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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과 인체 생명에 대한 정견 (8)

【정견망】

3. 예언속의 오늘: “자연스러움에 따름”에 따름과 “대은은 저자에 은거”

이제 처음 제기했던 문제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사람은 대체 어디서 왔는가? 인생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탐색은 인류에게 있어 천고(千古)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설사 물질적 생활만을 중시하는 그런 사람이거나 또는 향락주의를 신봉하며 하루 종일 술에 취해 사는 사람일지라도 떠들썩함이 지나간 후의 공허와 생명의 목적을 똑똑히 모름으로써 수반된 서글픔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누구에 대해 말하든, 물질적인 삶이 아무리 풍요로울지라도 사람의 정신세계는 결국 보다 심층(深層)의 것이 있어야지만 진정으로 충실해질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다만 일부 사람들이 자신의 정신 영역의 감수를 너무 일찍 마비시켜 버린 것에 불과하다.

1) 충실한 즐거움과 일시적인 환락의 구별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인인지사(仁人志士)들이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위아래로 탐구해왔다. 그들은 속세 사람들이 때에 맞춰 즐기고 “내일 일은 걱정하지 않는”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부귀영화나 고관대작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물질 이익의 휘황한 번영과 현실 생활의 즐거움과 사치는 그들에게 있어 모두 눈앞에 스쳐 지나는 연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은 겉보기에 허무해 보이는 고귀한 정신 신앙과 이상 속에서 고상(高尙)한 생존방식을 위해 공명(功名)과 이록(利祿), 부귀와 영화를 기꺼이 포기하려 하는데, 심지어 한창 영달할 때 과감히 은퇴해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수련하려 한다.

고상한 생존방식을 언급하자면, 즐거움과 충실이란 개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누구나 다 일상적으로 마주치고 직접 겪는 일이다. 우리가 컴퓨터 게임에 탐닉하고, 돈벌이가 되는 큰 거래에 탐닉하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시적인 쾌락에 도취할 때면, 우리는 매번 많은 기쁨과 설렘, 심지어 열광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일이 지나간 후 우리는 내심 깊은 곳에서 나오는 깊은 후회와 공허한 죄책감을 피할 수 없다. 즉 우리는 진정한 즐거움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열정적인 기쁨은 양심과 충실과 모순되는 것으로 더욱이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진정한 자아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가 비록 사후에 이런 인식과 각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또 유혹이 닥칠 때면 여전히 욕망의 불구덩이로 빠져든다는 점이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사람은 점차 이런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아무리 타락해도 더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 물론 이것은 자신이 오랫동안 방종해서 생긴 것으로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다.

어떤 작가가 물욕(物慾)이란 사람 영혼의 기생충이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사실 욕망은 확실히 ‘외(外)’재(在)하는 것으로, 인간의 진정한 자신과 독립해 ‘외부(外)’에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것이 우리 사상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명 속에 기생하면서, 우리의 의지가 약해질 때면 그것이 곧 우리를 통제해 힘을 흡수할 수 있는데 심지어 우리를 주재(主宰)할 수 있다. 사람이 이런 외재적인 욕망에 주재당할 때면 진정한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할 수 없다.

2) 어떻게 해야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가

보통 사람은 진정으로 욕망에서 뛰쳐나오기 어렵다. 진정으로 명리(名利)와 사욕(私慾)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이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진정으로 사람 마음을 물욕에서 해방시켜, 자신이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되게 해야 하며, 심령(心靈)을 진정으로 해방시켜야 하는데, 그러자면 반드시 세속 세계를 뛰쳐나오는 하나의 이치[理]가 있어서 자신이 어떻게 실천하도록 지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이 확실하고 확실한 명리의 유혹이 눈앞에 있는데, 이를 내려놓고 초탈했다고 말하기가 어찌 그리 쉽겠는가!

이렇게 얻기 힘들고 대단히 소중하며 사람의 실천을 지도하는 이치를 사실 고인(古人)은 ‘도(道)’라 불렀는데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라고 말했다.

정말로 그렇다. 현실의 기쁨과 격정, 물질적인 향수, 돈이나 권력, 명예와 영광은 모두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인생 백 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당신이 평생 제아무리 돈이 많고 벼슬이 높더라도, 그것이 또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이 노쇠(老衰)해지고 병에 걸리는 것을 피할 수 없는데, 그날이 되면 손에서 내려놓기 아쉬워하던 것들이라도 모두 가져갈 수 없다. 마치 아이들이 모래사장에 쌓아올린 모래성처럼 바닷물이 밀려오면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것과 같다.

