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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를 관통하는 재학으로 만세에 모범이 된 제갈량 (6)

——칠금칠종(七擒七縱),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켜 남중을 평정

고춘추(古春秋)

【정견망】

제갈량이 맹획을 일곱 번 잡고 일곱 번 놓아주었는데, 그중 네 번째에 맹획이 붉은 소를 타고 만병(蠻兵)을 거느리며 함성과 함께 촉군 진영으로 돌격했으나, 제갈량의 계책에 빠져 모두 함정에 빠진다. (삽화: 구루이전)

제갈량은 ‘융중대책’에서 이미 유비를 위해 중원을 북벌(北伐)하고 한실(漢室)을 부흥시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유비의 탁고 이후, 제갈량은 《전출사표》에서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하고, 둔한 능력이나마 모두 발휘해 간신과 흉악한 무리를 제거해, 한실(漢室)을 부흥시켜 옛 도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유비에 대한 보답이자 유선에 대한 충성스러운 직분이라 여겼다.

그러나 촉나라의 거대한 후방인 ‘남중(南中)’은 아직 완전히 복종하지 않은 상태였다. 삼국 시대의 남중이라 함은 주로 지금의 사천(四川) 남부와 귀주(貴州), 운남(雲南) 등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에는 여러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한대(漢代)에는 이곳을 서남이(西南夷)라 통칭했다.

장무(章武) 원년(212년), 유비는 이회를 내강도독(庲降都督)으로 삼아 평이현(平夷縣 지금의 귀주 필절畢節)에 주둔시키고 남중의 사무를 총괄하게 했다. 여기서 ‘내강(庲降)’이란 불러와 굴복시킨다는 뜻이 담겨 있다.

건안 19년(214년) 유비가 촉을 평정한 뒤 남중 여러 군에 내강도독을 설치하고, 안원장군(安遠將軍)인 남군 사람 등방(鄧方)을 주제군(朱提郡) 태수 겸 내강도독으로 삼았다.

내강도독의 치소는 남창현(南昌縣 지금의 운남성 진웅현鎮雄縣)이었으나, 촉한 건립 후 평이현(지금의 귀주성 필절시)으로 옮겼다. 연희(延熙) 연간에는 미현(味縣 지금의 운남성 곡정시曲靖市)으로 옮겨 주제군(지금의 운남성 소통시昭通市), 월수군(越巂郡 지금의 사천성 서창시西昌市), 건녕군(建寧郡 지금의 운남성 곡정시), 장가군(牂牁郡 지금의 귀주성 황평현), 영창군(永昌郡 지금의 운남성 보산시), 흥고군(興古郡 지금의 운남성 구북현丘北縣), 운남군(雲南郡 지금의 운남성 요안현姚安縣) 등 7개 군 61개 현을 관할했다. 편제는 여전히 익주에 속했다.

내강도독은 강주도독(江州都督 주둔지는 지금의 중경시), 영안도수(永安都守 주둔지는 지금의 봉절현 백제성), 한중도독(漢中都督 주둔지는 지금의 한중시)과 함께 촉한이 상설한 네 곳의 진수도독(鎮戍都督) 중 하나였다.

제갈량은 중국 역사상 지혜와 모략이 가장 뛰어난 화신으로 공인받고 있다. (위키백과)

남중의 여러 오랑캐가 난을 일으키다

유비가 죽은 후, 월수의 수족(叟族) 우두머리 고정(高定)이 스스로 왕을 칭하며 군사를 일으켰고, 장가(牂牁) 군승 주포(朱褒)가 군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익주군(益州郡 지금의 운남 진녕현 동쪽)의 대성(大姓) 옹개(雍闓)가 반란을 일으켜 오나라에 항복했다. 옹개는 익주군을 할거하며 영창군까지 탈취하려 했다. 익주와 영창 두 군은 촉나라 경제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으며, 현지의 각 민족은 한족(漢族)과 경제·문화적 교류가 밀접했다. 남중의 또 다른 대성(大姓)인 맹획(孟獲) 역시 반란에 가담했다.

제갈량은 국가가 막 군주를 잃었으므로 먼저 국내의 백성과 관리, 군사들을 안정시키고 군량을 축적하기로 했다. 등지(鄧芝)와 진진(陳震)을 보내 동오와 화친을 맺고, 월수 태수 공록(龔祿)을 남중 접경인 안상현(安上縣)으로 보내 대비하게 했으며, 종사(從事)인 촉군 사람 상기(常頎)를 남쪽으로 직접 보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했다.

