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秦政)
【정견망】
편집인의 말: 이 시리즈는 본래 인민보(人民報)에 연재된 것으로 저자가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금강경》에 대해 논술한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이 종교계(특히 불교계) 인사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데 일정한 참고 가치가 있기에 이곳에 옮겨 싣는다. 종교계 인사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 대법제자들은 볼 필요 없다. 모두 법을 스승으로 삼아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하기를 바란다.
9. “무슨 까닭이겠느냐?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중생상(衆生相)ㆍ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계속 이어서 설명한다. 왜 이러한가? 보통 사람들은 분별상(分別相)으로 인해, 사람이 세간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분별상에 주의를 기울인다. 마치 장자의 말처럼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만물은 자신은 귀하고 서로 천시하지만 도(道)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은 귀천이 없다.”는 것과 같다.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이것 아닌 것이 없다는 도(道)를 말한다. 바로 전지(全知)와 완전히 통찰한 경계에서 본 것이다. 진정한 보살은 이미 구경공성(究竟空性)하고 원만자재(圓滿自在)한 각자이니 그에게 상을 보여줄 필요는 없고 그 한 층의 우주 법리 표준에 동화하라고 할 뿐이다. 사람의 관념과 그 한 층차에 대한 사람의 관념적인 견해가 없다.
비유하자면 만약 아상(我相)이 있다면 필연코 아(我)에 집착한다. 만약 인상(人相)에 집착한다면 사람의 생로병사 등 일곱 가지 고통에 대해 모두 느끼고 집착할 것이며 밝은 도가 아니다. 내가 분분히 세간에서 만나는 것도 모두 감수를 가져다줄 수 있다. 만약 또 중생에 대해 분별상이 있다면 곧 분별이 있는데 이 사람과 그 사람의 외모, 태도도 이 때문에 마음속에 차이를 생기게 할 수 있다. 또 수자상(壽者相)에 집착하면 일체는 다 부동한 층차 법(法)의 연변 과정의 표현에 불과할 뿐임을 똑똑히 모르는 것이다. 보살의 구경공성(究竟空性) 원만은 절대 이런 얽매임이 없다. 그렇다면 당신이 사람의 언어로 말하려 한다면 마땅히 어떤 마음에 “머뭄(住)”을 말하는데 마치 노자가 도(道)를 마주해 그저 억지로 ‘공(空)’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공(空)은 사람들이 말하는 ‘없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만약 억지로 설명하자면 바로 ‘집착 없음’을 의미하는데 아울러 ‘누락이 없다.’ 이는 마치 한 사람을 한 층에서 더 높은 층차로 깨끗이 씻는 것과 같다. 그럼 마땅히 아래 한 층의 어떤 것이든 다 없다고 해야 하지만 즉 아래층의 것이 텅 비어 완전히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높은 ‘유(有)’와 존재다.
10. 다음으로 ‘제4품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을 말해 보겠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법을 구분해서 인용하는 것은 그것을 승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이렇게 습관이 되어 있으니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서다.
〖“또 수보리야, 보살은 법에 대하여 마땅히 머물러 있는 생각 없이 보시(布施)를 해야 하나니, 이른바 색(色)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囑)ㆍ법(法)에도 머무르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이렇게 보시를 행하여 상(相)에 머물지 않아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福德)을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동쪽에 있는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쪽ㆍ서쪽ㆍ북쪽과 네 간방[四維]과 위아래에 있는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공덕도 그와 같아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가르쳐 준 대로만 머물지니라.”〗
부처님은 수보리가 처음에 말씀하신 법리를 이해한 것을 보고 계속해서 깊이 말씀하셨다. 그래서 “또”라는 단어가 나왔다. 이를 통해 석가모니, 공자, 노자, 예수 등 진정한 대각(大覺) 대덕(大德)은 모두 극히 구경공성과 원만한 지혜가 있어 가르침에 능숙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완전히 그 속에 들어가지 않고도 중생의 구체적인 정황에 맞춰 적절하게 설법하실 수 있다.
현대 서양에서는 이를 총결해 ‘코칭 기술’이라 하는데 사실 무슨 새로운 것이 아니다. ‘분리, 이타(利他), 계몽’이란 개념은 일찍이 각자(覺者)들이 자연스레 사용해 오던 방법일 뿐이다. 무엇을 분리하고 무엇을 계몽하는가? 만약 코치 스스로 진실한 깨달음이 없다면 단지 공리주의나 눈앞의 이익과 같은 것을 말할텐데 이런 기술을 사용해도 사실 아주 저능한 것이다.
마치 요가의 진정한 내원은 이전 시기 인류 사회의 수련 명사였지만 이번 세상 현재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원래 면모를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서, 세속에서는 요가를 무슨 건강 증진과 다이어트 방법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진법(真法)은 모든 원시적인 창설자에 두루 분포하는데, 매 한 층차의 본원 물질과 법(法)의 존재 상태는 사실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고 빠뜨린 것이 없다.”
