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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병법, 의술에 정통했던 도인: 갈홍의 전설적 인생 (중)

청원(清源)

【정견망】

저서로 인도(人道)를 바로잡고 과거의 원류를 만들다

갈홍은 16세 때 정은에게 수도(修道)를 시작했고 처음에는 유가 경전을 배웠다. 그는 뛰어난 학습능력과 더불어 매우 열심히 공부하여, “밤이면 책을 쓰고 외우며 익혀 유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진서》) 20대 때 갈홍은 일가(一家)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포박자외편》을 지었는데 이 책은 인간 세상의 득실(得失)과 세상 일의 좋고 나쁨을 말해 유가의 범주에 속한다.

유가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도리를 말하는데, 《포박자외편》에서 우리는 갈홍이 작게는 개인의 수양, 백성들의 풍속에서 크게는 정치의 득실 및 치국의 방략(方略)에 이르는 견해를 체계적으로 볼 수 있다.

갈홍은 백성들의 민간 풍속을 아주 중시했다. 그는 당시 사회 사람들이 갈수록 예의규범을 중시하지 않고, 남자들은 갈수록 방탕해져서 “내실에 들어가 부녀자를 보았다”고 기록했다. 여성들의 행동도 갈수록 경박해져 사회적으로 남녀 간의 난잡한 일과 갈등이 갈수록 많아졌다. 그는 남녀유별(男女有別)을 중시했고, 남녀간의 부적절한 관계는 미연에 방지해야 하며, 성인(聖人)이 정하신 엄격한 행동 준칙을 회복해 이런 음란한 풍조를 막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도덕의 타락은 또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도 나타난다. “세속의 복장은 자주 변한다. 간혹 옷깃을 넓게 벌리고 큰 띠를 두르다가, 또 옷이 몸에 달라붙고 소매도 달라지는데 때로는 길어서 자락이 땅에 끌리고, 때로는 짧아서 발을 덮지 않는다.” “난을 당한 이래 사물이 여러 번 변해 관(冠), 신발, 소매의 재료 등을 수시로 고쳐 일정함이 없다. 잠시 길어졌다 또 짧아지고, 한번 넓어졌다 다시 좁아지며, 홀연히 높아졌다가 낮아지고, 혹은 굵거나 가늘어지는데 장식에 일정함이 없는 것을 즐긴다.”(《포박자 외편》)

이런 사회 현상은 현대와 매우 유사한데 옷의 유행이 해마다 변한다. 어떤 사람은 바지에 큰 구멍을 뚫어 ‘패션’이라 하고, 어떤 여자는 옷이 몸을 가리지 않고 바지가 허벅지까지 올라와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며 색욕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이른바 ‘옷을 입는 자유’를 주장한다. 이에 대해 갈홍은 유행을 따르길 원하지 않았다. “유행을 따르는데 서툴러 옷의 변화를 따를 수 없어 변하지 않았다.” (《포박자 외편》)

갈홍은 민간에서 나타난 이런 풍조가 귀족층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고 보고 “그러나 풍속과 습관은 바로 경성(京城)의 왕손(王孫)이나 귀인들의 소행이라 할 수 있다.”(《포박자 외편》)고 했다. 그는 사회가 혼란이 이유는 사람들이 전통 예법과 도덕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진대 사족(士族)들은 주로 노장(老莊 노자와 장자)을 숭배했고 청담(淸談)이 유행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도덕이 타락해 지혜가 제한되었고, 게다가 명리심, 승부심, 말재간을 과시하는 등의 각종 심리적 영향 아래 의식하든 않든 노자의 도법(道法)을 왜곡해 많은 사람들이 유가의 예의를 숭상하지 않는 것을 풍류 내지는 높은 경지로 여겼다. 사실은 방탕하고 무례하며, 행동이 괴팍한 것이다.

“노자와 장자를 잘못 인용해 멋대로 하는 것을 중시하고 세세한 예절을 따지지 않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사람이 단속하지 않고, 교만하고 방일한 것을 도(道)를 체득했고 말한다.”

