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征好)
【정견망】
1 최후의 구세력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주 중의 하나의 극히 미시적이고 방대한 생명, 그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신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이 우주 천체가 일정한 시기에 해체로 나아갈 것임을 보게 되자, 멸망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생명 본능의 일념으로, 그것 아래의 층층 대궁(大穹)과 층층 대궁 내의 층층 천체들, 뭇 천체 내의 층층 우주와 뭇 우주 중의 층층 생명들에 이르기까지를 촉동하여, 각 대궁 중의 거대한 신들로 하여금 스스로 방법을 구하도록 배치했다. 참여한 신들은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더욱 세밀하게 배치했는데, 삼계(三界)에 이르기까지 쭉 했다. 그 일념이 온 층차가 극히 높았기 때문에, 우주 중생들은 모두 이것은 하늘의 뜻으로서 꼭 원만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며 이 홍궁천체(洪穹天體)를 소멸로부터 구하고자 했다.”(《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어느 날 나는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구세력(舊勢力)이 멸망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일념(一念)이 이 홍대한 창궁(蒼穹)에 한바탕 거대한 난을 일으킨 것으로; 구세력이 멸망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일념이 사존(師尊)의 정법에 층층의 저애를 가져왔으며; 구세력이 멸망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일념이 층층 참여한 뭇신(衆神) 중생들을 훼멸하게 했다. 그렇다면 구세력이 멸망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일념 그것은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당시에는 똑똑히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일찍이 두려운 마음을 찾아 올라가는 과정에서 두려운 마음[怕心]과 구하는 마음[有求之心]은 사실 같은 집착심의 두 방면임을 알게 되었다. 즉 박해를 두려워하는 것은 현세(現世)의 안녕을 구하는 것이고, 병업(病業)을 두려워하는 것은 안일과 편안함을 구하는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삶을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예전에 구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심각한 마음이기에 사존께서 《전법륜》에서 한 절 전체를 사용해 ‘구하고자 하는 문제’를 말씀하셨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이해하기에 구하고자 하는 마음 그것은 사실 오만방자한 마음으로, 그것은 스스로 결정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주 안에 있는 생명이 어찌 자신의 미래를 배치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 이 이치에 대해 장래에 당신들은 알게 될 것이다. 우주는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바로 대법 각자(覺者)의 일념으로 생성되었다.”(《각지설법 2》〈2002년 필라델피아법회설법〉)
내가 이해하기에 우주 뭇신과 중생의 생명은 모두 창세주(創世主)의 일념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과 사는 창세주께서 결정하신다. 그렇게 높은 층차에서 멸망으로 가고 싶지 않다는 그 일념은 사실 창세주께 대해 불경(不敬)하고 오만한 염두를 움직인 것이다.
그럼 내가 나의 생과 사, 나의 과거와 미래를 전부 사부님의 배치에 맡긴다면 구세력의 그 일념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동수의 체험에서 본 한 가지 일을 본 기억이 난다. 즉 동수 집에 벌새 한 마리가 들어왔는데 동수가 빗자루(역주: 벌새가 앉아 있었음)를 들어 올렸다. 만약 벌새가 이 빗자루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었다면 안전하게 집 밖으로 보내질 수 있지만, 벌새는 동수를 믿지 못해 힘껏 발버둥 치다가 머리가 부딪혀 피가 흐르고 기진맥진해졌을 때에야 마침내 발버둥을 포기하고 빗자루에 실려 집 밖으로 보내졌다.
구우주의 생명은 이 벌새와 얼마나 닮았는가? 우주 성주괴멸(成住壞滅)의 마지막 단계에서 생명은 더는 솔직하지 않으며 심지어 우주가 괴멸(壞滅)할 때 자신을 신우주로 구도해 나아가려는 창세주(創世主)를 믿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총명’ 과 자신의 ‘능력’만을 믿었다. 멸망하지 않고 개변(改變)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나온 각종 ‘노력’이 자신을 창세주의 정법(正法)을 방해하는 마(魔)가 되게 했다. 구우주가 괴멸할 때 생각해 낸 ‘최선의 방법’이 정법을 교란하는 진정한 죄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도 구함과 유위(有爲) 때문에 진정으로 구도받을 기회를 잃었다. 사실, 원래 이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2. 신마(神魔)의 전쟁
대법에서 나는 우주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일체가 다 생명이고, 집착심 역시 생명임을 깨달았다. 바른 생명에는 법왕(法王)이 있고, 부면(負的) 생명에는 마왕(魔王)이 있다. 사부님께서는 “마치 부대의 지휘부서와 같이, 사령부에서 명령을 내리고 전체 부대를 지휘해 임무를 완성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전법륜》)라고 하셨다.