그 한 층에 도달한다는 것은 사실 또 그 한 층 법리에 동화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한 층 우주의 힘과 지혜가 당신에게 열려 당신이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실질이다. 그렇다면 보살 경계에 도달하면 법에 대해 마땅히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 공자가 만년(晩年)에 한 말을 이용해 설명해 보자.
“삼십에 서고, 사십에 불혹하고, 오십에 천명을 알고, 육십에 귀가 순해졌고, 칠십에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사실 바로 일종의 진정한 동화와 자재한 원만은 그 아래의 모든 것을 무엇이든 다 알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은지 아는 것을 의미한다. 법(法)이란 더 이상 외재적인 규정 원칙이 아니라 내화(內化)된 자성(自性)의 존재다. 마치 물과 같아서 형태가 없지만 형태 있는 것을 만나면 부합할 수 있고, 일체 사물을 포용할 수 있으며 일체 속에 원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런 경계에 도달하면 진실로 집착이 없고 그 경계 아래로는 능력이 대단히 커서 불가능이란 없고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음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부처님은 허공(虛空)을 예로 드셨는데, 이는 사실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또한 은유이다. 즉 비어 있어서 모든 유형의 것을 포용할 수 있다. 이 상태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함에 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흔히 “상을 드러내는데[著相]”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눈으로 본 것조차 무시한다. 실질적으로 말한 것은 바로 집착이다.
상을 드러내지 않음이 바로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하늘과 땅을 포용하는데, 사람에 대해 무엇인들 용납할 수 없겠는가”를 알 수 있다. 원만해서 자성(自性)이 공명(空明)한 경계에서 모든 것을 보면 자연히 분별상 속에서 중생의 어리석음, 의혹과 가련함을 볼 수 있다. 물론 구경원만(究竟圓滿)한 부처님은 “고금을 비웃고 인간 세상 가소로운 사람을 비웃는” 초연함을 지닌다. 서양 속담에 “인류가 생각하면 신(神)은 곧 웃는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런 뜻이다.
완전한 공성(空性)과 전지(全知)한 경계는 그 어떤 부분적인 인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때 당신은 진정한 천의(天意)의 운화(運化)를 알 수 있고 부처님과 보살도 반드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일을 해야 함을 알게 되는데 그들 자신이 우주 대법의 산물이자 수호자다. 보다 높은 경계에서 보면 그들은 또 단지 우주 법(法) 중에서 부동한 층차의 입자로 존재할 뿐이다.
마치 큰 바다의 생각과 바다속 고래의 생각이 다른 것과 같은데, 고래는 비록 바다에서 가장 큰 생물이지만 그것의 존재는 바다에 달려 있다. 그것은 아마 자신의 생각이 바로 바다의 생각과 같을 거라 여기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보다 높은 층면에서 공성(空性)에 대한 견해다. 공성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때야 우리는 주불(主佛)께서 말씀하신 “집착 없음이 진정한 공이다.”(《정진요지》〈무엇이 공인가〉) “깡그리 버리는 것만이 누락이 없는 더욱 높은 법리(法理)이다.”(《정진요지》〈원용〉)라고 말씀하신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법은 부원신(副元神)에게 말한 것이고, 오늘날 우리가 이 경을 해설하는 것은 단지 경전 자체를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교가 전해져 나온 진정한 목적을 환원시켜 문화적인 각도에서 사람들의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역사상 잘못 꿰인 단추를 풀고 중생이 청성(淸醒)해 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보시(布施)란 여기서는 또 부처님을 도와 법을 전하고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11. “무주상 보시[不住相布施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란 무엇인지 일부 사례를 들어 설명해보자. 예를 들어, 사람이 밥을 먹지 않으면 굶어 죽지만, 한 끼에 한 톤을 먹어야 한다면 설사 인삼이며 산해진미가 가득 차 있다해도 죽을 것이다.
작은 범선(帆船)에 5명만 태울 수 있는데 당신이 배는 사람을 태우는 것인데 왜 50명은 태울 수 없냐고 한다면 그것은 재난이 될 것이다.
물 한 잔을 달라고 하자 한 잔의 물을 주는 대신 “아닙니다, 나는 동쪽으로 오월(吳越)에 가서 동해 용왕더러 동해의 물을 끌어다 당신을 구하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냉장고는 원래 음식을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보존할 수 있지만 냉동에 적합하지 않은 물건을 잘못 냉동시키면 오히려 빨리 상할 수 있다. 가령 고추와 양배추를 얼리면 오히려 빨리 상하고 평소보다 더 빨리 나빠질 것이다. 계란도 냉동하면 상해서 먹을 수 없다.
이런 지혜를 유가에서는 ‘중용(中庸)’이라 불렀다. 진정한 중용은 결코 단순한 중간이나 심지어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 아니라 공성(空性)으로 집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사실 모든 사람이 다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음식, 의복, 주거 및 교통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절제하고 적절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상황에 맞게 적응하는 것을 안다. 가령 만금유(萬金油 피부연고의 일종)로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거나 인삼은 가장 좋은 약이니 이것으로 모든 병을 치료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것이다.