사실 어찌 사람의 일생뿐이겠는가? 전반 인류 사회의 몇 천 년 문명(文明) 역사도 기나긴 우주의 연화(演化) 중에서는 그저 한순간에 불과할 뿐이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만 관의 재산을 버리고, 높은 벼슬을 버리고, 왕위(王位)를 버리고 도(道)를 구한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고정관념의 틀에서 뛰쳐나와 고상한 생존방식을 추구했던 이런 사람들을 한번 살펴보자. 사실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동이 이미 자기 생명의 영원한 이익을 위해 길을 닦고 투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진정한 환상이 아니라 세계에서 영원한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진정한 지혜가 아닌가!

수천 년 동안 수도(修道)를 말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산속에서 수행하는 은사(隱士)나 사찰이나 도관의 승려나 도사들을 떠올리곤 한다. 속세를 멀리 떠나, 청정하게 계율(戒律)을 지키고, 강제로 모든 물질적 이익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당신의 이 마음이 서서히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언뜻 보기에, 이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생활 방식인가!

하지만 수련을 꼭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소은(小隱)은 산림에 은거하지만 대은(大隱)은 저자에 은거한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에는 정말로 또 다른 수련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키는[直指人心] 진정한 대도(大道)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 조용히 세상에 전해진 파룬궁(法輪功 파룬따파)이다. 아울러 파룬궁은 역사적으로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온 “도가에서 말하는 도(道)이자 불가에서 말하는 법(法)”(구 《논어》)이 대체 무엇인지 진정으로 명확히 가리켰다.

3) 3가지 성어에 드러난 진리

다음으로, 우리는 중화 문화에서 아주 평범하지만 또 대단히 비범한 3가지 단어를 통해 각자 한 가지 측면에서 파룬궁이야말로 항고(恆古)에도 없었던 장관(壯觀)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르고[隨其自然]”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줄이며[淸心寡欲]” “중생을 널리 제도[普渡衆生]”하는 것이다.

먼저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르고”에 대해 우리는 종종 이 말이 각종 일을 하는데 건성으로 하면서 적당히 지내고, 열심히 하지 않고, 적극적이지 않으며 위로 향상하지 못하면서 함부로 적당히 하는 표현이라 여긴다. 또한 종종 구도자(求道者)들의 일상생활을 이런 한 부류라고 분류하는 게 습관이 된 것 같다. 이것 역시 뭐라고 탓할 수만은 않은데 역사적으로 수많은 수련인(修煉人)들이 정확하게 이런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 불조는 직접 왕위를 포기했고, 지저분한 도인 장삼풍(張三豐)은 외모를 꾸미지 않았으며, 또 각종 세속적인 직위와 재산을 버리고 출가해서 수도한 사람들도 많았다. “청심과욕(淸心寡欲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줄임)”도 비슷한데 가령 재물에 대한 탐욕을 내려놓는 것이 바로 재물을 포기하거나 또는 시주하는 등 재물이 하나도 없이 텅 비어야지만 과욕이라 인정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파룬궁은 이 두 단어를 완전히 새롭게 해석해 수련하는 제자들이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걷도록 했다. 즉 표면보다는 본질(本質)을 중시하고, 물질 대신 마음을 중시한다. 물질적인 면에서 말하자면 수련자가 최대한도로 속인과 같은 형식을 유지하지만, 자신의 심성(心性)을 수련해서 제고하는 방면의 요구에는 결코 모호함이 없다. 아울러 모순에 부딪히면 먼저 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찾도록 하고, 일을 함에 우선 다른 사람의 감수를 고려하도록 한다.

즉, 수련자는 단지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수련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원래 사회 속에서 했던 역할도 파괴하지 말아야 하며, 심지어 수련하기 전보다 일을 더 잘 해야 하며, 대인관계도 더욱 조화로워야 한다. 바로 속인 사회의 모순 속에서, 첨예한 이익의 충돌 앞에서 직접 마주해 일을 잘 처리하는 동시에 진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연마하고 제고시켜야 한다. 명명백백하게 내려놓는 것은 표면적인 물질이 아니라 바로 집착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하면, 속인 사회에 대한 영향이란 측면에서 자신이 사회적인 업무, 관리 및 상호 작용을 더욱 잘 할 수 있다. 일을 하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을 제거한 후, 복잡한 미혹에서 뛰쳐나오면,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한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한 일에 대하여, 종종 부담이 없고 정정당당하게 더 높은 효율성과 더 높은 품질로 일을 완수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감정의 파동이나 외부 자극의 교란을 받지 않는다.

