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수련생
【정견망】
내 생각에 당신이 대법에 손실을 주는 아주 나쁜 일을 하지 않는 한, 진정한 수련인(修煉人)에 대해 말하자면, 넘지 못할 병업관(病業關)이란 없고, 부정하지 못할 구세력의 배치란 없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이런 관난(關難)에 직면하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사람 몸을 잃기까지 하는가? 나는 세 가지 측면에서 내 견해를 말해 보고자 한다.
1. 대법과 자신의 수련에 우리의 인식
우리가 수행하는 것은 우주를 창조한 대법이고 우리 사부님이 창세주(創世主)이심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문자로 이해했는가 아니면 내심에서 우러나온 진심으로 인식했는가?
예를 들어, 당신의 부모가 천하를 주재(主宰)하며 무상(無上)의 권력을 지닌 왕이라 하자. 당신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억을 잃고 아주 작은 마을에 흘러들어 왔고 살다 보니 온몸에 빚을 졌다. 작은 마을 주민에게 이것은 그야말로 하늘처럼 큰 빚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 부모가 천하를 주재하는 왕임을 안다면 당신이 여전히 빚이 하늘만큼 크다고 여기고, 여전히 뛰어넘을 수 없는 격차라고 생각하겠는가? 당신은 여전히 배짱이 없고 자신이 없겠는가?
주지하다시피, 우주 및 우주 중의 일체는 다 우주대법(宇宙大法)이 개창한 것이고 동시에 또 대법의 제약 속에 있다. 우리가 수련하는 것은 우주대법이고, 우리가 동화하는 것이 우주대법이다. 대법의 입자(粒子)가 되려면 우리는 자신을 성취해야 할 뿐만아니라 또한 일체 정(正)의 요소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진심으로 이렇게 인식한다면, 여전히 이런 병업관이며, 이런 관, 저런 관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진정한 대법제자로서 금산(金山)이 우리 앞에 놓여 있어도 보지 못하고, 무상(無上)의 힘이 우리 수중에 있으도 우리는 그것을 사용할 줄 모른다. (물론 우리의 일체 사유, 사유 방식마저 모두 법에 있을 때라야만 이런 능력이 있을 수 있다). 내 생각에 근본 원인은 우리가 진정으로 내심에서 법을 인식하지 못하고, 대법제자의 책임과 사명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지금은 정법시기이고 또한 사부님께서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연장한 시기다. 왜 연장하셨는가? 사부님께서 법을 바로잡고 중생을 구도하려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든 것은 다 이 목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우리는 대법제자로, 우리의 사명과 책임은 바로 대법에 동화해서 사부님을 도와 법을 바로잡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바로 우리가 주도하는 무대이니 우리는 마땅히 주동적으로 이곳의 환경을 개창해야 하며 일체 교란과 파괴를 타파하는 것도 당연히 이속에 포함된다.
사부님께서는 《무엇이 대법제자인가》에서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라, 틀림없이 고생스럽다. 이는 역사적인 책임이 당신들에게 이렇게 큰 중책을 부여했으며, 역사적인 사명이 당신들에게 관건적인 시각에 반드시 이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지게 했기 때문이다. 우주가 성(成)ㆍ주(住)ㆍ괴(壞)ㆍ멸(滅)하는 과정 중에서 대법제자의 출현이 바로 가장 마지막 단계이다. 그렇다면 다시 말해서 생명이든, 물질이든 모두 최후 가장 나쁜 때에 이른 것이다. 표현 역시 가장 복잡하고 선악(善惡)과 정사(正邪)의 분별이 가장 어려운 때이다. 이런 때에 대법제자가 역사가 부여한 사명을 감당하기란 정말로 너무나도 어렵다. 대법제자가 대단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대법제자가 이런 시기에 중생을 구도하고 조사정법 하며 자신이 완성해야 할 사명을 완성하기 때문인데,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대단하다. 역사상 그 어떤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다.”
