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1. “안으로 찾음”에 대한 표층의 이해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층차 중의 법을 모르고서는 수련할 방법이 없으며, 안으로 수련하지 않아 心性(씬씽)이 수련되지 않으면 공이 자라지 않는다.’ 바로 이 두 가지 원인이다.”
오랫동안 나는 “안으로 찾음[向内找]”에 대한 이해가 그저 표층에 머물렀다.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자신을 대조해 보곤 했다.
‘진선인(真善忍)’에 부합하는가?
‘명리정(名利情)’이 건드려졌는가?
아니면 스스로 적당히 꼬리표를 달았다.
“이것은 쟁투심일까? 질투심인가? 환희심인가?….”
이렇게 찾고 나서 나는 자신이 이미 “안으로 찾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렇게 찾는 법은 단지 표면에 머물 뿐, 근본집착(根本執著)을 건드리긴 아주 어렵다. 겉보기에는 평온해 보이지만, 사실 내심 깊은 곳에는 여전히 감정과 집착이 있고, 그저 일시적으로 눌러놓을 뿐이다. 사람의 본능은 늘 자아 보호를 우선시한다. 문제가 생기면 흔히 첫 반응은 “남이 잘못했다”는 것이고, 무의식중에 밖을 향해 본다.
‘누구는 법에 없는 것이 아닌가? 누구는 너무 속인이 아닌가? 누구는 옳고 누구는 틀린 것이 아닌가?’
사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표준으로 자신을 가늠하지 않고 남을 가늠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이란 바로 안을 향해 찾는 것이라, 맞든지 맞지 않든지 모두 자신에서 찾아야 하며, 닦음이란 바로 사람의 마음을 닦는 것이다. 늘 지적과 비평을 받아들이지 않고 늘 밖을 향해 지적하며, 늘 다른 사람의 의견과 비평을 반박하는 그것이 수련인가? 그것이 어찌 닦는 것인가? 습관적으로 늘 다른 사람의 부족을 보고 여태껏 자신을 보는 것을 중시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은 수련을 잘했는데 당신은 또 어떻게 하겠는가? 사부는 당신이 잘 수련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당신은 왜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늘 다른 사람을 보는가? 오히려 안을 향하여 닦지 않고 자신을 찾지 않는가? 자신에 대한 말을 꺼낼 때면 당신은 왜 좋지 않아 하는가? 당신들,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 몇이나 갑자기 어떤 사람이 삿대질하며 당신에게 욕할 때 심정이 담담할 수 있는가? 몇이나 다른 사람의 비평과 지적에 직면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가?”(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
2. 한 차례 계발로 안으로 찾음을 배우기 시작
몇 년 전, 한 차례 관(關)을 넘길 때 수년간 연락이 없었던 한 동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 꿈에 나를 보았다면서 특별한 관심을 표시했다.
우리는 이렇게 아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법(法)에서 얻은 많은 체험을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무조건 안으로 찾았고”, 어떻게 층층(層層) 깊이 파고들어 철저히 자신을 찾았는지 과정을 나눠주었는데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후, 나도 처음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치 자신의 영혼과 대화하듯이 스스로 묻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쉽지 않았다. 관념과 업력의 저항이 아주 컸기 때문이다. 일단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고 오직 자신을 찾으려고만 하면 정말 쉽지 않았다. 자신을 변호하고 남을 바라보려는 마음이 시시각각 밀려 나왔다. 그 업력이 사라지려 할 때, 내심으로 고통을 느꼈지만, 나는 수련인(修煉人)으로서 요만한 고통은 마땅히 겪어야 하며, 또한 그것이 진정한 내가 아님을 간파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여전히 잘 찾지 못했고 그저 비교적 표면적인 부분만 찾을 수 있었으며, 더 깊은 근원은 오히려 건드리지 못했다. 계속 질문하다 보면 사로(思路)가 또 늘 남이 “어디에서 잘못했는가?”로 향하는데 결국 남을 수련하는 것으로 변한다. 이게 바로 밖을 향해 보는 것이 아닌가? 이 한 점을 깨닫고 다시 자신을 찾으며 견정하게 계속해서 자신을 닦았다. 몇 번 반복한 후 내가 안으로 찾는 것을 가로막던 그 한 층의 물질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느꼈고, 아주 견고했던 관념도 발정념 중에서 깨끗이 제거되었다. 동수의 도움은 더욱 소중했다. 그녀는 마치 사부님께서 나를 격려하고 계발하기 위해 파견한 천사(天使)처럼 나를 도와 향상하게 했고 나는 점차 어떻게 자신을 깊이 찾는지 배울 수 있었다.
