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생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우주 중에는 한 가지 이치가 있는바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얻었다면 당신은 곧 잃어야 하며, 잃었다면 당신은 곧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유럽법회설법》)
이 우주는 대법이 만든 것으로 대법은 전반 우주에 두루 퍼져 있고 없는 곳이 없으며 전반 우주 중의 일체를 제약하고 균형 잡으며 배치하고 있다.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얻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잃은 후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당신이 인간 세상에서 무엇을 얻으려 한다면 반드시 먼저 잃어야 하는데 이런 잃음에는 3가지 표현이 있다.
하나는 인간 세상에서 고생(辛苦)을 대가로 치르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 세상에서 재물(錢財)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며
셋째는 다른 공간에서 덕(德)으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자사(自私 이기적)한 사람은 인간 세상에서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만약 그가 인간 세상에서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뭔가를 얻으려 한다면 그럼 다른 공간에서 덕을 잃게 마련인데 덕으로 교환해 온다. 다시 말해 자사한 사람이 무엇을 얻으려 하면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사람의 계산은 법(法)의 계산만 못하고 사람이 사심(私心)을 움직여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무언가를 얻으려 한다면 그건 헛된 것으로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자사는 남에게 상처를 주고 남에게 고통을 주어 자신도 이 과정에서 업(業)을 짓고 장래에 업을 갚는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아울러 이기적으로 남에게 해를 입힐 때, 당신은 또한 남에게 덕을 주어 보상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사는 자신에게 업을 짓고 덕을 잃게 하며 진실로 자신을 해치니 이는 일종 자신을 해치는 행동이다.
반면 위타(爲他 남을 위함)를 선택하면 선량하게 감당하는데 이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대가를 얼마나 치르면 그만큼 얻을 수 있는데 틀림없이 이러하다.”(《전법륜법해》〈광저우 설법 문답풀이〉)
즉 잃었다면 반드시 얻는데 대법(大法)은 절대 당신이 헛되이 감당하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선량하게 감당한 사람은 일단 남이 좋은 것을 얻게 하고 나중에 대법의 배치에 따른 보답을 얻는다. 그러므로 선량한 사람은 즐겨 감당하려 하기에 대법이 배치한 보답을 얻는데 최종적으로 얻는 사람에 속한다.
이를 통해 보자면 자사(自私)는 남을 해칠 뿐만 아니라 자신도 해치고 선량(善良)은 남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이롭다.
그러므로 선량과 위타를 선택함이 바로 한 우주 생명의 정확한 선택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선량하고 위타할 수 있는가? 어떤 일에 봉착했을 때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고려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남을 위해 생각해야 한다. 어떤 동수들은 이렇게 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어렵지 않다. 행위 자체에서 볼 때 일반인들도 모두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모두 이것을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공법을 수련하는 그 자체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며, 층차를 제고하는 자체도 무슨 어려울 것이 없다. 바로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여 그는 비로소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현실이익 중에서 그것을 내려놓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해 보라. 이 이익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 마음을 어떻게 내려놓겠는가? 그는 어렵다고 여기는데, 실제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전법륜》)
아주 분명한데 문제는 행동의 어려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사상의식에서 오는데, 즉 모두 선량하고 위타하게 하는 것을 가로막는 사심(私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한편으로는 오직 사상 속에 사심이 발견되기만 하면 즉시 발정념으로 그것을 깨끗이 제거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행동에서 단호하게 위타를 선택해야 한다.
오직 당신이 사람들과 접촉하기만 하면 선택에 직면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한 생명으로서, 일할 때 다른 사람을 고려하고, 관용을 표현할 수 있음은, 기점이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2004년 뉴욕 국제법회 설법》)
오직 우리가 위타라는 이 기점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럼 선량하고 관용할 수 있는데 즉, 남에게 이롭고 자신에게 이로울 수 있다.
곳곳에서 위타할 수 있다면 문제를 고려하는 기점이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문제에 부딪칠 때 우선적으로 상대방의 각도에서 문제를 볼 수 있고 상대방이 내가 무엇을 해주길 원하는지 똑똑히 볼 수 있다. 그런 후에 전력을 다해서 하면 진정으로 상대를 위해 생각할 수 있다.
늘 자아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각도에 서서 남을 가늠하지 말아야 하는데 입장을 바꿔 놓고 곳곳에서 상대방의 각도에서 남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하고 과거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현재 부족한 점을 포함하는데 완전히 위타한 심태로 선량하게 남을 대해야 한다.