동시에 제갈량은 이엄을 통해 옹개에게 여섯 통의 편지를 보내 이해관계를 설명했으나, 옹개는 단 한 통의 답장에서 “내 듣기에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왕이 없다 하는데, 지금 천하는 솥발처럼 나뉘어 스스로 정통이라 일컫는 자가 셋이니, 멀리 사는 사람(옹개)은 의구심이 들어 어디에 귀속해야 할지 모르겠소”라고 매우 오만하게 답했다.

상기가 장가에 도착해 즉시 군의 주부를 구금하고 사실을 조사하려 하자, 주포는 이를 틈타 상기를 살해하고 반란군에 가담했으며, 공록 또한 고정에게 살해당했다.

남중의 소요로 인해 제갈량은 북벌의 후환을 없애고 병력 및 재정 자원을 개척하기 위해 먼저 남정(南征)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켜 마음을 공략

건흥 3년(225년) 3월, 제갈량은 군대을 이끌고 직접 남정에 나섰다. 출발 전 유선은 제갈량에게 황금 부월(斧鉞) 한 세트, 곡개(曲蓋) 한 개, 전후 우보(羽葆)와 고취(鼓吹) 각 한 부, 호분군 60명을 하사했다. 《삼국지·제갈량전》에 따르면 “3년 봄, 제갈량이 무리를 이끌고 남정하여 그해 가을에 모두 평정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은 이번 출정으로 남중 3군을 수복하고 맹획을 굴복시킨 뒤, 그해 12월 성도로 돌아왔다. 전후 약 1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제갈량은 남정군을 세 길로 나누었다.

동로(東路)는 마충이 이끌고 장가로 향했고,

중로(中路)는 이회가 이끌고 평이에서 출발해 익주군으로 향했다.

서로(西路) 주력군은 제갈량이 직접 이끌고 안상(安上 지금의 사천 의빈宜賓 서쪽)을 거쳐 수로로 비수(卑水 지금의 사천 미고美姑)에 도착한 뒤 월수(지금의 사천 서창西昌)로 향했다.

한군(漢軍)이 가는 도중에 옹개는 이미 고정의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한군은 고정을 격살했고, 장군 이회와 마충 또한 여러 반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당시 남중은 매우 거칠고 외진 곳이었다. 제갈량은 《출사표》에서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에 깊이 들어갔다”고 묘사했다. 제갈량은 이번 남정에서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상책(攻心為上)’이며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以德服人)’ 전략을 사용해 남중 사람들이 마음으로 굴복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삼국지·마속전》에 따르면, 마속은 제갈량에게 “남중은 험하고 먼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비록 오늘 이들을 깨뜨릴지라도 내일이면 다시 반역할 것입니다. 지금 공께서 국력을 기울여 강한 적(위나라)을 북벌하려 하시니, 저들은 관의 세력이 내부적으로 비었음을 알고 반란 또한 빠를 것입니다. 용병의 도(道)는 마음을 치는 것이 으뜸이고 성을 치는 것이 다음이며, 심전(心戰)이 으뜸이고 병전(兵戰)이 다음이니, 공께서는 저들의 마음을 굴복시키기에 힘쓰십시오”라고 건의했다.

즉, 남중의 여러 민족은 지세가 멀고 산이 높으며 길이 험한 것을 믿고 오랫동안 중원에 귀순하지 않았으니, 만약 무력으로만 다스린다면 오늘은 평정될지 몰라도 내일이면 다시 일어날 것이니,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을 공략해 현지 주민들이 진심으로 귀복시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장구한 계책이라는 뜻이다.

제갈량은 마속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는 소수민족을 안무(按撫)하려던 제갈량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했다. 이미 오래전 융중대책에서 제갈량은 “서쪽으로는 여러 융(戎)과 화친하고, 남쪽으로는 이월(夷越)을 다독인다”라는 회유책을 제시한 바 있으며, 소수민족을 무력으로만 억압하지 않았다. 분명 제갈량은 마음 공략을 상책으로 삼고 덕으로 사람을 감복시키는 전략에 대해 이미 복안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남정에서 고정, 주포 등 처음 반항을 주도한 몇몇 우두머리만 처단했을 뿐, 다른 소수민족과 한족 상층부 인물들은 최대한 굴복시켜 등용함으로써 그들이 계속해서 남중을 다스리게 했다.