3. 층층 안으로 찾는 과정
예를 들어 보자. 한차례 관을 넘을 때 나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한 층(層) 한 층 물었다.
제1층: 나는 왜 괴로운가?
깨달음: 자신이 상처받고 억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제2층: 왜 상처받고 억울하다고 느끼는가?
깨달음: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리는 것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여겨 마음에 불평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 법(法)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다. 나는 그저 선(善)을 지키고 자신을 잘 수련하기만 하면 된다. 오직 사람 마음이 있기 때문에 상처받는다. 만약 그것을 수련의 디딤돌이자 소업(消業) 과정으로 여긴다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제3층: 더 깊은 곳에서 보면 바로 ‘자아’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더러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한 생명으로 수련 성취하라고 하셨으니 나의 많은 사심(私心), 오만함 등 사람 마음은 모두 ‘자아’에서 비롯된다.
제4층: 그럼 ‘자아’ 배후는 무엇인가?
이 일에서 드러난 것은 ‘명(名)을 구하는 마음’으로 남이 나를 비방하거나 억울하게 대할까 걱정하고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걱정하는 것이다.
제5층: 다른 사람의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 늘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은 왜 그렇게 보는가? 이는 확실히 내가 어딘가 잘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당신은 왜 마음이 움직이는가? 내가 이렇게 한 층 한 층 물을 때마다 내심이 점차 평온해졌고 사로(思路)도 서서히 명석해졌다.
제6층: 이러한 마음의 배후는 무엇인가?
깨달음: 문제를 보는 각도를 바로잡지 못했다. 미혹 속에서 사람의 관념과 감성은 쉽게 미혹당한다. 속인의 각도에서는 문제에 부딪히기만 하면 곧 심리적인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쇠뿔을 파고들면서, 다른 사람에게 이견이 생긴다. 그러나 수련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면 많은 일들이 즉시 투철해지는데, 나타난 그 어떤 일이든 다 우리 수련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한 일이란 없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좋은 일이다.
제7층: 계속해서 안으로 찾고 자신의 평소 행동을 세밀하게 돌아본다.
어떤 동수는 내가 일할 때 “번개처럼 엄하고 바람처럼 신속하다”고 말한다. 나는 줄곧 협조인은 주견(主見)이 있고 책임지며, 항목이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겨왔다. 많은 일을 하면서 나는 무엇을 깨달으면 곧 그렇게 행동하는데, 때로는 동수들의 감수나 접수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다. 수련인으로서 말하면 아마 주도면밀하지 못하게 간과한 곳이 있을 수 있으니 용량을 넓히고 타인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협조인의 각도에서는 모든 사람의 이해와 지지, 협력을 바탕으로 항목 진행을 조율하고, 동시에 이런 압박을 견뎌내야 한다. 이 역시 매우 쉽지 않다.
비록 쉽지 않지만, 바로 어렵기 때문에 수련이 소중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어떤 일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정말로 꼭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일깨운다. 개인 수련의 각도에서는 더욱 겸손하고 포용하며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하지만, 협조인의 각도에서는 반드시 엄격하게 법(法)의 표준으로 모든 결정을 가늠해서 항목이 법에서 바르게 걷도록 해야 하며 과감하게 사부님께서 맡기신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제8층: 수련은 단지 표면적인 사상의 전변(轉變)이 아니라 사유 방식의 전변이다.
