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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에서 생각한 경영 문제

오도(悟道)

【정견망】

《서유기》를 말하자면 무슨 새로운 화제는 아니지만, 여기서 내가 생각해볼 것은 개인과 기업이 성공하는 표준은 무엇인가? 개인과 기업이 존재하고 발전하는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가? 기업이 장수하는 핵심 요소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 개인과 기업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가? 등이다.

당승(唐僧) 사도의 서천취경(西天取經) 과정은 한 개인이 수련하고 원만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고, 또한 한 기업의 성장과 발전의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중 사도(師徒) 5인(백룡마를 포함)의 관계는 개인의 주의식과 부의식의 관계, 또는 군주와 신하나 백성의 관계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속에는 일부 작은 시공 간격의 관계(집단 내 종파 관계)도 포함된다.

당승은 이 팀의 핵심이자 관건으로 당승을 구도하는 것이야말로 전체 취경 과정의 진정한 목적이다. 모든 자원과 조건 역시 당승의 취경(取經)을 둘러싼 필요에 따라 배치된 것이다. 거기에 참여한 인물들도 모두 인연에 따라 변화하는데, 보조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주체(主體)의 원만에 따라 날아 올라간다. 즉, 당승이 원만을 이루지 못하면 관련된 모든 이들도 다 원만을 이룰 수 없다. 하나의 팀이나 기업이 그러하듯, 만약 리더가 실패하면 다른 누구도 성공을 주장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당승은 근기가 좋고 층차가 높으며(부처의 제자) 아울러 신성한 사명을 지니고 세상에 왔지만 속세에 떨어진 후에는 육안범태(肉眼凡胎)로 변해 사물의 진상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신불(神佛)에 대한 믿음과 깨달음에 근거해 원만한다. 바로 그가 신통이 없고 진상을 모르기 때문에 각종 마난 속에서 견정하게 정념정행(正念正行)을 견지할 수만 있다면 더욱 소중하고 위대한 것이다.

당승은 애초 사찰을 청소하고 참배하는 것만 알았을 뿐 진짜와 가짜, 선과 위선(僞善)을 몰랐기 때문에 종종 사마(邪魔)가 틈을 타게 만들어 오랫동안 마난 속에 있었다. 호법(護法)인 부원신 오공은 화안금정을 가지고 있어 진짜와 가짜, 선과 악을 꿰뚫어 볼 수 있었지만 당승은 세간의 환상에 미혹되어 청성해지기 어려웠다. 여기에 팔계와 사승이 진흙을 뒤섞어 그를 더욱 미혹시켰다. 리더가 흔들리면 조수가 변화를 강요하기란 어렵다. 오직 이성과 지혜 및 인내심으로 계발하고 이끌어 그 마음을 밝게 하고 의혹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러나 처음에 오공은 이런 자선심과 인내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세 번에 걸쳐 당승을 떠나려 했다. 이는 또한 오공의 사상이 불순한 표현이자, 취경 과정에서 당승을 도와 호위하면서 자신의 지역을 마련하고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고난을 한번 겪을 때마다 지혜를 얻는데, 마난의 고험을 겪을수록 당승의 오성은 점차 제고되었고 마난에 직면해서도 더욱 청성하고 성숙해졌다. 특히 부처님을 믿고 공경하며 수련하려는 마음이 천지를 감동시켰다.

팔계는 팀에서 교활하고 영리한 사람에 속하는데 일부 근기와 능력(천봉원수의 전생)을 지녔지만 종종 사욕(私慾)과 탐욕(貪慾)에 따라 사문왜도(歪門邪道)로 사용했으며 인성(人性)의 악(惡)한 일면에 속하니 포기하고 닦아버려야 할 일념이다. 일정한 범위와 층차 내에서 우주 중에는 음양과 상생상극의 이치가 있고, 또한 사(邪)는 정(正)을 누를 수 없기 때문에 팔계 머리 위에는 줄곧 오공이란 사형이 그를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부인 당승이 선악을 구별할 수 없을 때 팔계의 왜곡된 사설(邪說)에 대해 오공 역시 흔히 아주 무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개인이든 기업이든 리더의 주의식이 청성하고 지혜로운 것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다른 멤버들은 모두 사장이 주는 밥을 먹는 것으로 사장의 얼굴을 보며 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평적인 제약력의 정도는 주로 사장의 태도에 달려 있다. 마치 나라에도 간신이 있고 충신이 있는 것처럼 군주가 지혜로우면 신하가 어질고 백성이 편안하며 나라가 태평하지만 반대로 군주가 어리석으면 간신이 설쳐대고 백성이 원망하며 나라가 망하는 것과 같다.