삼계는 정법(正法)을 위해 개창된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의 주역으로 우리 배후에는 창세주께서 계시고, 우주를 창조한 대법이 있다. 내심에서 대법을 인식하고 우리의 사명과 책임을 인식함은 바로 우리가 일체 교란과 파괴를 타파하기 위한 배짱이자 신심(信心)의 내원이다. 즉, 이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또한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이다.
2. 우리의 사유와 관념을 살펴보자
우리는 대법에 대해 우리 수련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하고 이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사유 및 관념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대법은 아주 크지만 자신은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또는 그렇게 높이 수련하지 못해서 아직은 구세력의 배치를 타파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본다. 표면적으로는 당신이 대법을 수련하는 것 같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사실 사부님께서 당신을 선택한 것이고, 우주가 당신을 선택한 것이다. 역사적인 배치가 당신을 선택한 것이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천상(天上)에는 신(神)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당신이 내려왔는가? 만약 사부님께서 당신을 선택했다면 당신이 당신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대법과 사부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을 진정한 대법제자 속에 놓지 않았다. 당신 자신이 되든 안 되든 당신에겐 뒷받침과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존재는 단순히 당신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당신이 하는 정법 일 자체가 사람 속에서 대법의 한 가지 반응이다. 당신을 교란하는 자체가 바로 정법에 대한 일종의 교란이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당신이 자신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간단하게 당신 개인이 당신 개인에 대한 인식이겠는가! 구세력이 당신에게 배치한 것이고 당신의 사유와 사유 방식에 배치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자신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사유가 당신의 능력을 제한할 것이고, 당신의 호법신(護法神)과 당신 주위의 모든 정신(正神)들의 능력을 제한할 것이다. 그들은 당신을 도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당신을 도우려면, 법리(法理)에 입각해야지만 당신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능력과 정(正)의 요소가 당신 몸에서 일으키는 작용은 또한 당신 생각에 부합해야 한다. 당신이 스스로 안 된다고 여기면 그럼 정말 안 된다.
반대로 당신이 어떤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당신이 바르게 걷고, 당신의 사상이 법에 부합하기만 하면 당신의 능력과 모든 정(正)의 요소는 당신의 사유 상태 속에서 당신을 가지(加持)해 당신에게 길을 열어줄 것이다. 비록 당신의 생각이 정말로 당신이 수련한 층차의 능력을 초과할지라도, 당신이 법의 기점에 서 있기 때문에, 정(正)의 요소 심지어 더 높은 층차의 신(神)마저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심지어 당신의 현재 능력을 초월하도록 가지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층차의 법에 부합했기에 그 층차 법의 힘이 당신 이곳에 반영되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명혜망에 올라온 문장에서 손오공이 흑백무상(黑白無常 저승사자)에 의해 명부(冥府 저승 관아)로 끌려갈 때 그의 수명이 다했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의 이치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죽음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지를 똑똑히 알고 나서 이 말을 아예 인정하지 않았고 또 이런 개념조차 전혀 없었다. 대신 그는 눈을 크게 뜨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찍이 삼계를 벗어났고 오행 중에 있지 않은데, 내가 어떻게 지옥의 관할을 받을 수 있는가?!”
그는 자신에 대해 매우 확고한 신심을 갖고 있었고, 그를 데려간 지옥에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또 있는데 바로 우리의 발정념이다. 특히 생사관(生死關)에 직면했을 때 발정념을, 많은 사람들이 피동적이고 소극적으로 한다. 심지어 많은 이들이 이미 이 사람은 안 된다고 보거나 또는 자신도 스스로 안 된다고 여긴다. 단지 반드시 발정념을 해야 하니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발정념을 해도 결과를 개변하기란 아주 어렵다. 이 문제는 아주 엄중하다.
예를 들어보자. 두 군대가 전투를 하는데 한쪽은 강하고 다른 쪽은 약하다. 그럼 약한 군대의 사람들은 모두 나는 반드시 최선을 다하겠지만 힘의 격차가 너무 커서 그래도 우리가 패배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여러분 생각해 보라! 이는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신이 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선을 다하든 안 하든, 모두 패배의 기점위에서 발버둥치는 것이라 결국에는 분명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소수 병력으로 대군을 이기고, 약자가 강자를 이긴 사례들이 많이 있다. 즉, 우리가 비록 발정념을 한다 해도 우리가 피동적이고 소극적으로 하면, 강력한 법의 힘이 개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로 자신의 사유와 관념을 잘 살펴보고 정법(正法)의 기점에 서고 중생구도의 기점에 서서 법에 부합하는지 구세력에 부합하는지 살펴야 한다. 특히 큰 시비(是非) 앞에서 또는 생사(生死) 앞에서 일념의 차이가 천지 차이로 벌어진다.
