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秦政)
【정견망】
편집인의 말: 이 시리즈는 본래 인민보(人民報)에 연재된 것으로 저자가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금강경》에 대해 논술한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이 종교계(특히 불교계) 인사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데 일정한 참고 가치가 있기에 이곳에 옮겨 싣는다. 종교계 인사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 대법제자들은 볼 필요 없다. 모두 법을 스승으로 삼아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하기를 바란다.
1. “제2품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을 보자.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경문을 여러 ‘품’으로 나누는데, 이는 후인들이 덧붙여 경문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표현한 것이다. 겉으로 보면 마치 후인이 경을 읽는데 편의를 제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후인이 경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틀을 추가한 것이다. 만약 이런 틀에 국한해서 경을 이해한다면 그럼 후인은 영원히 이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나누는 것은 사실 마땅치 않은 것이다
2. 경문을 살펴보자.
〖“이때 장로(長老) 수보리(須菩提)가 대중 속에 있다가 일어나서 오른쪽 어깨를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고 공경히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때”란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법을 설하실 준비가 되신 것이다. 수보리 장로가 여러 제자들 가운데 일어나 부처님께 나아갔다. 당시 불제자들이 입던 가사는 길이가 1길이 넘는 노란색 천으로 어깨를 드러낸 사람도 있고, 어깨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서 설명하는 동작은 수보리 장로의 옷차림이 어깨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 경배하기 쉽도록 먼저 오른쪽 어깨를 벗은 다음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어 한쪽 다리를 꿇고 합장하고 공경하는 자세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희유(希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보살들을 잘 염려 보호해[護念] 주시고 보살들을 잘 당부하여 위촉해[善付囑] 주십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마음을 내고는 어떻게 머물러야 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됩니까?”〗
여기서 수보리 장로는 심(心)’술(術)’에 관해 묻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유하자면, 내가 미시 세계 물리학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는데 그럼 어떤 기본 이론에 기초해야 하겠습니까? 대체로 이런 뜻이다.
3.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참으로 좋은 일이다. 수보리야, 네 말과 같이 ‘여래는 보살들을 잘 염려하여 보호하고 보살들을 잘 당부하여 위촉해 주나니’, 정신 차려 들어라. 말해 주리라. 선남자와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고는 이렇게 머물러 있어야 하며,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느니라.”〗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예전 수련은 불가(佛家)나 도가(道家)를 막론하고 제도한 것은 모두 사람의 부원신(副元神)이었다. 부원신은 삼계(三界)에 들어오지 않았고 삼계 밖에서 사람의 이 신체를 조종해 수련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이 주체(主體)의 협력도 떼어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법에서 사람 이 표면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원칙을 설법하고 적연(寂然)하게 선정(禪定)에 들어가야 한다고 알려주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 표면의 주의식(主識識)이 작용하지 못하게 하고 그쪽에서 당신의 신체를 이용해 수련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신 차려 들어라.”라는 말은 사실 모든 진실한 경계를 이미 수보리 장로에게 설명했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과 보살 사이의 소통은 일종의 사유전감(思惟傳感)이기 때문에, 입체적인 목소리와 한 차례 미소와 일념(一念)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보리 장로는 나한 과위에 도달했고 보살 경계로 나아가기 위해 정진하는 제자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이 구절을 말씀하셨을 때 다른 공간에서는 이미 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진실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불법(佛法)에 대한 수보리의 탐구가 근본적인 심성(心性)에 착안했기 때문에 부처님이 이렇게 기뻐하신 것이다. “극락세계는 어떻습니까?”라거나 “불국(佛國) 세계는 어떠합니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직접 불성(佛性)의 심법을 가리켰으니 이는 진정한 수련인의 근본적인 기초이다. 즉 불심(佛心)은 어떠한가?
