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林雨)
【정견망】
진자앙(陳子昂 당대 측천무후 시기의 시인)의 《등유주대가(登幽州台歌)-유주대에 올라 부르는 노래》는 그야말로 천고의 절창(絶唱)이다. 불과 몇 구절에 깊은 비통과 무력감을 담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 시를 해석할 때 대부분 정치적 차원에 국한해 시인이 도(道)를 지닌 명군(明君)을 만나지 못함을 탄식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이 시에 담긴 깊은 의미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앞으로는 고인을 볼 수 없고
뒤로는 후인도 볼 수가 없네.
천지의 아득함을 생각하노니
홀로 구슬퍼 눈물 흘리네
前不見古人
後不見來者
念天地之悠悠
獨愴然而涕下
시인은 앞을 바라보아도 결과가 보이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아도 미래를 보지 못한다. 끝없이 펼쳐진 천지에서 개인의 고독과 미약함이 그를 눈물짓게 한다. 만약 단지 명군(明君)이 없어서 탄식했다면, 역사상의 삼황오제, 주문왕(周文王), 주무왕(周武王)은 물론 당태종(唐太宗)의 정관의 치, 청대의 강건성세(康乾盛世)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평성세에 현명한 군주로 꼽힐 수 있으니 시인의 이런 탄식은 불필요하다.
사실, 진자앙이 이 시를 쓸 당시 그는 이미 세속을 초월한 높이에 있었다. 그의 탄식은 단순히 정치적 이상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우주 성(成)·주(住)·괴(壞)·멸(滅)’이라는 궁극적 명제에까지 닿아 있었다. 예로부터 제갈량의 《마전과(馬前課)》, 원천강과 이순풍의 《추배도(推背圖)》 등도 말세와 대겁난을 논했다. 진자앙의 비탄은 바로 그가 우주가 해체되는 앞에서 생명의 무력과 절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절박한 경지에서 터져 나온 생명의 절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돌아보면, 오히려 예언 속 재난들이 하나둘 사라져 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주는 훼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향해 전개되고 있다. 이 모든 변화는 대법이 전해지면서 비롯되었으니, 중생을 위해 진정한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큰 배경 속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기왕 희망이 이미 눈앞에 펼쳐졌는데도, 왜 여전히 무관심한 이들이 있는가? 심지어 정법을 방해하는 것을 선택한 이들도 있는가? 역사에는 일반인을 뛰어넘는 뛰어난 사상가들이 적지 않았으며, 그들의 사유는 세속의 이치를 훨씬 초월했다. 진자앙도 그러했다. 그는 우주의 괴멸을 보고 비통해했다. 대법이 전해지기 전에는 그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법을 만날 수 있으니 이는 본래 항고(恒古)에도 만나기 힘든 기연(機緣)이다. 기왕 생명이 진정한 희망을 얻었는데 왜 소중히 여기지 않는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