우리가 일할 때 가급적 다른 사람의 감수를 고려해야 하는데 불선(不善)한 행동으로 남을 다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가령 오만하게 말하고, 자기주장을 고집하고, 남을 무시하고, 자신을 치켜세우고, 화를 내고, 조급하며, 짜증 내고, 원망하고, 지적하고, 냉담하고, 남의 재앙을 즐기며, 뒤에서 남을 담론하는 등등은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자신도 업을 짓고 덕을 손상할 수 있다. 즉 남을 해칠 뿐만 아니라 자신도 해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득실을 고려하지 않고 완전히 남을 고려한다면 아마 바보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당신이 잘 생각해 보라. 그가 곳곳에서 남을 생각하고 주동적으로 남을 위해 희생한다면 그럼 그는 곧 곳곳에서 대법이 배치한 보답을 받게 되는데, 이는 어디에서나 얻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면 그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데 그가 가장 ‘약은’ 것과 같다. 그는 가장 큰 정도로 얻고 최종적으로 또 공성원만(功成圓滿)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자신을 개변시켜 진정하게 위아(爲我)에서 위타(爲他)로 전변해야 하는데 사람에서 걸어나와 신(神)으로 향하는 이 막다른 관을 철저히 돌파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오늘날 세인들 대부분은 천상의 신이 세상에 내려온 것으로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각 대궁(大穹)의 왕(王)과 주(主)로 그들은 모두 아주 고귀한 생명들이다. 한 생명의 전체 과정이야말로 바로 이 생명의 정체(整體)다. 생각해 보라, 이 신들이 세상에 내려온 후 윤회전생(輪迴轉生)하면서 정법(正法)의 길을 다지고 생생세세 정법을 위해 감당했다. 단지 금생금세(今生今世)에 구세력이 육성한 중공사당(中共邪黨)에 기만당하고 독해 되어 잘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한 생명을 볼 때는 전반적으로 봐야 하며, 그들이 일생일세(一生一世)에 잘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을 다르게 대할 수는 없다. 우리는 처지를 바꿔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중공에 의해 독해된 생명으로 이미 위험의 심연에 빠져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하기에 우리 대법제자들은 그들이 구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구도하지 못한다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지옥에서 겪을 끝없는 고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흉금을 넓혀, 더는 구할 수 없는 극소수의 악인들을 제외하고, 세상의 절대다수 사람을 구도 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들 표면의 일시적으로 좋지 못한 행동을 보지 말고, 그들의 소중한 본질을 보면서, 최대의 자비와 관용으로 그들을 구도해 그들이 진정으로 대법의 불은호탕(佛恩浩蕩)을 감수할 수 있고 대법제자들의 순정한 선량을 느낄 수 있게 해서 그들이 위험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미래를 갖도록 해야 한다.
문제를 보려면 표상을 꿰뚫고 본질을 보아야 한다. 어떤 세인들은 표면적인 행동은 아주 악(惡)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진실한 표현이 아니다. 진정한 그 자신은 주원신(主元神)이며 완전히 법에 동화되어 완전히 자비롭고 선량한 것이다. 그들은 또 애초 이 세상에 올 때 소원을 품고 왔는데 하나는 사부님의 정법에 협조해 힘을 보태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이 본래 대표하는 중생을 구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일단 삼계(三界)에 들어오면, 특히 인간 세상이란 이 미혹의 환경 속에 들어와 중공 사당에 의해 전면적으로 도덕이 붕괴되어 버린 오늘날의 사회 환경에 직면하면, 좋고 나쁨을 똑똑히 가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좋고 나쁨마저도 뒤집힐 수 있다. 당신이 그더러 자신을 잘 파악하라고 해도 사실 너무 어렵다! 그는 이미 후천적으로 형성된 잘못된 관념과 집착에 주재당해 자신을 주관할 수 없으며 이미 진정한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나쁜 일은 그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대뇌를 조종하는 관념과 집착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특히 중공사당은 거짓말로 대법에 대해 좋지 않은 사상을 주입시키고 인간 세상에서 이익에 대한 집착을 더해 중공사당에 의해 쉽게 통제되고 이용당하게 만들어 이들이 대법을 파괴하고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일을 하게 했다. 이러나 이 모든 것은 다 그의 주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은 이렇게 하면 끔찍한 후과(後果)가 있음을 똑똑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무기력하니 그들 앞에 놓인 상황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생각해 보라!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불쌍한가! 누가 대법을 파괴해 장차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받고 싶어 하겠는가?
생각해 보라, 당초 이 신(神)들은 대법에 대한 충만한 신심을 품고 정법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며 법(法)은 반드시 그들을 구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신의 일체를 포기하고 망설이지 않고 삼계로 내려올 수 있었다. 윤회전생하면서 사부님을 도와 정법에 필요한 문화를 다졌고 이미 많은 고생을 겪었다. 만약 지금 정법 중에서 구도 받지 못하면 결국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고통이다. 이 얼마나 좋지 않은 결말인가!
동수들이여, 그들의 유일하면서도 최후의 희망은 바로 우리 대법제자들이 그들을 구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소중하고 또 가련한 생명을 마주하고, 대법제자의 책임을 마주해, 우리가 어찌 그들을 구하지 않고 죽어가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반드시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그들을 위험의 심연 속에서 건져내야 한다. 우리 대법제자들이 사람을 구할 때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이지만 그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은 영원한 것이다. 그들이 영원히 지옥의 고통을 감당하지 않게 하고 또한 그들이 구도 받은 후 아름다운 미래를 가질 수 있다면 그들을 구도할 때 아무리 어렵더라도 구도할 가치가 있다!