부처님은 그래서 그를 칭찬하며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참으로 좋은 일이다. 수보리야, 네 말과 같이 ‘여래는 보살들을 잘 염려하여 보호하고 보살들을 잘 당부하여 위촉해 주나니’, 정신 차려 들어라. 말해 주리라. 선남자와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고는 이렇게 머물러 있어야 하며,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느니라.”〗
의미는 네가 말한 것처럼 여래는 제자들의 근기와 특성에 따라 제자들을 잘 가르쳐서 법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이제 너는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내가 이 법리를 여러분에게 전면적으로 설명하겠다. 부처 수련을 하기로 결심한 사람은 마땅히 이런 마음에 머물러야 하고 마땅히 그 사람의 욕심과 번뇌를 항복시켜야 한다. 마치 우리가 통상적인 표현으로 하는 것과 같은데 마땅히 이러이러해야 한다.
4. 수보리는 완전히 이해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이해했는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수보리는 다른 사람들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고 후인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네, 세존이시여, 즐겁게 듣기를 원합니다.”라고 청한다.
의미는 사존이시여 저는 알았지만 몇 마디 말씀으로 이 오묘한 법(法)을 설명해 저뿐만 아니라 중생들이 모두 이 경전을 기쁘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사실 이때 사유전감으로 한 경전에 대한 설명은 이미 끝났다. 하지만 수보리가 부처님께 이를 말로 표현해 달라고 간청했기 때문에 나중에 문장이 생긴 것이다. 사람의 언어로는 고심한 법리를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인데 사람은 자신의 사유방식으로 문제를 가늠하고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만 부처님은 오히려 여러 방면을 동시에 사고하고 처리하신다. 아울러 한 가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지자(智者)는 이 점을 알기에 인류의 사유 절차를 가리켜 ‘작은 논리’라 한다.
5. 계속해서 “제3품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을 살펴보자. 여기서는 좀 모호한 것을 일반화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마치 은하계의 원리를 우주의 보편적 원리로 확장하는 것과 좀 비슷하다. 하지만 이런 일반화는 후인들을 제한하기 쉽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6.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되나니, ‘이른바 세상에 있는 온갖 중생인 난생(卵生)ㆍ태생(胎生)ㆍ습생(濕生)ㆍ화생(化生)과 유색(有色)ㆍ무색(無色)ㆍ유상(有想)ㆍ무상(無想)ㆍ비유상(非有想)ㆍ비무상(非無想)을 내가 모두 제도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도록 하리라’ 하라.
이렇게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을 제도하되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이가 없느니라. 무슨 까닭이겠느냐?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중생상(衆生相)ㆍ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여기서부터 《금강경》이 사람을 가장 미혹시키는 부분으로 들어가는데, 수많은 정신 나간 이해와 허무하고 오만한 가상(假象)이 있으니 모두 이 경에서 사람의 말로 억지로 법을 표현해 명확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만물이 뒤섞여 있던 어둠과 혼돈의 시기
가장 먼저 하늘과 땅이 생겨났네.
고요하구나! 텅 비어 있구나
그 스스로 서 있으니 변함이 없구나.
두루 다니지만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어머니가 될 만 하구나!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이름 대신 억지로 말한다면 ‘도’라 하고
억지로 그 이름을 붙인다면 ‘크다’고 한다.”
사실 석가모니가 이때 말한 경계(境界)는 진실로 같은 일이다. 즉 억지로 사람의 말로 표현해서 도(道)라 하고 법(法)이라 할 뿐이다. 상부좌에서 보살이나 나한 과위에 도달한 제자들을 상대로 설법했기 때문에 그들이 법을 듣는 상태는 또 석가모니의 설법 형식을 결정하는데 사실 입체적이고 또 드러내는 것이 있다.