사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과정에서 사람에게 어떠한 사유방식을 사용하고 어떠한 사유구조를 형성하며 일에 봉착하면 어떻게 문제를 생각하고 어떤 사상방법으로 문제를 생각할 것인가를 가르친 것이다. 사람의 사상은 직접 사람의 행위에 영향을 준다.”(《무엇이 대법제자인가》)
나는 대법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한 부분 및 사람의 관념이 강력한 장애물을 형성하니, 반드시 더 층차를 제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한 층 한 층 질문함에 따라 마음도 한 층 한 층 고요해졌다. 매번 한 층 더 깊이 들어갈 때마다 마치 한 층 두꺼운 겉껍질을 벗겨내고 진아(真我)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 같다.
4. 사유 전변에서 법 공부가 마음에 들어감에 이르다
사부님께서는 늘 우리더러 “법을 잘 공부하고, 법을 많이 공부하라”라고 하셨다. 사유 방식의 전변은 결국 또 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법을 잘 공부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사유 방식을 바로잡을 수 있다. 나는 한동안 비록 매일 법을 공부했지만, 법 공부가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마치 화상이 경을 읽는 것처럼 머릿속에 심지어 다른 일을 생각하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법을 외울 때도 “암기를 위한 암기” 상태가 나타났다.
나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법 공부는 법을 얻는 과정이지, 형식을 걷는 것이 아니며 공부를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생활, 업무, 수련의 번잡함 속에서 종종 차분하게 한번 생각하고, 닦고, 깨달을 약간의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 진정으로 문제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늘 사람의 관념과 본능에 주도되며, 때로는 사람 마음이 폭로되어 나옴에도 자신은 모른다. 표면적으로는 세 가지 일을 했으니 마음이 편해야 하지만, 사실은 그저 “매일 숙제를 완성하는 것”과 같았고, 일을 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겼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의 마음은 수련에 있지 않으며 그는 완전히 종교의 형식을 지키고 있는데, 그리하여 이 집착이 엄중한 장애를 조성하였다.”(《스위스 법회 설법》)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사람은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간주하며, 사람은 종교의 형식을 수호하는 것을 수련으로 간주하고 있다. 사실 신은 이러한 것을 전혀 중시하지 않으며 오로지 사람 마음의 제고만을 중시할 뿐인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제고이다. 그 환경은 단지 수련자, 부처를 믿고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일종 공동으로 제고할 수 있는 그런 하나의 장소를 마련해 주어 서로 거울로 삼을 수 있게 한 것에 불과하다.”(《미국수도법회 설법》)
나는 이 문제를 반드시 중시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5. 더 깊은 근원을 파헤치다 – 안으로 찾음은 사유 방식을 바로 잡는 것에서
사람마다 심령(心靈) 깊은 곳에는 모두 건드리고 싶지 않은 곳이 있는데, 어떤 것은 심지어 아주 깊이 봉인되어 있다. 하지만 그곳이 바로 흔히 우리는 마주하고, 바로잡고, 제거해야 할 곳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하고 늘 괴롭힘을 당했던 사람은 강한 원망이나 자기 방어적인 성격을 갖게 될 수 있다. 때로는 안으로 찾으면서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즉 현재만 둘러싸고 찾지 말아야 하며, 일 자체의 옳고 그름을 따질 것이 아니라, 최초 일어난 마음과 생각에서부터 찾아야 하며, 심지어 자신의 출신, 성장 과정, 학교 교육 등으로 형성된 사유 방식과 습관까지 찾아야 한다.
우리 많은 사람들이 당 문화를 해체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때로는 깊이 뿌리박힌 것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당 문화가 겉으로 드러난 것만 찾는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정통적인 사유 방식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사유 방식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행동을 바꾸기란 아주 어렵다. 또한 우리가 자신의 사유 방식에서 진정으로 바로잡은 후, 또한 심성(心性)의 제고와 공(功)이 자라는 것 역시 상보상성(相補相成)하는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6. 안으로 찾음과 심성 제고는 상보상성
주동적으로 안으로 찾는 외에 심성의 제고 역시 관건적이다. 사부님께서는 《파룬궁》 〈공력의 파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은 바로 에너지이며 영체(靈體)로서, 축적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공을 내보내는 것은 곧 자신을 소모하는 것이다.”