제갈량, 맹획을 일곱 번 잡다

제갈량의 남정 전투 중 후세에 가장 널리 전해지는 것이 바로 ‘칠금맹획(七擒孟獲)’ 이야기다. 칠금맹획(혹은 ‘칠금칠종七擒七縱’)이라는 용어는 《화양국지》 권4 <남중지>에 처음 등장하며, 《삼국지·제갈량전》 배송지 주석에 인용된 《한진춘추》에도 간략히 기재되어 있다. 다만 《삼국지·제갈량전》 본문이나 《출사표》, 그리고 당시 군을 이끌었던 이회와 여개의 전기에는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

《한진춘추》의 기술에 따르면, 제갈량은 남중에서 매번 전투마다 승리했는데 맹획의 명망이 높고 이인(夷人)과 한인(漢人)이 모두 그에게 복종한다는 말을 듣고 장수들에게 그를 생포하라고 당부했다.

맹획을 생포한 뒤 제갈량은 그에게 한군(漢軍) 진영을 보여주며 “그대가 보기에 우리 군대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맹획은 “전에는 당신들의 허실을 몰랐기에 패했으나, 지금 당신들의 진영을 보여주었으니 이 정도라면 승리하는 것도 매우 쉬운 일이오”라고 답했다. 제갈량은 웃으며 맹획을 놓아주었다.

사마광의 《자치통감》 권70의 기록도 《한진춘추》와 거의 같다.

“한 제갈량이 남중에 이르러 가는 곳마다 승전하니, 제갈량은 월수로 들어가 옹개와 고정을 베었다. 내강독(庲降督) 이회는 익주에서 들어오고 문하독(門下督) 마충은 장가에서 들어와 여러 현을 격파하고 다시 제갈량과 합류했다. 맹획이 옹개의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제갈량에 맞섰다. 맹획은 평소 이인과 한인이 모두 복종하던 자라 제갈량이 그를 생포하도록 명령했다.

그를 잡은 뒤 진영을 구경시켜 주며 ‘이 군대가 어떠한가?’라고 물으니, 맹획이 ‘전에는 허실을 몰라 패했으나 이제 진영을 보았으니 이 정도라면 이기기 쉽겠소’라고 했다. 제갈량이 웃으며 그를 놓아주어 다시 싸우게 했다.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잡았으나 제갈량이 여전히 그를 보내려 하자, 맹획이 가지 않고 멈춰 서서 말하기를 ‘공은 하늘의 위엄을 가지셨으니 남중 사람들이 다시는 반역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제갈량은 마침내 전지(滇池)에 이르렀다. 익주, 영창, 장가, 월수 4군이 모두 평정되니 제갈량은 그 우두머리들을 그대로 임용했다.”

즉 제갈량이 맹획을 일곱 번 잡고 일곱 번 놓아주니 맹획이 심복(心服)해 귀순을 표시하고, 남중 사람들은 다시는 반역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것이다. 남중 사람들이 귀순한 후 제갈량은 전지까지 진군하여 이번 반란을 완전히 평정했다.

남정 이후 제갈량은 남중 각 민족의 자치를 허용하고 기존의 사회 구조를 변경하지 않았다. 이는 현지 호족 대성들의 협력을 끌어냈고 남중은 안정을 찾게 되었다.

남중, 촉의 대후방(大後方)이 되다

제갈량은 남중 여러 지역을 평정한 뒤 그곳에 군대를 남기지 않았고 관리도 남기지 않았다.

이에 어떤 이가 제갈량에게 권하자 제갈량이 이렇게 답했다.

“외지 사람을 남겨두려면 군대를 남겨야 하는데, 군대를 남기면 먹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 첫 번째 어려움이요. 이인(夷人)들이 갓 상처를 입어 부형이 죽고 상을 당했으니 외지인을 남기고 군대가 없다면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어려움이다. 또한 관리들이 거듭 폐살(廢殺)의 죄를 지어 스스로 허물이 무겁다고 생각하니, 외지인을 남겨둔들 끝내 서로 믿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어려움이다. 이제 나는 군대를 남기지 않고 식량을 운반하지 않으면서도 기강을 대략 세우고 이인과 한인(漢人)이 대략 편안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

제갈량의 말은 남중의 관리를 주둔시키는 데 세 가지 큰 어려움이 있다는 뜻이다. 우선 관리를 주둔하려면 안전을 위해 군대를 동반해야 하는데 현지에서 군량 해결이 어렵고, 전쟁 직후라 현지인들의 보복이 우려되며, 현지 관리들이 자신들의 죄책감 때문에 외지 관리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군대를 두지 않음으로써 식량 수송의 부담을 덜고, 통치의 기본 틀만 잡되 이인과 한인이 서로 평안하게 지내도록 한 결정이었다.