“이런 풍속이 이어지니, 예교(禮敎)가 점점 퇴락하고, 공경과 양보는 숭상하지 않고 오만함이 풍속이 되었다. 벗들의 술자리에서 쪼그려 앉거나 웅크리고 여름에는 웃통을 벗었다.”(《포박자 외편》)

유명한 서법가 왕희지(王羲之)의 다섯째 아들 왕휘지(王徽之)도 이런 변이된 이념의 영향을 받았다. 왕휘지는 일찍이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 수하의 기병참군을 맡았다. 한 번은 환충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관서에 근무하느냐?”

그가 대답했다.

“무슨 관서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늘 말을 끌고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마조(馬曹-말을 관리하는 부서)인 것 같습니다.”

환충이 또 물었다.

“관부(官府)에 말이 얼마나 있느냐?”

그가 대답했다.

“말에게 묻지 않고서야 말의 수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환충이 또 물었다.

“근래 말이 몇 마리나 죽었느냐?”

그가 대답했다.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습니까?(未知生焉知死)”

[역주: 원래 이 구절은 《논어》〈선진〉 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인데 이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장난이다.]

나중에 이러한 음주 방종하고 예속을 초월한 이런 소위 ‘높은 품격’은 점차 관능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방탕한 향락으로 발전했다. 어떤 타락한 무리는 심지어 남의 집에 침입해 주인의 처첩을 끌어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길 정도로 도덕이 타락했다.

동시에 갈홍은 또 “신부를 희롱하는 법(혼인할 때 신방을 훔쳐보는 것)”은 나쁜 습성이므로 제지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갈홍이 말한 이런 상황은 오늘날 중국에서도 여전히 유행하고 있다. 다만 그 방법이 더욱 악랄하고 천박해져서 때로는 피해자가 다치거나 심지어 인명 피해까지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갈홍은 이런 각종 혼란 현상을 어떻게 근절할 것인가에 대해 개인의 수양을 중시하고 욕망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보기 좋은 것을 따르지 말고, 듣기 좋은 것을 따르지 말며, 좋은 냄새 를 따르지 말고, 입이 좋아하는 것을 따르지 말아야 하고, 마음에 하려는 것을 멋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포박자외편》)고 했다. 그는 사람은 마땅히 안빈낙도(安貧樂道)해야 하며, 청고(淸苦)한 생활이 고상한 품행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갈홍은 비록 유학에 정통했지만 그렇다고 유학에 얽매이진 않았다. 그는 “도(道)는 유(儒)의 근본이고 유는 도의 끝이다.”라고 보아 유가와 도가의 관계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또 덕과 형벌을 모두 중시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仁)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직 인만으로는 다스릴 수 없고 형벌이 천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형벌을 폐지하면 백성을 다스릴 수 없다.”(《포박자외편》)

형벌은 사회의 악한 무리들을 징벌하고 다스려 사회의 불량한 풍기를 막아 백성이 인(仁)으로 돌아가게 하고 천하가 다스려지게 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너무 “어질거나(仁)” 또는 너무 “엄격한” 법률은 모두 많은 사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현재 많은 법률 전문가들이 법률을 도덕의 최소 요구 사항으로 간주하고 연구하기 위해 규정을 파고들고 있지만 실제로 많은 법률 조항은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즉 법률의 제정이 더 상세할수록 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정도(正道)에서 점점 멀어지고 사회 모순은 점점 더 심화되고 복잡해지는데 종종 새로운 법이 하나 등장하면 법의 허점을 파고드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법률 제정이 백성들의 풍속을 바로잡거나 도덕을 바로잡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원인이다.

과거에는 인심이 순박하고 물질적 조건도 단순해서 종종 정책 법령이 간단명료하면 됐으나, 역사의 발전에 따라 인심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이기적이며 사회도 갈수록 다양해져 과거의 방식은 점차 오늘날의 사회에 적합하지 않게 되어 갈홍은 선왕(先王)의 일부 정책들은 다시 심의해야 한다고 제기하고 개혁을 주장했다.