사실 감기를 치료해 보면 값싼 시호(柴胡)가 비싼 인삼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일을 하면서 중국의 역대 지혜는 늘 “그 나라에 들어가면 풍속을 따라라”, “현지 상황에 적응하라”,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다. 사실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도 같은 내함(內涵)이 있다.
보시하는 심태는 완전히 열려 있는 것으로 중국 고대에는 이를 ‘공(公)’이라 칭했다. 도(道)는 자연을 본받으니 법은 자연스럽게 사용해 몸과 마음이 아주 공정해야 한다. 바로 이런 심태다. 일단 이것을 알면 당신은 더 이상 경직되거나 사람의 감정으로 진정한 지혜를 대하지 않을 것이다. 공성원명(空性圓明)한 대각(大覺)은 그 지혜가 무한한 것이다. 공자의 말로 하자면 “군자는 모든 일에 극치까지 사용하지 않음이 없다.[君子無所不用其極]” 즉, 모든 것을 자유롭게 쓰되, 늘 그것의 극치까지 사용해 천지(天地) 조화에 참여해 생명이 깨닫고 승화하게 한다.
12. 이제 “제5품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을 살펴보자.
〖“수보리야, 네 생각이 어떠하냐? 신상(身相)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신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는 없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께서 신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신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상(相)은
모두가 허망하니
상이 상 아닌 줄 알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깨달은 이의 설법은 이렇게 차근차근 잘 가르쳐주신다.
“수보리야, 네 생각이 어떠하냐?”는 수보리야 이해했느냐? 무슨 의문이 있느냐? 하는 물음이다. 더 이상 의혹이 없음을 알고 이어서 다른 질문을 한다. 사실, 《금강경》의 전개 과정은 수보리가 자신의 사로(思路 생각의 길이나 실마리)와 생각을 명확히 하도록 방법과 지혜의 측면에서 매우 완벽한 ‘코칭 기술’이다.
이어 진일보로 “신상(身相)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라고 묻는다. 여기에는 두 층의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수련자로서 자신이 만약 공성구경의 원만에 이르지 못하면 흔히 사람 생각(보통 사람의 감정이나 존경)을 사용해 부처님을 생각하거나 가지(加持)나 복 받기를 바란다. 실제로는 모두 구(求)하는 것으로 일종의 망심(妄心)이지만 흔히 깨닫지 못한다. 이것은 하나의 장애다.
다른 방면에서 여래는 법계(法界)에서 필경 어떤 존재 상태인가? 사람들이 보는 조각상과 같은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그의 법(法)을 설마 유형적인 방식으로 틀에 넣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역시 수련자들이 불법(佛法)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장애다. 왜냐하면 “도의 관점에서 볼 때 사물은 귀천이 없기” 때문이다.
주불께서는 “생명이 크다고 소중한 것이 아니고 작다고 소중하지 않은 게 아니다.”라고 하셨다. 사실 모든 생명과 모든 사물은 우주 법(法)이 존재하는 상태의 표현이며, 그들의 변화는 법의 원칙을 따른다. 그러나 수보리는 층차와 경계의 한계로 인해 당시 부처님의 설법에 대해 그저 한 가지 생각과 이해뿐 아직 실증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는 “여래께서 신상(身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신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무슨 뜻인가? 여래의 신상(身相)을 가짜라 할 수 있는가? 사실 이것은 미륵이 열반하기 전에 말한 게송에서 알 수 있다.
“미륵 진짜 미륵
천백억으로 화신해
수시로 사람에게 보여주지만
세인은 알지 못하네.
彌勒真彌勒
化身千百億
時時把示人
世人自不識”
그것은 일체 속에 드러낼 수 있고 일체 표현 형식을 운용할 수 있지만 집착하지 않는데 여래법은 그 이하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고 빠뜨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경계 아래에서 층층층층 자신을 나타낼 수 있으니 모두 그다. 또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고 또 드러낼 수도 있다. 그는 자재하고 공성(空性)이 원용(圓容)한 것이다. 무엇이 그의 신상(身相)인가? 그의 진신상(真身相)은 일반인이 보아내기란 아주 어렵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상(相)은
모두가 허망하니
상이 상 아닌 줄 알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허망이란 사람 마음의 망령된 생락으로 인해 변화한 형상이다. 만약 천지의 큰 아름다움, 고대와 현대의 모든 것을 보고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면, 그때에야 여래의 참된 실상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저 빈말이 아니라 하나의 실증이며, 결코 사람의 헛된 망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타의 경계를 성취하면 그의 신체는 우주에서 가장 좋은 물질로 구성되어 우주가 불괴(不壞)하면 그도 불괴하기 때문이다.
주불께서는 “무엇이 부처인가? 여래(如來)란 진리를 딛고서 여의롭게 왔다는 이런 하나의 세상 사람의 호칭이지만, 진정한 부처인 그는 우주의 보위자(保衛者)이다.”(《도항》)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무한한 능력을 지닌 동시에 자신의 그 한층 법리(法理)를 통제하는 진실하고 여의한 법왕(法王)이고 이 경계(境界)는 사람이 생각하는 허공이 아니라 바로 그 이하의 모든 경계에 대해 집착이 없고 원용한 각자(覺者)의 경계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8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