명당유주(明堂流注)》, 십이경맥(十二經脈), 삼부구후(三部九侯), 오장육부, 표리공혈(表裏孔穴), 본초약대(本草藥對), 장중경, 왕숙화, 완하남(阮河南), 범동양(範東陽), 장묘(張苗), 근소(靳邵) 등 여러 부의 경방(經方)을 숙지해야 한다.”

이외에도 또 “음양(陰陽)녹명(祿命), 여러 가의 상법(相法 관상), 거북점, 주역육임(周易六壬)에도 정통해야 한다.” 만약 이런 요구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이는 “눈도 없이 밤길을 걷는 것과 같아서 자칫 잘못하면 넘어지거나 목숨을 잃는다. 그 후 마땅히 이 책을 구해 숙독하고 사색하며 깊이 연구해야만 비로소 함께 의도(醫道)를 논할 자격이 있다.”

손사막은 또 큰 의사가 되려면 반드시 다양한 서적을 널리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오경(五經 유가의 경전)을 읽지 않으면 인의(仁義)의 도(道)가 있음을 모를 것이요, 삼사(三史)를 읽지 않고서는 고금의 일을 모르며, 제자(諸子)를 읽지 않고는 일을 봐도 모를 것이며, 내경(內經 불경을 의미함)을 읽지 않고는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덕을 모를 것이며, 노장을 읽지 않고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해 길흉과 꺼리는 일들이 사사건건 저촉됨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또 “오행의 휴왕(休王)과 칠요(七耀 해와 달 및 수성, 금성, 토성, 목성, 화성)의 천문에 이르기까지 함께 깊이 연구하여 이를 잘 배운다면 의학의 도(醫道)에서 걸림이 없어 진선진미(盡善盡美)할 것이다.”

다시 오늘날의 중의를 보면 과연 몇이나 손사막이 천년 전에 말한 의사로서의 자격을 갖췄는가? 중의는 병을 잘 치료할 수 있지만 다만 지금의 사람이 안 되기 때문에 병 치료가 어려운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4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