위진시기에는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실시해 해당 주군의 중정관(中正官)이 어진 덕과 재능이 있는 사람을 선발했다. 이들은 인재를 찾아가 탐방하고 평가하는 책임을 맡았다. 위무제 시기 오직 재주만 있으면 등용한다는 원칙으로 문벌을 보지 않았고 한동안 조정에 인재가 가득했다. 그러나 이후 사회 풍속이 변함에 따라 중정관은 대부분 문벌 가문의 자제들이 맡았다. 그러다 보니 폐단이 두드러져서 명문대가에서 자기 일복을 선발해 요직을 맡겼다. 소위 “문벌만 알고 그 사람이 어질고 어리석음은 알지 못했고” 더 나아가 “상품은 한미한 가문이 없고 하품에는 사족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정책을 실시하고 백성을 교화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명문대족이 조정을 장악하자 동진시기에는 천하는 “왕씨와 사마씨가 함께 다스린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런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 갈홍은 원대한 식견을 갖고 체계적인 인재선발 시험을 제안했다.

우선 관원 선발 문제에서 진정으로 재능과 학문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려면 추천받은 인물의 인품과 재능을 총체적으로 파악한 뒤 통일된 ‘시험답안’을 받아야 한다. 시험 불합격자는 추천자와 피추천자 모두 처벌해야 한다. 부정행위 및 뇌물에 대한 처벌은 가중해야 한다.

둘째, 시험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미리 시험문제를 작성하되, 출제자는 반드시 시험 전에 외부와 격리하고 응시자는 그 자리에서 문제를 풀게 한다. 고시 합격자도 당장 중책을 맡길 것이 아니라 작은 관직을 주어 능력을 검증해야 한다.

당시 문벌 정치의 병폐를 고치고 후대의 과거제도의 모태가 될 만큼 성숙했다는 갈홍의 시험을 통한 선발 제도는 현대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멀리 앞을 내다본 그의 식견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위기상황에 벼슬에 나가 공을 이루고 물러나다

갈홍은 평생 글을 썼지만, 그의 군사적 재능을 언급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병법고허월시비요법(兵法孤虛月時秘要法)》, 《병사방기단잡기요(兵事方伎短雜奇要)》 등의 병서(兵書, 모두 실전됨)를 저술했고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갖추었다고 한다. 게다가 갈홍은 어렸을 때 무술을 익혀 활쏘기, 칼, 곤봉을 할 줄 알았는데 특히 그의 곤봉 실력은 “예리한 칼날과 긴 창들을 휘저을 정도로” 발군이었다.

진 혜제(惠帝) 태안(太安) 2년(303년), 장창(張昌)이 유민들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켜, 그 부대가 석빙(石氷)을 양주(揚州)로 쳐들어가 6개 주가 전화(戰火)를 당했고, 이미 반란군과 결탁한 자들이 있어서 정세가 아주 위급했다. 오흥(吳興) 태수가 여러 차례 갈홍을 불러 싸움을 돕게 했다. 갈홍은 마을 사람들이 공포에 떠는 것을 보고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백 명을 모집하여 군대에 합류시켰다.

한 차례의 전투에서 갈홍(葛洪)의 군대는 승리했고, 장병들은 반군이 약탈한 보석과 금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각 지역의 군대는 병사들이 재물을 거두도록 내버려두었다. 갈홍은 군사를 잘 다스리는 방법이 있어서 유일하게 그가 통솔하는 병사들만 대열을 떠나지 않았다. 나중에 매복해 있던 반군이 틈을 타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많은 병사들은 몸에 재물을 가득 메고 있어서 반군이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오자 투지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때 갈홍은 군사를 거느리고 삼엄한 태세를 취하여 반군에 저항하고 여러 군사의 궤멸을 구했다.

훗날의 출정에서 갈홍은 반란군 장수 한 명을 참살하고 많은 적을 죽였으며 이 공로로 복파(伏波)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갈홍은 자만하지 않고 상을 아랫사람과 지인, 옛 친구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한동안 그의 사적이 미담으로 전해졌다. 진 원제(元帝) 때 사마예(司馬睿)가 승상으로 있을 때 갈홍은 또 당시 전공을 인정받아 관중후(關中侯)에 봉해졌다.

갈홍은 전투 때 구결을 외우는 비법(秘法)이 있어서 백전백승할 수 있었다.