내가 이해하기에 최후의 구세력이 사부님의 정법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마왕이 된 것이다. 그것은 구세력의 사령부이고, 집착심은 바로 그것이 파견한 부대로 대법제자의 공간장(空間場)에 끼어든 것으로 임무는 대법제자가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교란하고 사부님의 정법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세력이 왜 대법제자의 공간장에 집착심을 심을 수 있는가? 나의 이해는 마치 우리가 속인 속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속인 사상의 일부를 남겨준 것처럼, 우리가 구우주(舊宇宙)에서 조사정법(助師正法)할 수 있도록 우리의 공간장 속에도 구우주의 체계와 기제가 일부 남아 있는데 이것이 바로 구세력이 틈을 타고 이용하는 부분이다.
우리의 신체가 바로 신(神)과 마(魔)의 전쟁터다.
‘신(神)’은 우리의 불성(佛性)이다. 나의 이해는 사존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련계통은 바로 신우주의 기제이며, 사부님의 법은 우리의 불성을 충실히 하며, 우리가 신우주의 생명으로 단련 성취될 때까지 부동한 단계에서 우리의 수련을 지도한다.
우리가 집착심을 깨끗이 제거하는 능력은 수련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수련의 기점을 바로 놓음에 따라 증강된다.
수련 초기에, 집착심과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열세에 처하는데 그 표현은 관(關)임을 뻔히 알면서도 넘으려 하지 않고, 참아야 함을 알면서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집착심과 뒤얽혀 똑똑히 가리지 못하면 집착심이 종종 우리를 대신해 이 신체(身體)를 사용하는데, 이때 우리는 사실 최후 구세력의 지령에 따라 사존의 정법을 방해하는 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는 또한 중생의 죄업을 해소(消解)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神體)를 사용했다!”(《왜 중생을 구도하려 하는가》)
자비하신 사부님께서는 당신의 감당과 대법 법리로 우리의 선념(善念)을 일깨워주셨는데, 우주 중에서 생명의 선념은 바로 사부님을 따르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바로 우리 앞에 계신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바로 당신의 모든 집착을 다 없어지게 버린다는 것이다. 한 가지 집착이 있어도 그것은 마치 자물쇠 같고 마치 관(關) 같아서 당신으로 하여금 출항할 수 없게 하는 닻줄과 같은데, 그것을 모두 끊어야 한다.”(《뉴질랜드 법회설법》)
이때의 수련상태가 바로 선택이다. 즉 내가 요만한 집착을 남겨두어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가? 아니면 사존께서 하사하신 지혜의 검을 사용해 집착의 자물쇠를 아예 끊어버리고, 뒤돌아보지 않고 사부님을 따라가 신(神)이 될 것인가?
집착심을 끊으면 본성이 드러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하는 사람은 필경 속인이 아닌데, 그럼 본성의 일면이 왜 법을 바로잡지 않는가?”(《정진요지》〈도법〉)
어떤 생명만이 비로소 조사정법(助師正法) 할 수 있는가? 표준에 완전히 부합하는 한 생명인데, 이미 사부님께서 제 위치까지 밀어주신 진아(真我)다. 어떻게 정법(正法)하는가? 내 사상중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이 바로 사부님께서 내가 구도하도록 맡겨주신 이 일방(一方) 우주 천체의 상황이 내 사상중에 반영된 것이다. 대법(大法)으로 가늠하고 일사일념(一思一念)을 귀정(歸正)하는 것이 바로 구우주의 생명을 구도해서 신우주로 가는 과정이다.
집착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중생을 괴롭히는 마(魔)다. 마를 제거하자면 마왕(魔王)을 찾아야 하고 집착심을 찾으려면 뿌리를 찾아야 한다. 집착심에 대해 근원을 거슬러 추적하는 과정이 바로 층층 마를 제거하고 내 천체의 중생을 구하는 과정이다. 이 단계의 수련 상태가 정법수련으로 마를 제거하는 것이고 구도하는 것이다.
사부님의 법은 계속해서 나를 인도해 나로 하여금 사(私)를 닦아 버리고 위타(爲他)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구우주의 이치와 구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임을 알도록 하셨다. 위타(爲他)의 경지는 곧 도태될 생명은 영원히 볼 수 없는 신우주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신우주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이치상 당연히 얻을 수 있는 미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구우주의 성주괴멸(成住壞滅) 법칙에 따라 최후까지 걸어온 생명으로서 우리는 이미 어떻게 위타(爲他)해야 하는지 매우 낯설기 때문에 법 공부와 착실한 수련 속에서 새롭게 배울 필요가 있다. 매 한차례 잘못을 저지르고 반성한 후 나는 열두 글자로 자신이 위타(爲他)를 실천했는지 일깨워주고 또 내가 과연 위타를 실천했는지 복기해본다.
그것은 바로 “동기가 위타하고, 과정이 위타하고, 결과가 위타한가다.”(動機為他,過程為他,結果為他)
‘위타(爲他)’를 닦는 과정에서 사부님께서는 내 수련의 기점을 진정으로 바로 잡게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러분 알다시피 불(佛)ㆍ신(神), 그는 중생을 위해, 우주의 이익을 위해 그의 생명을 포기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 모두 포기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탄연(坦然) 하며 움직임이 없다.” (《미국서부법회설법》)
나는 내 수련의 목적을 알았다. 내가 수련한 과정을 다시 돌이켜보면, 매 한 점과 매 한 방울 아주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존의 성은(聖恩)이었다. 사존께서는 금강(金剛)을 단련하시는데, 장차 제자들이 중생을 위하고 우주의 이익을 위해 탄연히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는 그런 경지로 단련시키신다.
