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삼자경》 독서필담 (3)

유여(劉如)

【정견망】

【원문】

養 不 教 父 之 過 教 不 嚴 師 之 惰
양 불 교 부 지 과 교 불 엄 사 지 타

子 不 學 非 所 宜 幼 不 學 老 何 爲
자 불 학 비 소 의 유 불 학 노 하 위

[해석] 직역하면 (자식을) 기름에 가르치지 않으면 아버지의 허물이고 가르침에 엄하지 않으면 스승의 게으름이다. 자식(제자)이 배우지 않음은 마땅한 바가 아니니 어려서 배우지 않는다면 나이 들어 어떻게 되겠는가?

즉, 부모가 자녀를 기를 때는 반드시 좋은 교육을 시켜야 하며 학생을 가르침에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으면 이는 가르치는 스승이 제 역할을 못하는 것이다. 또 사람이 어릴 때 배우지 않으면 성장한 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주석]

1.양(養):기르다, 양육하다.
2.부(父):부친, 아빠.
3.과(過):허물, 잘못.
4.엄(嚴):엄격하다, 엄하다
5.사(師):선생님, 스승.
6.타(惰):게으르다, (맡은 일을) 소홀히 하다.
7.학(學):배우다, 학습.
8.비(非):아니다, 틀리다.
9.의(宜):마땅하다, 옳다.
10.유(幼):어리다.
11.노(老):나이가 많다, 늙을.
12.하(何):왜, 어떻게.
13.위(爲):하다, 만들다.

【독서필담】

이 8구절은 쉽고 명확할 뿐만 아니라 첫머리에 나오는 ‘양불교 부지과(養不教 父之過)’는 누구나 다 알 만큼 유명하다. 그러므로 선인들은 자고로 부모의 교육 책임이 막대함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여기서 책임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향수만 공급한다면 책임을 다 하지 못한 것으로 아이의 언행(言行)이 단정하지 못하면 그 부모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부모들는 자녀의 덕행 교육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제1과에서 “사람의 본성은 애초에 선량하지만(人之初 性本善)” “만약 가르치지 않으면 본성이 변한다(苟不教 性乃遷)”는 것은 선량한 본성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교육의 종지(宗旨)를 언급한 것이다. 때문에 부모의 책임에서 가장 먼저 덕행 교육을 물은 것이다. 아울러 《삼자경》에서 교육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제기한 것 역시 부모다. 그러므로 교육의 종지를 분명히 한 후 제2과에서 어머니의 모범으로 맹자(孟子) 모친을 들고 아버지의 모범으로 두연산(竇燕山)을 든 것이다.

두 사람 다 자녀들이 나쁜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게 했고 의(義)를 중시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고인(古人)의 교육에 대한 인식에서 가장 먼저 중시한 것이 인품(人品)교육임을 알 수 있는데 인품교육은 바로 부모의 가정교육에서 시작된다.

때문에 고대에는 집집마다 가훈(家訓)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德川) 막부 통치 이후 중국유가교육을 더욱 중시해 가정교육이 아주 엄했다. 또 서당이 전국에 널리 퍼져 자녀들에게 단정한 언행과 예의를 가르쳤다.

일본 현대 초등학교의 기원을 찾자면 에도 시대 데라코야(寺子屋)로 올라가는데 지금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한문과 시가(詩歌)는 물론 공자의 《논어(論語)》를 배웠다. 또 가정 과목이 있어서 요리와 바느질 및 청소 등도 가르쳐 아이들이 고마움을 알게 하고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도리를 알게 했다. 한마디로 현대판 소쇄응대(洒掃應對 역주; 청소와 손님 접대를 말하는데 고대 아동 교육에서 중시했던 부분이다)로 이는 고대 사숙과 가정교육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이는 또 일본 경제계의 직업윤리에서 성실과 신용을 중시해 일본 기업이 세계적인 지위에 오를 수 있게 한 근본이다.

《삼자경》이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종지(宗旨)가 고명하고 사람마음을 바로 잡는 동시에 언어가 아주 쉽고 낭송하기에 편해 누구나 다 읽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들에게 좋은 계몽일 뿐만 아니라 부모와 천하 백성들에게도 깊은 일깨움과 가르침을 준다. 고대 중국이 왜 전 세계가 존경하고 따라 배운 예의(禮義)의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이 작은 계몽교재만으로도 사람 마음을 밝히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사실 《삼자경》 첫3과에서 말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교육을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다. 교육의 근본은 덕에 있고 부모와 교사는 반드시 엄격하고 진지하게 아이를 가르치고 이끌어 아이들의 선량한 본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삼자경》은 교육의 종지와 교사와 학생 쌍방이 교육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설명한 후에야 이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차근차근 학습하라고 알려준다.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이 책을 거의 사람이 스스로 공부해 인재가 되게 하는 것으로 어떻게 유학의 대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방향을 제시한다고 했다. 고대 제왕들이 교육에서 모두 이 책을 중시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아이를 큰 그릇이 되고 큰 뜻을 품게 하려면 《삼자경》 학습부터 시작하기 바란다.

