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제자
【정견망】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수많은 억울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나타났고, 일부는 악의적인 모함을 받았고, 일부는 흐릿하게 오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억울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냉담한 방관자가 많았고,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이는 소수였고 목숨을 걸고 해결하려 나선 이는 극히 드물었다. 이 역시 이런 비극이 생기게 한 원인이다. 정의를 위해 큰 목소리를 내서 타인을 구하려 목숨을 바친 사람들은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어두운 밤을 밝히는 별처럼 영원한 빛을 발한다.
남송(南宋) 소흥(紹興) 11년(서기 1141년) 4월, 재상 진회(秦檜)는 고종(高宗)의 이름으로 악비에게 12번이나 금패를 내려 퇴각 명령을 내렸다. 악비(岳飛)는 함락된 지역의 주민들을 재정착시키고 뒷일을 처리하느라 6일이 늦었다. 도성인 임안으로 돌아온 악비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 12월 29일, 그는 ‘그럴지도 모른다[莫須有]’는 막연한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풍파정(風波亭)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비참하게 죽었다. 아들인 악운(岳雲)과 부장 장헌(張憲)도 동시에 처형당했다.
악비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당시 조정에서도 그의 억울함을 호소한 사람들이 있었다. 진회가 발탁한 주심관(主審官)이었던 하주(何鑄)는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을 발견하고 악비를 위해 상소했지만 진회의 미움을 사서 파직당했다. 조사뇨(趙士㒟)는 종친의 일원임에도 악비의 무죄를 주장하는 편지를 써서 온 가족의 생명을 담보로 악비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 역시 진회의 탄핵을 받아 ‘종친이 무장(武將)과 결탁’했다는 혐의로 파면되어 건주(建州)로 귀양 갔고, 이후 건주에서 죽었다.
대리소경(大理少卿, 지금의 법무부에 해당하는 대리시의 차관) 설인보(薛仁甫)는 이 사건을 심사하는 과정에 만사설(萬俟卨)의 모함에 응하지 않아 나중에 해임되었고, 대리시승(大理寺丞) 하언추(何彥猷)와 이약박(李若樸)이 실제로 심리를 맡았다. 악비 사건이 종결될 때 악비의 죽음은 이미 예정된 결론이었고 모든 사람이 동의했지만 오직 이 두 사람만이 목소리를 높여 항의했다. 나중에 두 사람은 파면되었다. 한세충(韓世忠)은 진회에게 “막수유란 세글자로 어떻게 천하를 설득할 수 있겠소?”라고 질의했다.
한편 악비 이야기에서 조정 밖에서도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다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있었다. 유윤승(劉允升)은 평범한 민초로 관직도 없고 악비를 만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악비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악비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자무식이라 직접 글을 쓰진 못했지만 마을 사람에게 대신 붓을 들어 만 글자에 달하는 서신을 쓰고 지장을 찍어 조정에 보냈다. 그는 진회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사서에는 “평민 유윤승이 악비 소송의 부당함에 대해 상소했다 대리시에서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임안의 간수였던 외순(隗順)은 악비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후 차가운 감옥에 시신이 방치되어 아무도 수습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외순은 악비의 시신이 짓밟히는 것을 차마 참을 수 없어 목숨을 걸고 한밤중에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시신을 업고 항주성을 빠져나와 전당문(錢塘門) 밖 구곡총사(九曲叢祠) 옆에 묻었다. 또한 악비가 생전에 끼던 옥반지를 시신의 허리춤에 넣고 무덤 앞에 귤나무를 심어 표시했다. 사서에서는 “악(岳) 악왕(鄂王, 사후 악비에게 추증된 벼슬)이 죽자 간수 외순이 그의 시신을 업고 성 밖으로 나가 구곡총사에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800여 년이 지난 오늘, 사악한 공산당 당 문화에 세뇌당한 사람들은 전통문화의 인의도덕(仁義道德)을 아는 이조차 드물다. 사악한 공산당 당성(黨性)과 이익의 압력하에 억울한 사건을 마주한 많은 사람이 불의에 맞서 침묵하거나 심지어 사악을 도왔다.