내가 이해하기에 사부님께서 이렇게 다년간 거듭해서 정법의 결속시간을 연장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바로 사부님의 정법에 대해 충만한 신심(信心)을 품고 천담(天膽)을 무릅쓰고 내려온 바로 이들 고급 생명을 구도하시기 위함이다. 사부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무조건 원용(圓容)해야 하며, 아무리 고통스럽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어려움 속에서 대법제자가 사람을 구하는 진심이 드러나고 고통 속에서 대법제자가 사람을 구하는 자비를 인증(印證)한다.
우리가 사람을 구함에 무엇에 의지하는가? 겉으로 보면 입에 의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은 마음에 의지하는 것이다. 한 노년 여자 동수는 오랜 세월 진상을 알리며 사람을 구도해왔는데 때로는 몇 마디 말만으로도 사람을 구도할 수 있다. 그녀는 왜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녀의 심태가 아주 순정하고 자비로워 진상을 알릴 때 자비의 에너지가 밖으로 발산되어 단번에 세인의 좋지 않은 사상들을 다 해체시키고 그들의 명백한 일면이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 명백한 일면은 무엇이든 다 알기 때문에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동수가 그에게 삼퇴하라고 하면 그는 즉시 탈퇴에 동의한다. 바로 이렇게 간단하다!
그러므로 동수가 사람을 구하는 결정적으로 바로 자비심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입으로 말하지만 실질은 마음을 써서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善)을 닦아야 하고, 단호하게 사심을 버리고 위타를 선택해야 하는데 자비심을 닦아낸 후에 사람을 구하면 효과가 더욱 좋을 것이다.
인간 세상이란 이 환경은 수련의 필요에 따라 조성된 것으로 수련환경은 반드시 두 가지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미혹이고 다른 하나는 고생이다.
미혹이 필요하기 때문에 반대로 만들어졌으며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펼쳐내는 것은 흔히 반대로 된 이치[反理]거나 가짜 이치[假理]다. 즉, 당신이 인간 세상에 표현된 상태에 따라 경험을 총결한다면 얻어내는 결론은 흔히 모두 반대로 되는 이치거나 가짜 이치가 된다. 이기적이어야 자신의 이익을 실현 시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람은 사심을 사용해 이곳에서 생활한다.
우리 수련인은 법 공부를 통해 미혹을 타파하기에 우주 진상과 진리를 안다. 실제 정황은 인간 세상에서 발생한 일은 단지 인간 세상의 得失뿐이 아니며 동시에 다른 공간에서 발생하는 득실도 보아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전면적이고 입체적으로 문제를 보아야 어떤 일에 대해 전면적이고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속인은 다른 공간을 볼 수 없고 오직 인간 세상에 나타난 득실만 볼 뿐이라 속인이 보는 득실은 영원히 단편적이며 전반적인 실제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다. 즉 일에 대해 단편적인 결론을 내리는데 인간 세상에서 이기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을 보고 자사(自私)가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있다고 여긴다.
속인은 다른 공간의 득실을 볼 수 없고 인간 세상은 마침 반대로 되는 것이다. 사람의 진정한 생명은 주원신이며 주원신의 득실이야말로 자신의 득실이다. 즉 다른 공간의 득실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의 득실이고, 인간 세상의 득실은 진정한 자신의 득실이 아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아무것도 없으며, 인생 과정에서 점차 일부 것들을 얻긴 하지만,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데 결국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 무엇을 지니든 그저 인생 과정 중에 일시적으로 보유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 생명의 주원신에 대해 말하자면 인간 세상의 것은 주원신 몸에 지닐 수 없고 주원신을 따라갈 수 없다. 때문에 인간 세상의 득실은 주원신의 득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 당신 자신의 득실이 아니다. 속인은 이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 세상의 득실을 자신의 진정한 득실이라 생각하고 사심을 움직여 자신의 물질 이익을 많이 얻어낼 방법을 생각해 내고 물질적 이익을 잃지 않을 방법을 찾는다.
속인은 미혹 속에 있어서 자신에 대한 사심의 위해를 모르기 때문에, 자사자리(自私自利)한 가짜 이치를 끌어안고 서서히 가라앉는다.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이미 사심의 위험성을 알고 있으니 속인처럼 그렇게 어리석어선 안 된다. 수련이란 사람에서 신(神)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사람은 자사(自私)하지만 신(神)은 무사(無私)하다. 그러므로 신으로 수련 성취하려면 반드시 사심을 닦아버려야 한다. 이는 수련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길이며 반드시 넘어야 할 관이다. 어느 누구도 사심을 지니고 원만할 수는 없다.
이상의 내용은 현 단계에서 작은 깨달음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15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