3. 바른 길을 걷다
우리의 공간장에 남아 있는 이 구우주 체계와 기제 그것 역시 살아있는 것으로 또 커질 수도 있고 축소될 수도 있다.
우리가 마성(魔性)을 방종할 때, 우리가 밖을 향해 구하거나 위사위아(為私為我) 하거나, 우리의 뇌에 패물(敗物)을 주입할 때면, 우리는 이 구우주 체계와 기제를 자양하는 것으로 그것은 곧 커지고 보다 많은 사악이 보호받는다. 왜냐하면 이 구우주 체계와 기제는 전반 거대한 구우주와 한데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것은 또 훼멸과 해체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우리 육신(肉身)에 표현되기는 바로 노쇠, 질병, 사망, 박해, 마난이다. 그것이 충분히 크면, 그것이 거꾸로 우리를 삼킬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주의식(主意識)이 강하지 않고 그것을 진정한 자신으로 여긴다면, 우리와 우리가 대표하는 중생들은 곧 구우주를 따라 해체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련해 내지 못한 것이다. 이는 또한 구세력의 험악한 속셈이다.
우리가 세 가지 일을 할 때, 우리가 연공할 때, 우리가 선한 생각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할 때, 우리가 안으로 찾고 대법에 동화될 때, 우리는 곧 신우주의 기제에 의해 용련(熔煉)되는 것이다. 육신에 표현되는 것은 청춘이 오래 머무르는 것이다. 동시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넣어주신 수련계통은 구우주의 생명이 구도되어 신우주로 간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넣어주신 수련계통은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뿌리가 사부님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사상이 법(法)에 있다면, 심지어 우리가 길을 걸을 때도, 우리와 대응하는 주변 환경에서 미시적인 것에서 거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일체 생명이 구도되고 있다. 반대로,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진상을 말할 때 사상이 조금이라도 빗나가서 “잠시 후 진상을 끝내고 생강을 좀 사야지”라고 한다면 아마 2억 년을 기다린 어떤 생명을 구할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일념(一念)이 법에 있지 않아 사람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많은 생명이 새로운 우주로 구도되고 더 많은 사악이 깨끗이 제거됨에 따라서 구우주는 축소되고 있다.
왜 대법제자의 책임이 중대한가? 왜냐하면 우리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이 모두 생명의 위치를 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사일념은 또 우리가 길을 바르게 걸어갈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한 수련생이 자동차에 옷이 걸려 10여m나 끌려갔음에도 피부조차 벗겨지지 않은 사례를 드셨다. 동수는 왜 차에 치였는데 아무 일이 없었을까? 예전에 나는 단지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인데, 오히려 이 단락이 왜 ‘심성제고’라는 절에서 나왔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현 단계에서 이해한 것은 동수가 운전기사의 폭언을 들었을 때 “참아낼(忍) 수” 있었다. 그렇게 복잡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운전기사를 위해 생각할 수 있음은 ‘선(善)’에 부합하며 ‘위타(為他)’에 부합한다. 또 “괜찮다”고 말한 것은 남의 돈을 뜯어내지 않는 것으로 ‘진(真)’에 부합한다. 동시에 그녀가 또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배웠기 때문에 이렇게 대할 수 있었다고 말한 것은 그녀가 사부님의 말씀을 마음에 둔 것으로 ‘경사(敬師 스승을 공경)’에 부합하고 ‘신법(信法 법을 믿음)’에 부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동수는 완전히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걸었으니 사부님께서는 당연히 그녀를 책임지셨고 사부님께서 이 일의 결과가 “아무 일 없게”(《전법륜》) 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길을 깔아주셨지만 우리는 정념으로 걸어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수련이라 할 수 있겠는가?
반대로, 만약 동수가 구경꾼들의 부추기는 말을 듣고 운전기사의 돈을 뜯어냈다면, 그것은 구우주의 위사(爲私)한 악념(惡念)에 부합한다. 구세력은 곧 그것들을 인정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것들이 허점을 타고 들어올 것이다. 구세력은 또 이 일에 대해 “인대가 끊어지고 뼈가 부러지며”, “반신불수”가 되는 결과를 정했을 것이다. 수련 중에 어떻게 진상(真相)과 가상(假相)을 구별하는가? 구세력이 배치한 결과가 확실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이 동수는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정념으로 걸었기 때문에 구세력이 배치한 ‘진상(真相)’이 곧 가상이 된 것이다.
수련은 바로 이렇게 엄숙하다. 사람과 신은 일념의 차이며 생명의 구도와 훼멸 역시 우리의 일념 사이에 달려 있다. 우리의 어깨에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정중하게 맡기신 우주 무량한 중생들의 목숨이 있다. 우리가 조금만 빗나가게 걸어도 치러야 하는 것은 모두 무거운 대가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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