사화상(沙和尙)은 어리석지만 평범한 민중에 속하는데 순박한 양지와 본념(本念)을 지녔지만 많은 경우 참과 거짓, 선과 악, 옳고 그름, 맞고 틀림 앞에서 두 눈이 흐려지고 망연해져서 어쩔 줄 모른다. 때문에 그는 종종 팔계에게 미혹되어 그를 따르며 당승 앞에서 오공을 험담한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 고생을 겪음에도 오히려 늘 헛수고를 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한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리석은 추종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백룡마(白龍馬)도 신계(神界)에서 잘못을 저질러 속세에 내려와 다시 수련했는데, 팀원의 직능으로 말하자면 물류 지원 인력과 비슷하며, 직접 생산이나 판매에 참여하지는 않고, 묵묵히 정상적인 운영을 위한 지원을 맡았다. 그는 오직 극히 특수한 상황에서만 마(魔)를 물리치고 악을 제거하는 일에 직접 참여했다.

백 년을 수련하면서 같은 배를 타고 건넌다. 한 사람은 마치 하나의 팀과 같아서 그의 사상 속에는 온갖 종류의 멤버들이 다 있다. 팀의 성공 여부는 리더에게 달려 있고 개인의 성공은 주의식에 달려 있다. 어떤 위치에 있든 매 구성원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은 팀에 늘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데, 바르지 못한 염두는 모두 남을 해치고 자신을 해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두 다 같은 배에 타고 있기 때문에 배가 전복되고 돛이 부러지면 누구도 탈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팔계는 늘 안 되면 해산하고 해산한 후 고로장(高老莊)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서천취경이 성공하지 못하면 돼지조차도 되지 못할 텐데 어디에 또 고로장이 존재할지 그가 어찌 알겠는가? 그는 하늘 조정에서 항아를 희롱하다 신인(神人)들에게 죄를 저질렀는데 만약 세간에서 마음을 닦고 업을 없애지 않고 자신의 영혼과 죄업을 마난속에서 깨끗이 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마귀조차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서방취경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로 당승의 확고한 신념과 금강과 같은 의지에 기인한다. 이러한 신념과 의지는 신불(神佛)에 대한 굳은 믿음과 가악투(假惡鬪 거짓 사악 투쟁) 사념(邪念)을 깨끗이 제거한 데서 비롯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긴고주(緊箍咒)를 사용해 마음 원숭이를 통제해 작은 소능소술(小能小術)로 자아가 팽창해 수시로 제천대성이 되어 천궁(天宮)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삐를 당겨 의지란 말[意馬]을 통제하고 팔계와 같은 부류의 사념(邪念 삿된 염두)이 도처에서 일어나 멋대로 하지 못하게 방지해야 한다.

오공의 능력이 아무리 커도 역시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날 수는 없다. 소위 하늘 밖에 하늘이 있고 사람 밖에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언제든 자신이 세운 공에 만족하고 오만해진다면 이는 예의를 잃은 표현이다. 동시에 팔계가 아무리 게으르고 교활하다 해도 역시 神人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소위 사적인 속삭임이라도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과 같고, 어두운 방에 감춘 허물도 신(神)의 눈에는 번개처럼 환한 법이다. 그 어떤 꾸밈이나 요행, 탐욕을 숨기는 행위든 다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팔계는 인성의 악한 일면에 속하니, 팀에서 쫓아낼 수는 없는가? 안 된다. 오직 오공의 통제하에 팔계의 왜곡된 이치를 제거하고 안에서 개조해야만 한다.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똑똑히 가리게 하고 정념을 강화해야만 한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라, 만약 한 사람이 하나의 흠결조차 없고 마성(魔性)이 전혀 없으며 완전히 선념(善念)과 불성(佛性)뿐이라면 그는 바로 신이 아닌가? 또 무엇을 수련하는가? 우리는 바로 좋지 않고 불순해져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비로소 떨어져 내려온 것이다. 바로 우리 마음속에 저팔계가 있기 때문에 세간에 떨어져 내려와 고생을 겪고 감당해야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에 의지해 천천히 사상에서 저팔계를 잘라버리고 각종 유혹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지만 비로소 반본귀진(返本歸真)하고 원만할 수 있다. 이렇게 팔계를 억제하고 잘라내는 과정이 바로 하나의 수련 과정이며 또한 자아를 반성하고 개조하는 과정이다.