3. 행동으로 부정
이상 두 가지 외에도 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행동으로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신합일(身神合一)은 인식·사상·관념에서 모두 법(法)의 기점에 부합해야 하는데, 사람의 행동 역시 대법의 요구에 부합해야 한다. 관(關)을 넘을 때, 특히나 큰 관을 넘을 때 신체가 무척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나는 곧 이런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만약 당신의 신체가 아주 고통스럽고 불편하며 움직이기 싫다면 그것은 구세력이 필사적으로 당신의 신체를 통제해 당신더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이는 당신이 신체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다. 만약 당신이 그것에게 순종한다면 당신은 잠시 큰 고통을 겪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당신은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따르게 될 것이고 당신의 신체도 그것에게 더 단단히 통제되고 또한 갈수록 더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일본에 한 노년 동수가 있는데, 전에 큰 관을 넘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당시 온몸의 뼈가 분쇄지는 그런 느낌이 들어 움직일 수 없었고 그저 누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병원에 보내려 했지만 그녀는 가지 않았고 또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화장실을 가려면 스스로 침대에서 조금씩 움직여야 했고, 또 침대에서 아래로 내려와서는 다시 조금씩 움직여야 했다. 이렇게 지척에 있는 화장실까지 가는 데 꼬박 2시간이 걸렸다. 연공을 할 수 없으면 그냥 침대에 누워서 연마했고, 법 공부를 할 수 없으면 법을 외웠는데, 어쨌든 스스로 정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창조했다. 지금은 걸음이 날렵해서 일반 젊은 사람들보다 활력이 넘친다. 그녀는 사부님께 대한 믿음과 대법에 대한 믿음에 의지해 행동으로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했기 때문에 큰 난에서 걸어나올 수 있었다.
당신이 진심으로 구세력을 부정할 때 당신 신체 내 정(正)의 요소들도 구세력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당신의 호법신과 또 당신 주변의 정신(正神)들도 모두 당신을 돕고 있으며, 사부님과 대법도 당신을 가지(加持)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넘어가지 못할 관이 있단 말인가?
4. 구체적인 방법
이치는 모든 사람이 다 명백하겠지만 구체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면 여전히 많은 의혹이 있다.
우선 법 공부와 연공을 매일 보장해야 하며, 법 공부할 때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공부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구세력의 배치를 타파하는 기초다.
이외에 나는 또 일부 체험이 있는데 여러분이 참고로 삼기 바란다. 내 방법은 또 아주 간단한데 바로 고요함(靜)이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아무리 고통스럽고 아무리 짜증 나고 아무리 넘어가기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가급적 자신을 고요히 하고 가급적 조용하게 자신의 내심을 체험하거나 심지어 내심(內心)의 내심, 즉 심층 공간의 자신, 즉 미시적인 자신을 체험하려고 해야 한다. 당신은 그곳은 편안하고 고요하며 아무런 고통이 없고 상화(祥和)로운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런 고통과 짜증은 단지 표면에 떠 있을 뿐임을 발견할 것이다.
이때 당신은 정말로 그런 고통과 그런 짜증은 당신이 아니며 단지 당신 표면에 붙어 있는 한 층의 물질임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당신은 쉽게 그것을 당신 자신과 분리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일시적으로 당신의 표면 신체를 통제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면 고통 역시 단지 일종 단순하고 표면적인 고통일 뿐이다.