1999년 중공이 파룬따파를 탄압한 이후, 중공 체제 내의 많은 법관은 중공의 위력에 굴복해, 수련자들이 법을 위반하거나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중공의 의도에 따라 무고한 판결을 내렸다. 이는 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격으로 수련자들의 처지를 더욱 곤란하게 했다. 중국 공산당의 폭정 아래 사법의 공정성과 독립성은 모조리 사라졌고 이와 함께 법관의 신성함과 위엄도 사라졌다. 수련자들이 철창에 갇히고 일부는 박해를 받아 죽으면서 늙은 부모들은 눈물을 흘리고 어린 아이들은 홀로 남겨지는 비극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아울러 이들 판사들의 최후 역시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흑룡강 성 이춘 시(伊春市) 금산둔구(金山屯區) 법원 재판장 장해도(張海濤)는 2002년 파룬궁 수련생 21명에게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그중 진월명(秦月明)은 불법으로 10년 형을 선고 받고 가목사 감옥에서 박해받아 사망했고 부계춘(付桂春)과 이장생(李長生)은 감옥에서 박해를 받아 집에 돌아온 후 세상을 떠났다. 2009년에도 장해도 등은 파룬궁 수련생 포영승(包永勝)에게 11년, 장배훈(張培訓) 9년, 율숭부(栗崇富) 8년 형을 불법적으로 다시 선고했다. 바로 그날,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터지며 격렬한 폭풍이 금산둔 상공에 몰아쳐 공안국 건물의 모든 덮개를 들어 올려 도로 반대편으로 날려 보냈고, 현판과 유리가 깨졌다. 2015년 1월 11일, 장해도는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하려고 차를 타도 가다 갑자기 말을 할 수 없어서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지만 심장 마비로 급사했다.
또 강서성 남창시 청운보(青雲譜) 법원의 민사1 재판부 부재판장 진영근(陳水根)은 파룬궁 수련생 진향양(陳向陽)에게 11년, 장숙군(張淑君)에게 10년을 판결한 후 한 달도 되지 않아 뇌출혈로 급사했다. 향년 50세. 또 호남성 평강현 법원 원장 당성기(唐成基)는 파룬궁 수련생 강선염(江鮮豔) 등의 6만 여 위안 예금 몰수에 서명했다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급사했다. 향년 42세였다. 감숙성 회녕현 법원의 여자 판사 타옥영(妥玉英)은 수련자를 박해한 후 얼마 후 암에 걸렸고 임종 전에 친지들에게 자신이 대법에 악을 저질로 보응을 받았다고 참회했다.
원래 법관의 책임은 분쟁을 해결하고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지키는 것이다. 법관은 자신의 법 집행을 통해 법률의 존엄성과 공정함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사리사욕으로 멋대로 법을 어기고 범법을 저지르며, 법률을 수단으로 수련자를 박해해 법관의 신성성을 모독할 뿐만 아니라 법률의 존엄을 잃어 사회도덕을 타락시키고 더욱이 무수한 인간 비극을 초래했다.
만약 지금의 법관들이 전통문화에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등의 도덕을 알고, 강직하게 아첨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억울한 사건을 해결한 일부 고대 법관의 이야기를 알았다면, 중공의 거짓말에 독해(毒害)되어 무고한 동포들을 박해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인간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악비의 억울한 피살은 비극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인성(人性)의 찬란한 빛을 보여준 이들이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폭정이 두렵다 해도, 우리는 옳고 그름을 알고, 선량을 선택하고 자비를 선택하는 법관이 갈수록 많아진다면, 그들의 정의 역시 박해를 제지할 수 있고, 죄악을 해체할 수 있는 동시에 중화 대지에 정직과 용감을 되찾아 올 수 있으리라 믿는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9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