전에 필자와 아주 친한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파룬궁 수련생이다. 다음은 그가 말한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깊은 체험이다.

“학습하거나 일을 하면서 사람들은 늘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어떤 목표나 비전 또는 롤 모델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전진할 동력을 제공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수련을 하고 나서 나는 이런 방법들은 모두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수(數)를 세거나’ ‘하나를 지키고[守一]’, ‘의념을 지키는[意守]’ 것을 통해 입정(入靜)하려는 그런 소도(小道)에 불과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련한 후 내가 채택한 습관적인 방법은 이렇다. 이기적인 것과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마땅히 어떻게 해야 좋은지 내심 깊은 곳에서 인식한 것에 따라 하는데 이렇게 하면 부담이 가장 적고 효과가 더 좋을 뿐만 아니라 충돌로 인한 각종 교란도 쉽게 발생하지 않는다. 기차 속도로 비유하자면 우리는 과거에 줄곧 어떻게 연료 등의 방면에서 동력을 증가시켜 기차가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고려했다. 하지만, 이런 제고는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기부상열차는 지상에서 일정한 거리가 떨어진 후 지면에서 받는 마찰이 거의 사라진다. 때문에 끊임없이 인위적으로 동력을 제공해 마찰을 상쇄시킬 필요가 없다. 단지 초기 충격량만 있으면 아주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이 간단한 초기 충격량더 아주 간단해서 ‘나는 마땅히 일을 잘해야 한다’는 정도의 생각이면 충분하다.”

이 친구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는데, 그 후 줄곧 이런 방법으로 공부하고 일을 했다. 고등학교 때도 학습 능력이 발군이었고 중국 최고의 대학 중 하나에 들어가서도 늘 반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는 또 여러 차례 영어, 수학 경시 대회는 물론 전공분야 전국 규모 및 국제 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했고 4학년 때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남들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공부하지 않았고, 큰 부담을 지거나 고생하지도 않았는데, 매사에 평상심을 유지하며 결과를 추구하지 않는 태도로 한다. 그럼에도 오히려 성적이 대단히 안정적이고 아주 뛰어났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이런 사례들은 파룬궁 수련생 중에서 무슨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물론 한 마디 보충할 것은 여기서 동력을 제공하는 방법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련을 하고 나면 일을 잘 하는 것에 대해 인위적으로 동력을 가할 필요가 없으며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제공하는데 기존의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더 큰 동력을 아주 오묘하게 제공해준다.

이 수련 방법의 다른 방면, 즉 수련 방면을 말하자면, 확실히 진정으로 자신의 심성을 제고시켜 진정으로 자신의 내심 깊은 곳을 건드려 진정으로 자신이 자신을 주재할 수 있게 한다. 아울러 장기간 선정(禪定)과 입정(入定)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닌데 고통스런 상태는 청정한 수련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직 수련자에 대한 요구가 더 높을 뿐인데, 직접적인 이익의 충돌과 욕망의 유혹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착실하고 착실하게 제고해야 한다.

이상 두 가지 방면을 종합해, 이렇게 수련하면 오히려 수련이 훨씬 빠를 수 있다. 아울러 사회에 대해 아무런 저애나 나쁜 영향도 주지 않으며 도리어 사회 풍속을 정화하고, 사회의 각종 정상적인 업무의 운영 효율과 질을 제고할 수 있다.

다음으로 “보도중생(普渡衆生 중생을 널리 제도함)”이란 이 단어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이 단어는 인류 문화 속에서 적어도 2천 년 이상 존재해왔지만 보도중생의 진정한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누가 진정으로 중생을 널리 제도할 수 있는가? 종교에서, 예를 들어 불교와 도교에서는 제자들에게 출가해야만 진정으로 수련할 수 있다고 하는데, 종종 집에서 수련하면 출가수행보다 효과가 훨씬 떨어진다고 여긴다. 그러나 인류 사회를 유지하고 인류가 번성하려면 또 모든 사람이 다 출가할 수는 없다.