사람들은 흔히 극도의 고통을 느끼거나 심지어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느낀다. 사실 그것은 이미 단지 신체적인 고통일 뿐만 아니라 사람 마음의 고통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않고 우리의 마음을 통제하는 권력을 되찾는 것이다. 이때 그런 육체적인 고통을 당신은 또 통제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밀라레빠 부처님이 병업을 드러냈을 때 그의 마음에는 고통이 없었다. 이것은 우리 수련인이 마땅히 도달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상태다.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이기 때문에 설사 이런 고통이라도 감당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감당하지 말아야 하며 혹은 선해(善解)하고 혹은 전화(轉化)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녔기 때문에 이런 교란을 받을 수 없고 대법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요해질 수 있는가? 아마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은 동수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현실에선 동영상 등 우리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아주 많다. 내 생각에 우리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가급적 동영상을 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속인들의 그런 것이 당신의 머리에 영향을 주고 신체 속을 난잡한 것들로 가득 채울 수 있다. 당신 자신이 고요해질 수 없다면, 그것은 또 당신에게 심각한 교란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가 연공할 때 졸리고 기운이 없으며 정신을 집중할 수 없거나 심지어 사람 이쪽 면의 교란도 모두 그것과 관련이 있다.
다음은 장시간 발정념 하는 것인데, 이는 아주 중요하다. 우리 자신 공간의 그런 나쁜 요소와 구세력의 교란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장시간 발정념을 하면 사람에게 아주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데, 사상이 명확해지고 집중해서 일을 할 수 있으며 번거로움이 줄어들고 교란이 적어진다. 오직 당신이 견지(堅持)할 수만 있다면 이런 것들은 모두 체험할 수 있다. 아울러 아주 많은 큰 관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해결할 수 있다.
이렇게 가급적 동영상을 보지 말고 장시간 발정념을 하고 오직 견지하기만 하면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서서히 고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에 대해 일종 오해가 있다. 즉, 반드시 가부좌를 해야 하고 아무런 교란도 없어야 고요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인식은 이렇다. 시작할 때는 그럴 수 있지만, 마음이 천천히 고요해짐에 따라 당신이 어떤 일을 하든 늘 고요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공부할 때 집중할 수 있고 배우는 것도 빠를 것이다. 당신이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점차 고요해질 수 있다고 느낄 때, 당신은 늘 당신의 내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처음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비교적 표면일 수 있지만 당신은 서서히 보다 심층(深層) 내심(內心)의 상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서서히 당신은 체험이 더욱 깊어질 것이며 또한 더욱 미시적이 될 것이다. 어느 정도에 도달했을 때 당신은 외부 세계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당신의 미시적인 곳의 자신은 안정적이고 상화함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이 만약 그(당신 심층의 자신)를 지킬 수 있다면 표면의 그 어떤 감수도 모두 당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데 즉 근본적으로 당신을 움직일 수 없다.
속인은 “태산이 눈앞에서 무너져도 안색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부님께서 《정진요지》〈대폭로〉에서 말씀하김 “머리가 떨어져도 몸은 여전히 가부좌를 하고 있을 것이다.”란 내가 이해하기에 바로 이런 상태다.
사실, 우리가 이런 상태에 도달할 때면 표면의 병업은 또 아무것도 아니다. 감당하려 하면 밀라레빠 부처님처럼 감당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미 더 이상 당신을 실질적으로 해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해결이 필요하다면 그럼 곧 해결할 수 있다. 그때 당신이 움직인 염(念)은 모두 미시적인 곳에서 내보낸 것으로 모두 지혜가 있는 것이라 당신이 펼쳐낸 능력도 미시적인 곳에서 온 것이다. 그럼 당신 신체는 곧 아주 많은 일들을 해결할 수 있다. 그때 당신은 또 무슨 병업이 있다는 생각과 관념조차 없을 것이다. 마치 사부님께서 《홍음 6》〈남을 제도하고 자신을 제도함은 어렵다네〉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상사(上士)는 난(難)을 만나면 웃음으로 풀어내고”와 같은데 또 무슨 넘기지 못할 관이 있겠는가.
이상은 단지 개인의 작은 인식일 뿐이다. 여러분이 법을 스승으로 삼아 교란이 좀 줄어들고 우리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해서 진정으로 조사정법하고 중생을 구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