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법제자
【정견망】
1999년 4월 25일 1만 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평화적으로 청원한 이후 많은 해외 언론들이 중국에 파룬궁(法輪功)이란 수련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뉴욕타임스도 이 역사적인 사건을 보도했는데, 이는 파룬궁에 대한 뉴욕타임스 최초의 보도였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객관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즉 독자들에게 파룬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았고 425 사건이 발생한 배경을 짚어주지 않았으며, 사용한 단어도 이 단체 수련인들에 대한 경멸, 감시, 오만이 팽배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내가 사는 도시에서 가장 큰 신문을 포함해 많은 매체들이 뉴욕타임스 보도를 그대로 옮겨 실었다. [역주: 미국은 국토가 워낙 넓어서 전국을 커버하는 신문이 없다 보니 지방 신문에서는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등 다른 유명 신문의 기사를 전재해서 싣는 경우가 많다.] 당시 나는 박사과정 학생이었고 약 2년 동안 수련했었다. 지도 교수님과 다른 동료, 학생, 직원들은 모두 내가 연공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학업 이외 남는 시간은 다 연공하고 법 공부하며 홍법(洪法)하는데 썼기 때문에 신문은 거의 보지 않았다.
어느 날 과제 모임이 있어 참석하자 교수님이 뉴욕타임스를 들고 모임에 오셔서 모두에게 파룬궁이 신문에 났다고 알려주셨다. 나는 그제야 서방 주류 언론이 425에 대해 보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기사를 읽고 나서 속으로 좀 불편했다. 수련인으로서 이렇게 고덕(高德)하고 성결(聖潔)한 대법이 폄하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게다가 전체 기사 내용이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기자와 편집인은 사실 확인이나 조사를 하지 않았고, 중공 관방의 공식 성명을 일부 인용한 것 외에는 자신의 무책임한 논평과 자신들이 잘 모르는 사람과 단체에 대한 억측성 묘사뿐이었다. 게다가 기사 수준도 낮았지만 오히려 대량으로 전재되었다.
나중에 우리는 그 기사를 전재한 우리 지역 신문을 찾아가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기자에게 파룬궁을 소개하고 425가 일어난 이유와 참가자들이 평화적인 탄원서를 통해 무엇을 요구했는지 이야기했다. 하지만 기사가 발표된 후 우리는 해당 기자가 중공 영사관도 인터뷰했고 중공 관방의 대외적인 입장을 알리는 것으로 기사를 마무리했음을 알았다. 이런 서사 구조는 독자들에게 대법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보다는 부정적인 인상이 더 강하게 남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신문사에 연락했고, 우리의 주장에 따라 이 신문사는 우리가 작성한 사실 확인 기사를 게재하는데 동의했다. 바로 이 일을 통해 내가 법을 실증하는 길이 시작이 되었고, 이후 내가 매체 항목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9년 7월 20일은 아주 우울한 날이었다. 그날 나는 비행기표를 끊고 워싱턴 DC로 날아갔다. 미국 주재 중공 대사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서 온 수련생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몰랐지만 마음만은 하나였다. 내 기억에 수련생 대표들이 대사관 문을 두드렸고 처음 대사관 관계자들의 태도는 여전히 우호적이었고 심지어 중국에서 수련생들이 체포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동정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우호’였고 다음 날 대사관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들이 보기에 파룬궁 수련생들은 이미 전제 정권의 적일 뿐이었다.
당시 워싱턴 DC에 달려온 수련생들 상당수는 학생이거나 일부 직장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언뜻 봐도 모두 공부만 하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정치를 몰랐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서로 논의 끝에 우리는 워싱턴에 있는 각국 대사관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때는 진상 알리기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그저 세인들이 대법을 오해하게 해서는 안 되며 대법과 사부님의 결백을 밝혀야 한다는 신념만 있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우리는 그룹별로 연방 의원사무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미리 약속도 없었고, 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이 사무실 저 사무실 찾아다녔다.
내 기억에 한 의원실에서 어느 의원 보좌관에게 나의 개인적인 신분과 파룬궁을 소개하고 중국에서 발생한 수련생들에 대한 체포와 탄압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보좌관은 뉴욕타임스에 파룬궁이 보도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파룬궁에 대해 알고 있으며, 우리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나는 그가 수련생인 내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여전히 뉴욕타임스 보도를 믿으려 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실 나는 그 당시에 뉴욕타임스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몰랐고 그저 좋지 않을 거라는 추측만 했다. 결국 그는 마지막에 뉴욕타임스는 매우 믿을 만한 신문이고 공신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뉴욕타임스를 믿는다고 했다. 나는 워싱턴 DC에서 돌아와 그 기사를 읽어봤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기사 내용이 명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경멸과 오만이 여전했다. 내 기억에 남는 한마디는 파룬궁은 싸울 가치가 없다는 취지의 문장이었다. 이 매체의 보도는 정치권, 인권 단체 등에 박해 초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이들이 대법을 이해하고 이번 박해가 생긴 원인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부면적인 영향을 끼쳤다.
지난 20년 동안 뉴욕타임스에 실린 대법에 관한 100건이 넘는 보도 중 4분의 3 이상이 정면적인 내용은 없고 명백히 부면적인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중공에 매수되었다기 보다는 뉴욕타임스 자체의 문제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대법제자들이 운영하는 대부분의 매체 항목에 참여했고 미디어 산업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비록 대부분의 언론 매체가 도덕 방면에서 미끄러져 내려갔지만, 뉴욕타임스는 특히 신을 반대하고 친공(親共)적인 성격이 두드러지며 심지어 직업윤리마저 무시할 수 있는 의제였다.
션윈은 창단 이후 수많은 관객들의 찬사를 받으며 인류에게 희망과 빛을 선사했다. 관객들은 션윈을 “아름다움을 넘어섰고”, “모든 것을 넘어선”(beyond beauty; beyond all beyond) 예술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2011년 뉴욕타임스 보도는 “소화하기 힘든” 공연으로 묘사되었다. 설사 중공이 수십 년간 뉴욕타임스를 관리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세상의 비난을 무릅쓴 보도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내 기억에 몇 년 전 주류 사회의 한 서양인 동수와 교류할 때 어렸을 때부터 늘 뉴욕타임스를 존경해 왔다고 말했다. 나는 뉴욕타임스를 신봉하던 워싱턴 DC의 그 의원 보좌관을 생각하면서 구세력의 사악한 배치는 정말 끊임없이 사람을 해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신문이 백 년 이상 쌓아온 소위 신뢰란 모두 오늘날 대법을 박해하는 가운데 세인(世人)을 미혹시키기 위한 것이다.
지금 뉴욕타임스는 또 9개의 기사를 연속으로 보도해 대법을 공격하고 사부님을 공격했다. 현재 진행 중인 사부님을 겨냥한 소송은 사실 모든 제자에 대한 기소와 차이가 없다. 그 배후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초국가적인 중공의 박해를 원동력으로 하지만, 뉴욕타임스 스스로 그 여론의 선봉으로 선택된 것은 그것들도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불법(佛法)은 자비하지만 동시에 위엄이 존재한다. 뉴욕타임스는 장차 반드시 자신의 선택에 직면할 것이며 여기서 천도(天道)의 심판과 인간세상에서 법률의 제재가 있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4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