귤인지 탱자인지는 종자의 문제가 아니라 관건은 회수(淮水) 이남인지 이북인지에 달려 있다. 기업을 경영하는 중에도 일률적으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고 나쁜 인재를 도태시키는 것에 의존할 수만은 없다. 만약 경영이 개선되지 않고 내부에서 육성하는 기능이 없다면 그 어떤 수혈(輸血) 매케너즘도 모두 헛수고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경영계에서는 우수한 기업은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만 나쁜 경영은 우수한 인재를 평범한 인재로 만든다고 한다.

개인 수련도 마찬가지인데, 오직 안으로 찾고, 마음을 향해 수련하며, 천리(天理)및 양지(良知)와 대조해 끊임없이 자아를 반성할 뿐 밖으로 찾으며 외부 환경의 호전에 따라 순풍차를 타길 기다릴 순 없다. 매 차례 벽에 부딪힌 후, 모든 사람들이 점차 팔계의 게으름, 탐욕, 호색, 거짓말 등의 나쁜 습관을 똑똑히 간파하게 되면 그 왜곡된 이치는 점차 시장을 잃을 것이다. 전체 팀의 정기(正氣)가 모든 공간에 가득 찬다면 마치 햇빛이 대지를 비추면 어둠은 자연히 숨을 곳이 없어져 서서히 녹아 전화(轉化)되는 것과 같다. 이런 정기(正氣)하에서 팔계도 삿됨을 고치고 바름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당승은 당시 이미 정도 성취를 거둔 어제(御弟 황제의 의형제) 법사(法師)로 몇십 년 동안 세간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그는 왜 기어코 고생을 찾고 온갖 마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서천취경에 나섰는가? 이것이 바로 생명의 내원과 인생의 목적 및 의미 등 근본문제와 관련이 있다.

당승은 부처님의 제자인 금선자의 전생으로, 부처님으로부터 동토에 진경(真經)을 전하라는 당부를 받았으니 즉 신성한 사명을 지니고 온 것이다. 세간에서 부모와 육신은 단지 사명의 필요에 따라 인연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이다. 세간의 몇십 년이란 상대적으로 말해 인생의 기나긴 세월에 비하면 한순간에 불과하다. 마치 인생의 길에서 지나치는 역과 같아서 잠시 며칠 머물다 떠나니, 어찌 수레를 멈추고 앉아 저녁 단풍을 즐기며 연극에 빠져 돌아갈 길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인간 세상에서 몇십 년의 즐거움이란 신계(神界)의 억 만 년 소요자재에 비교하면 한순간에 불과하다. 이렇게 작은 것 때문에 큰것을 잃는다면 생명의 비애가 아닌가?

그럼 또 당승이 서천 길에서 겪은 마난은 인위적으로 더해진 것이 아닌가? 당승이 추가로 감당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금선자는 아직 순금만큼 순수하지 않고 여전히 흠과 오점 및 범심(凡心)과 속세의 바람[塵願]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다음 생에 다시 수련해야 했다. 그는 반본귀진하면서 다시 위덕(威德)을 세우는 동시에 성불(成佛)하는 사명을 완성하고 각 방면의 오랜 염원을 끝맺어야 했다. 이렇게 보면 당승이 겪은 각종 마난은 표면적으로 관음보살이 배치해 그 심성을 고험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모두 인연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절대 억지로 더해지거나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당승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겪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얼마나 많은 위덕을 수립하는지는 여전히 모두 필연이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때문에 그 어떤 원망이나 공을 자부하는 염두도 하늘의 뜻을 어긴 것이다.

금선자의 범심(凡心)이란 바로 오공이 공로를 자처하며 오만한 마음, 팔계의 탐욕과 호색하는 마음, 사승의 평범하고 어리석은 마음, 백룡마의 소침하게 세상을 도피하려는 마음 등을 말하며, 속세의 바람이란 온갖 신선, 사람, 요마(妖魔)와의 연원을 선해(善解)하고 자신을 닦는 중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이렇데 본다면 인생과 기업의 성패를 가늠하는 표준은 세간에서 명예나 이익을 얼마나 얻고 잃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경영 과정에서 마땅히 더 고상한 표준으로 요구해야 한다. 즉 도덕이 고상해야 하는데 이 역시 기업이 장수하는 근본이다. 이외에 또 그 성패를 결정하는 요소라면 세간의 기교를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양지 본성에서 얼마나 나왔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선천 양지와 본성이 길을 잃고 미몽 속에서 참과 거짓, 선과 악,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구별하기 어렵다면, 즉 수많은 선택 앞에서 정확하게 선택할 수 없고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무엇이 마음 원숭이와 의지의 말을 가로막는지 말하지 않더라도 일체 인생의 노력은 분명히 맹목적이고 망연해서 재난 속에서 인생을 끝낼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