“또 도순(刀楯 칼과 방패 )과 단도, 한쌍의 창을 받았는데 모두 구결이 있어서 사람을 잡을 수 있고 또 비법(秘法)이 있어서 그 교묘함이 입신의 경지였다. 만약 이 도(道)를 모르는 자와 맞서면,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포박자외편》)

그러나 이에 대해 갈홍은 하찮은 재주로 여겨 수련하여 신선이 되는 대도와는 비교할 수 없다고 여겼다. 반란이 평정 후 갈홍은 공명(功名)에 연연하지 않고 창을 버리고 갑옷을 벗고 낙양으로 기이한 서적을 수집하러 갔다.

의술에 정통해 세인을 구제

고대에는 도홍경, 손사막, 왕빙, 주단계 등 많은 수도인들이 의술에 정통했다. 이에 대해 갈홍은 “그러므로 옛날에 도를 닦은 사람들은 처음에 인근에 재앙을 당한 사람들를 구하기 위해 의술(醫術)을 겸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했다. 갈홍도 마찬가지로 도를 닦는 초기에는 의술을 겸해서 닦았다.

갈홍은 인자한 마음을 품고 위급한 사람을 도왔는데, 어려운 사람을 도와 종종 병을 치료하며, 때로는 약값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는 “도를 위하는 자는 위급한 사람을 구해 화를 면하게 하고 질병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 억울한 죽음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을 높은 공로로 삼는다”고 말했다.(《포박자내편》)

그러나 한 사람의 힘으로는 천하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할 수 없자, 갈홍은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휴대하기 간편한 구급처방이란 의미》을 써서 간단하고 효과적이며 쉽게 구할 수 있는 처방을 모아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여 백성들이 사방으로 의사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게 하였다.

“내가 오늘 이를 요약해 《주후구졸(肘後救卒)》 3권으로 만들었는데, 대개 얻기 쉬운 약이 많으니, 또 가격이 저렴하고 약재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또 뜸을 겸하되 혈자리가 아니라 뜸 뜨는 위치를 알려주었다. 누구나 보면 쓸 수 있고 혹 집안에 없어도 찾아보면 쉽게 갖출 수 있다.”(《주후비급방》)

오늘날 중국에서는 전통 중의학이 쇠퇴해 사람들은 고대의 약방(藥方)만 계승할 뿐 전통적인 의도(醫道)는 계승하지 않았다. 도를 닦지 않으면 중의학의 더 깊은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중의학의 정화(精華)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이 긍정보다 크며, 더욱이 중의 병치료에서 일부 불가사의한 방법과 사적들을 인정하길 꺼린다. 그러나 갈홍(葛洪)이 지은 《주후비급방》은 후대에 중의학 발달을 위해 대문을 열어준 게 틀림없다.

이 책은 폐결핵, 나병, 시주(屍注 시체에서 나온 세균에 의해 감염되는 질환)와 같은 많은 감염성 질병에 대해 상당한 인식이 있었고 천연두의 위험성과 감염성에 대한 설명은 세계 최초의 기록이다.

책에는 광견병 치료법도 적혀 있다. “사람을 문 개를 잡아 그 뇌수를 꺼내 물린 상처에 바르면 다시 재발하지 않는다.” 미친개의 뇌를 상처에 바르는 방법은 근대 파스퇴르의 광견병 백신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갈홍의 높은 약물학적 수준에 감탄하며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옛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치료법을 고안해 냈는지에 깊은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다.

또한 갈홍은 쓰쓰가무시병, 옴같이 기생충에 의해 발생하는 질병에 대해 세계 의학 역사상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기록을 남겼다.

특히 언급할만 한 것은 아르테미시닌 연구로 노벨의학상을 받은 중국 과학자 투유유(屠呦呦)는 《주후비급방》에 기록된 말라리아 치료법에 영감을 받았다. “청호(靑蒿 개똥쑥)을 물 2승(升)에 넣고 즙을 내어 한번에 먹는다.” 이 책의 효능을 짐작케 한다.

갈홍은 또한 《금궤약방(金匱藥方)》 100권을 지었는데, 책에는 많은 약용식물의 형태적 특징, 생장 특성, 주요 산지, 약재로 쓰이는 부분 및 치료 작용 등에 대해 상세한 기록과 설명을 하여 후세에 귀중한 처방과 경험을 남겼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