이 단락 법을 공부하고 나서 나는 활연히 깨달았다. 원래 내부 소모는 단지 에너지를 소모할 뿐만 아니라 공(功)도 감소시킨다. “心性(씬씽)이 얼마만큼 높으면 공도 얼마만큼 높다”(《전법륜》). 좀 엄중하게 말하면, 또 수련 층차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오직 더 높은 층차에 도달해야만 더 높은 층차의 법이 비로소 우리에게 현현(顯現)되며, 비로소 안으로 찾는 것을 더 잘할 수 있다.
이 교류 원고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사부님의 관련 설법을 대량으로 공부했다.
“안으로 찾는” 설법을 학습할 때, 법리(法理)가 마치 실타래처럼 끊임없이 확장되고 더욱 탐구할수록 한 층 한 층 펼쳐졌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곳에서 공, 에너지, 덕(德), 및 층차 제고 사이의 연대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는 가장 평범한 언어로 가장 고심(高深)한 법리를 말씀하셨는데 나로 하여금 거시적으로, 개념적으로, 이치상으로 이 한 층 법(法)의 심오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셨고, 나를 진감(震撼)시켰다. 부처님의 호탕한 은혜를 느꼈고, 눈물이 나와 목이 메게 했다. 동시에 진정한 “믿음”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견정함임을 깨달았다.
이러한 믿음은 나로 하여금 자연스럽고, 주동적이며, 무위(無爲)하게 안으로 찾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은 장엄한 불법(佛法) 앞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겸손과 공경, 자신을 잘 수련하고자 하는 강렬한 바람이었다. 수련을 통해 그런 사람 마음과 집착은 결국 해체될 것이며 억지로 하거나 유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수련 과정이다. 우리 모두 늘 수련 과정에서 안으로 찾고 심성을 향상시키는 것을 견지한다면 정체(整體)의 에너지장도 따라서 승화할 것이다.
7. 꿈의 계시와 종결
이틀 전, 나는 아주 선명한 꿈을 하나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두 차례 인생을 경험했다. 매 한 차례 인생은 마치 현실처럼 생생했고, 그 속에 생활이 있고 가족이 있고 또한 각종 인간 세상의 감정과 경험이 있었다. 매 한 차례 인생은 마치 주마간산처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내가 어느 방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면 곧 또 다른 인생으로 들어갔다. 깨어난 후에도 마음속으로 나는 줄곧 생각했다. 왜 나더러 이 두 차례 인생을 겪게 했을까? 배후에서 무엇을 깨달으라는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유럽법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사람에게 일생만 있다고 여긴다. 사실 사람은 이 일생 중에 마침 잠을 자는 것과 같아 당신의 진정한 자신은 그리 큰 작용을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신체의 껍질에서 나올 때, 당신은 당신이 가뿐함을 발견할 수 있고, 사람의 대뇌 억제를 받지 않을 때 당신은 당신의 사상 전체가 다 개방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공간으로 들어간 후 속인의 그 공간의 시간도 변이(變異)가 발생한다. 마치 잠을 깬 것처럼 당신은 갑자기 당신 일생에서 한 일이 눈에 역력하다. 매 한 건의 작은 일마저도 마치 금방 한 것과도 같이 그처럼 뚜렷하여 단번에 대뇌가 다 해방되었다.”
정말 이런 느낌이었다. 사람은 단지 자신의 일생일세(一生一世)만 알 뿐이며 일단 한단락 인생을 마치고 나면 마치 큰 꿈에서 깨어난 듯 머리가 열리며, 눈앞에 보이는 것은 생생세세(生生世世)이다.
이 꿈속 체험을 통해 나는 인생이란 꿈과 같으니 우리는 가상에 미혹되거나 정(情)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매 한 단락 수련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깨달았다.
수련은 아주 거창한 게 아니라 매 순간마다 즉시 자신을 잘 수련하는 것이다. 사람이나 사물을 대함, 손짓과 발짓, 평소 생활 속의 모든 언행은 다 수련인의 상태와 경지를 반영할 수 있다.
닦는 것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며, 깨닫는 것은 이치가 아니라 이치를 깨닫고 난 후 경지의 제고이며, 사람에서 걸어나와 신(神)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우리 서로 격려하며 반드시 자신을 잘 수련해 사부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갑시다!
위 내용은 수련 중의 작은 깨달음이니 부족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동수 여러분, 감사합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4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