【관련 일화: 무훈의 학교 설립】

무훈(武訓 1838-1896년)은 청말(淸末)의 민중교육가이자 중국에 근대식 학교를 건립한 선구자이다. 원래 고향은 산동성 당읍현(堂邑縣 지금의 산동성 관현) 유림진(柳林鎭)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숱한 고생을 겪었는데 원래 이름은 무씨 집안의 일곱째라는 뜻에서 ‘무칠(武七)’이라 했다. 나중에 청나라 조정에서 그의 공을 기려 ‘훈(訓)’이란 이름을 하사한 이후부터 ‘무훈(武訓)’이라 불렸다.

무칠은 세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일곱 살 때 모친을 여읜 후 끼니를 잇기 위해 걸식으로 생활해야 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이었던 무칠에게는 마음속 깊은 곳에 줄곧 불가사의한 꿈이 솟아올랐다. 자신의 힘으로 돈을 모아 무료학교(義學)를 만들어 가난한 아이들도 누구나 공부할 수 있게 하려는 원대한 꿈이었다.

무칠은 자신의 꿈을 실천하기 위해 21세 때부터 행동에 나서 각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돈을 모았다. 그는 닥치는 대로 남의 집 품팔이를 했고 이와 동시에 틈나는 대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을 했다. 매번 구걸할 때마다 좀 쓸 만한 음식이나 옷을 얻게 되면 나중에 이를 돈으로 바꿨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늘 남루한 옷을 걸쳤으며 매일 2개의 거친 찐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는 때때로 강호에 떠돌아다니는 곡예사들처럼 자신의 몸에 송곳을 찌르거나, 칼로 머리 치기, 큰 솥을 들어 올리는 묘기 등을 선보여 구경꾼들의 돈을 모았는데 심지어 더러운 벌레나 뱀, 전갈을 먹거나 돌덩이와 기와를 집어삼키기도 했다. 이렇게 모은 돈이 어느 정도 쌓이자 그는 자신이 모은 돈을 큰 상인에게 맡겨 이자를 받으며 돈을 불렸다.

이리하여 무칠에게는 점차 큰돈이 쌓였고 그는 이 돈으로 땅을 사서 장차 학교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댈 학전(學田)을 마련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자 지나자 무칠은 제법 많은 돈을 모았음에도 여전히 아끼며 구걸에 나섰다. 무칠은 많은 사람들의 모멸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산동, 하북, 하남, 강소 등 여러 곳에 발자취를 남겼다.

이렇게 30년이 지난 광서(光緖) 14년(1888년) 무칠은 자신이 모은 4000여 꾸러미의 돈을 투자해 당읍현 유림진 동문(東門) 밖에 ‘숭현의숙(崇賢義塾)’을 설립했다. 마침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자신의 소중한 꿈을 실현시킨 것이다. 그는 학교가 설립된 후 우수한 교사를 모집하기 위해 직접 학문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진사(進士)나 거인(擧人)들을 찾아다니며 무릎을 꿇고 의숙의 교사가 되어줄 것을 청했다. 또 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일일이 가난한 집을 찾아다니며 부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소중한 자제들을 자신의 학교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하여 약 50여 명의 학생을 모집했으며 학비는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학교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모두 무칠이 소유한 학전(學田)에서 충당했다.

이후 매년 새 학기가 시작될 때면 무칠은 모든 선생님들께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고 다음에는 학생들에게도 일일이 절을 올렸는데 이런 의식이 수년간 지속되었다.

무칠 자신은 비록 까막눈이었지만 선생님을 몹시 공경했으며 심지어 신(神)을 모시는 것보다 더욱 공손했다. 매번 선생님들이 식사를 할 때면 그는 문 밖에 시립해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음식을 날랐으며 선생님들이 식사를 끝마친 후에야 비로소 남은 음식으로 자신의 배를 채웠다.

그는 평소 늘 의숙 이곳저곳을 살피며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선생님을 볼 때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고 일시적으로 나태한 선생님을 보면 역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앞으로는 열심히 분발해주실 것을 청했다. 장난을 치거나 건성으로 공부하는 학생을 보면 그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믈을 흘리며 열심히 공부할 것을 권고했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성심으로 대하자 의숙의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모두들 가르치고 배우는데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학문에 성취를 이룬 인물들이 날로 늘어났다.

이후 무칠은 인근 사찰과 관청 및 신사(紳士)들의 도움을 얻어 1890년 관도현(館陶縣) 양이장(楊二莊)에 제 2학교를 설립했고, 1896년에는 임청현(臨清縣 지금의 임청시) 어사항(御史巷)에 제 3학교를 설립했다. 무칠의 의로운 행동은 점차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졌고 나중에는 청나라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그의 행동을 높이 표창하고 특별히 ‘훈(訓)’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광서 22년(1896년) 4월 23일 무훈은 임청현 어사항 의숙 옆에서 학동(學童)들이 낭랑히 책을 읽는 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띤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59세였다. 그의 시신은 숭현의숙 동쪽에 묻혔고 당읍, 관도, 임청 세 현의 모든 관원들과 신사를 포함한 만 명이 넘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중국 역사상 거지의 신분으로 정사(正史)에 기재된 인물은 아마도 그가 처음일 것이다. 무훈은 평생 한마음 한뜻으로 학교를 잘 운영하는 것만 생각했으며 심지어 아내를 맞이하거나 자식을 낳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가난한 아이들이 학비 부담 없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무훈의 일생은 그 후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찬양을 받았다. 1950년에는 그의 일생을 그린 ‘무훈전’이란 영화가 만들어져 중국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45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