기독교에서는 비록 많은 사람들이 집에 머물며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지만 여전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본다. 실제적으로 여전히 물질적인 이익을 남기면 진정한 수행(修行)・수심(修心)이 어렵다고 여기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전통 종교에서는 비록 이 위대한 단어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긴 했지만, 실제로 진정하게 실현시킬 방법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대은은 저자에 은거한다[大隱隱於市]”는 말도 수천 년 동안 전해져 왔지만 파룬궁만이 비로소 수련자들이 진정하게 보편적으로 실천할 수 있게 했다. 즉 파룬궁은 사람이 수련하는 근본 본질을 지적해 장차 대법(大法)・대도(大道)가 인류 사회 속에 직접 펼쳐져 직업이나 계층의 제한 없이 사람들이 안심하고 집에서 수련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출가해서 수련할 수도 있지만, 굳이 가족과 관계를 단절하거나 직업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형식적으로는 이미 최대의 편의를 제공한 것이지만, 매 사람의 마음 수련에 있어서는 또 가장 엄격하다.

내가 만났거나 또는 직접 만나보진 못했어도 진정으로 마음을 내려놓은 수련생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입문하자마자 사부님께서 나를 관할하기 시작하셨다.”

“사부님께서 늘 내 옆에 계신다.”는 등등이다.

앞 절에서 언급한 많은 수련생들은 심지어 집에서 혼자 배웠음에도, 고질병이 치유되었고, 나쁜 습관을 끊었으며 희망을 되찾았다. 마치 마른 나무가 봄을 맞이하듯이, 몸과 마음이 크게 승화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이 공(功)을 전한 초기부터 엄숙하게 약속하고 성명하신 것과 같다. 즉 “사회에 대해 책임지고 수련생에 대해 책임짐에 따라 거둔 효과가 좋았으며”(《전법륜》 제1강 첫 단락)은 모두 진실이며 거짓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천 년 동안 세상에 전해져 온 ‘보도중생’을 진정으로 실현한 것이다.

때문에 많은 파룬궁 수련자들은 파룬따파(法輪大法)야말로 진정으로 하늘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한 갈래 광명한 대도를 분명히 알려주었다고 모두들 말한다.

4) 고향은 어디에?

천고에 전해지는 당시(唐詩) 《황학루(黃鶴樓)》는 이렇게 노래한다.

옛사람 황학을 타고 날아가 버리고,
이곳엔 황학루만 남았구나.
황학은 한번가고 돌아오지 않으니,
흰구름만 천 년을 멀리 떠가네.
한양수는 날갠 시냇가에서 빛나고,
앵무 섬에는 방초 가득하구나.
날 저무는데 고향은 어디인가,
안개 피어나는 강 위에 수심 잠기네.

昔人已乘黃鶴去,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複返,白雲千載空悠悠。
晴川曆曆漢陽樹,芳草萋萋鸚鵡洲,
日暮鄉關何處是?煙波江上使人愁。

황학루는 후인들에게 무한한 서글픔을 남겨주는데, 눈앞에는 단지 흰구름만 한 조각 유유히 떠다니는데 마치 홍진(紅塵) 속에서 천 년을 전전하는 인생과 같다. 하지만 황학은 어디로 갔는가? 고향은 또 어디에 있는가?

파룬궁에서는 이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알려준다(대략적인 의미): 오늘날의 사람들은 모두 고층(高層) 공간에서 내원해 인간 세상에 떨어진 것으로 생명 속의 선천적이고 아름다운 본성을 되찾아, 자신의 더욱 고상한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고생스럽게 윤회하면서 기다려온 진정한 의미다. 파룬궁은 사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생은 무엇을 위함인가 하는 이런 천고의 난제(難題)에 대해 진정한 답을 드러냈다. 물론 이것은 인체에 담긴 거대한 잠재력과 본능의 내원을 설명함과 동시에 인류가 천년을 윤회한 목적도 수면위로 드러낸 것이다.

오늘날 파룬궁을 수련하는 이렇게 많은 한 무리 사람들이 있는데, 이중에는 백인, 흑인은 물론이고 염황(炎黃)의 자손들도 있다. 그들은 세계 100여 개 나라에 퍼져 있다. 그들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생명의 진의(真義)를 알고 싶어 하며, 더욱 선량해지고 더욱 순결(純潔)해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화합과 따스함을 가져다 줄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처지에서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발견했고 ‘진선인(真善忍)’에 기초한 수련을 발견했다. 그들은 생명 본성의 깊은 곳에서 우러난 ‘진선인(真善忍)’의 호소를 듣고 인생에서 반본귀진(返本歸真)의 길을 찾았다. 원래, 속세 오천 년의 반복적인 윤회는 오직 오늘날 대법이 널리 전해지기를 고생스레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들이 어찌 이 만고(萬古)에도 만나기 힘든 수련의 기연(機緣 기회와 인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계속)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2/7/7/25961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