개오(開悟)한 각자(覺者)의 설법은 사실 그의 경계 이하 층층층층을 모두 말하는데 특히 이렇게 널리 전하는 형식에서는 모두 이렇다. 나중에 티베트 불교 밀종에서 상사(上師)가 법을 전할 때 구결과 만다라를 만드는 등의 형식 역시 모두 여기서 한맥으로 전해온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구절에서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되나니”라고 말하면 사실 과위가 있는 제자들은 다 똑똑히 알아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을 하는 이유는 수보리 장로의 요청에 응해 마지못해 사람의 언어로 그 법리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과거 불교는 또한 단지 오늘날 대법을 전할 문화만 다졌고, 동시에 그 당시에는 중생이 그렇게 많이 알지 못하게 했으며, 부원신 수련이라 진정한 주원신은 아는 것이 아주 적었다. 비록 책을 읽어도 모호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읽을수록 느낌이 좋지만 사실 역시 사람의 요만한 정보라는 느낌일 뿐이다.
진정한 의미는 부원신이 순조롭게 수련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불법(佛法)은 원용(圓容)하기 때문에 그 경계 이하의 일체 중생이 불법을 듣는 것 역시 무량한 복분이며, 모두 그들을 깨닫고 제고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당시 개창한 수련하고 개오하는 길은 바로 열반(涅槃)으로 그의 말로 하자면 바로 일종의 멸도(滅度)였다.
7. 멸도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말하면 아주 분명할 것이다. 생명은 우주공간에서 생겨난 것으로, 생겨난 초기에는 우주 특성에 부합했다. 즉 우주 특성에 동화된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가 많이 생겨난 후 마침 사람처럼 이런 대인관계가 생겨났고, 그 중 일부 생명은 좋지 않게 변했고 이기적으로 변해 떨어져 내려갔다. 이런 상황이 대량으로 나타나자 고층의 신(神)은 상대적으로 낮은 공간을 창조해 이런 생명들을 봉쇄하고 이렇게 물질과 능력이 서로 통하는 낮은 공간속에 들어가게 했다. 신은 자비롭기 때문에 그들에게 한 차례 돌아갈 기회를 주셨다.
이렇게 되자 우주가 전개되면서 생명이 패괴(敗壞)하고 타락함에 따라 공간 층차는 갈수록 많아졌고 최후에 사람 이곳까지 떨어져 왔다. 이곳 삼계(三界)는 한 층면에서 말하자면 우주의 쓰레기장으로 우주의 가장 표면이자 가장 거친 층차면인데 생명이 이곳에 떨어지면 이전에는 철저히 소각시켜 없애버렸다.
그러나 나중에 신(神)은 또 자비를 베풀어 이런 존재들에게 다시 한 차례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때문에 사람이란 이 공간을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가장 미혹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공간을 창조해 생명을 이렇게 낮은 육신(肉身) 속에 봉폐시켰다. 대단히 저능해서 사람은 이곳에서 아주 가련하지만 사람은 출생 후 늘 이렇게 생활해 왔고 또 모두 마찬가지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저능함은 다른 공간을 볼 수 없었고 무슨 일이든 다 가장 낮은 방식으로 해야 했다. 이렇게 저능한 방식으로 후대를 번성시켰다. 신은 사람에게 최후의 기회를 주셨으니 미혹 속에서 깨닫기를 바라신 것이다. 깨달으면 곧 돌아갈 수 있었고 깨닫지 못하면 떨어져 내려가 소각된다. 사람 자신은 이 처지를 알기 아주 어렵지만 각자(覺者)는 아주 잘 알고 있기에 또 불쌍히 여긴다.
장자는 일찍이 우언에서 작은 연못에서 물이 없는 물고기를 말한 적이 있는데 곧 죽어가지만 서로 습기를 뿜어내 서로의 비늘을 적신다. 그는 이렇게 “서로 습기를 뿜어내 서로 거품으로 적셔주는” 것을 도덕과 아름다움으로 여김은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사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물고기에게 강과 호수는 어떤 의미인가? 무한한 자원과 자유로운 공간을 의미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진정으로 정법(正法) 수련을 통해 반본귀진(反本歸真)하는 그것만이 진정한 행복이다.
즉, 사람의 본질이 아래로 떨어지는 과정에서 마치 다이아몬드가 다양한 오염 물질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데 그것은 한 층의 크림에 오염되고, 또 한 층 잉크, 또 한 층의 진흙에 오염되었으며 마지막으로 한 층의 똥에 오염되었다. 매 한 층의 오염은 사실 당신 선천의 지극히 선하고 원만한 영성(靈性)에 한 층의 봉쇄를 더한 것이다.
그렇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당신이 되돌아가도록 어떤 방식을 채택했는가? 그것이 바로 열반이었다. 즉 당신을 깨끗이 씻는 것이다. 부동(不同)한 층차에서 부동한 세탁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렇게 이해하면 법무정법(法無定法 법에는 고정된 법이 없다)을 이해하기 쉽다.
즉, 똥을 씻는 방법으로 크림을 씻으면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먼저 크림을 씻는 방법을 쓰고 나중에 똥을 씻는 방법을 써도 분명 효과가 없을 것이다. 즉 역대로 대각자(大覺者)가 사람을 가르칠 때 왜 어떤 경계(境界)에서 그에게 어떤 법을 가르쳤는지 역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왜 나중 사람들은 성취하기 아주 어려운가? 많은 이들이 높고 먼 것을 흠모하는데, 일단 사람의 명리심(名利心)을 써서 얼마나 높고 얼마나 높게 수련한다고 하면서 소승(小乘)은 제대로 닦지도 못하고, 일단 눈을 감고 대승 경전을 암송한다. 하지만 결과는 헛수고가 되는데 이뤄지는 일이 하나도 없다.
비교하자면 유가에서 소학(小學)의 예의조차 습관이 되지 못하고, 예인(禮仁)의 심법(心法)조차 자연스럽게 이루지 못한 사람이, 함부로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논한다면 이는 오만한 무지에 불과할 뿐이다. 또는 마치 사칙연산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아는 글자도 얼마 되지 않으면서 미적분에 통달하고 절묘한 문장을 쓰려한다면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흐리멍덩하게 무슨 내려놓음[放下]을 말하는데 사실 그는 무엇을 잡은 적이라도 있는가? 무슨 내려놓음을 말하는가?
8. ‘무여열반(無餘涅槃)’과 ‘멸도’를 간단히 말하면 바로 자신을 깨끗이 씻어 선천의 본래 불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자연스럽고 원만한 과정이다. 그 핵심이 되는 길이 석가모니가 전한 ‘계정혜(戒定慧)’의 법이다. 이것은 우주가 正常적인 수련 시기에 한 갈래 정법대로(正法大路)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후천적인 부동한 층차의 신체를 가장 좋은 것으로 전화시켜 가져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가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이가 없느니라.”고 말한 이유다.
우리는 방금 크림의 오염과 진흙의 오염을 언급했다. 사실 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사람이라는 이런 개념이 말하는 것은 단지 생명 밖의 흐릿한 한 층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부동한 층차의 신체 존재를 형성할 수 있는데 마치 전반 세포가 사람을 구성하고, 원자 층면, 중성미자 층면 등등이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깨달은 이들이 “냄새나는 피부 주머니”라고 한 사람을 만드는데 명(命)을 닦지 않는(즉 번티를 전화하지 않는) 공법은 또한 다 버리는 것을 채용했다. 개공개오(開功開悟)하는 그 순간 단번에 후천적으로 파생되어 연화한 신체(身體)를 버리고 원신(元神)이 공(功)을 가지고 올라간다.
그럼 화상이 개오하면 곧 사리가 나오는데 실제로는 그 단이 폭발한 후 신체의 자물쇠와 백규(百窺)가 전부 진동해서 열리며 본체(本體 번티)를 단번에 버리고 원만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또 개체가 개오해서 삼계를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며, 그것의 본신(本身)은 우주 물질을 철저히 갱신해 부동한 층차의 경계로 용련(熔煉)하고 제고해 가져갈 수 없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8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