그렇다고 관리와 병사를 한 명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내강도독과 각 군의 태수는 여전히 촉한 정권이 위임하여 성도에서 파견했고, 기타 직위는 현지 수령들에게 맡겨 현이나 읍의 관리로 등용하고 그들을 읍후(邑侯)나 읍군(邑君)이라 불렀다.

마지막으로 제갈량은 이회를 건녕 태수, 여개(呂凱)를 운남 태수로 임명했고, 찬습(爨習)과 맹염(孟琰) 등을 항복시켜 맹획과 함께 관직을 주어 남중 사람들을 포섭했다. 오직 마충(馬忠)만이 타지 사람으로서 장가 태수로 임명되었으나 그 역시 이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자치통감》에서는 “제갈량은 이에 맹획 등 그곳의 준걸들을 모두 거두어 관속으로 삼고, 그곳의 금, 은, 주사, 칠, 밭소, 군마를 거두어 군국(軍國)의 비용에 충당했다. 이때부터 제갈량이 살아있는 동안 이인들은 다시 반역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즉 한군이 남중을 정복한 후 현지 부족의 우두머리나 상층부를 기용했는데, 맹획은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임명되었다. 남중 사람들이 공납한 금, 은, 소와 말 등은 촉한의 군비에 보탬이 되었고, 이인과 한인의 관계가 크게 개선되어 제갈량 생전에는 남방에서 큰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촉한 내부도 안정을 찾았다.

제갈량의 남중 평정은 병력과 재물을 늘리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군수 물자가 그곳에서 나와 나라가 부유하고 풍족해졌으며” 제갈량의 북벌은 더욱 견고한 기초를 갖게 되었다.

동시에 남중에서 병력도 보충했다. 《화양국지·남중지》에 따르면, 제갈량은 “남중의 굳센 군사들과 청강(青羌) 만여 가(家)를 촉으로 옮겨 5부로 삼으니 그 기세가 막을 자가 없었다”라고 한다. 이회가 남쪽 땅을 평정한 후에는 “수(叟)족과 복(濮)족으로부터 소와 말, 금과 은, 무소 가죽을 세금으로 거두어 군수 물자로 충당하니 당시 비용이 부족함이 없었다”라고 했다. 장억(張嶷)이 장가(牂牁)와 흥고(興古)의 요인(僚人)들을 평정한 뒤에는 “항복한 자 2천 명을 얻어 모두 한중으로 보냈다.”

제갈량이 남중에서 소수민족에게 생산 기술을 전수하고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여 서남 지역의 경제 번영을 촉진했다. 뽕나무는 잎으로 누에를 치고 껍질로 종이를 만들며 열매인 오디는 식용하고 잎, 가지, 열매, 뿌리껍질은 모두 약재로 쓰이니 전신이 보물이다. (Fotolia)

제갈량, 후세의 추앙을 받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남중 평정에 관한 기술은 단 12자뿐이다. “3년 봄, 제갈량이 무리를 이끌고 남정하여 그해 가을에 모두 평정했다.”

제갈량의 촉나라 통치와 남정은 서남 지역 각 민족에게 매우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전서(滇西, 운남 서쪽) 지역에는 제갈량 남정과 관련된 많은 ‘유적’과 민간 전설이 남아 있다.

당시 제갈량은 남중을 안정시킨 뒤 현지의 생활 문화를 존중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그들에게 중화문화를 전해 큰 혜택을 입게 했다. ‘칠금칠종’의 실재 여부에 대해 학계에서는 의구심과 논쟁이 있으나, 민간에서는 이미 깊이 뿌리박힌 이야기가 되었다.

사서에 따르면 제갈량은 남중에서 둔전(屯田)을 크게 일으키고 생산 기술을 전수하여 서남 지역의 경제를 번영케 했다. 명조(明朝) 양신(楊愼)의 《전재기(滇載記)》에는 “여러 이인(夷人)이 무후(武侯 공명)의 덕을 흠모하여 점차 산림을 떠나 평지로 옮겨 살며 성읍을 세우고 농사와 양잠에 힘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 지역의 많은 민족이 제갈량에 대한 존경심으로 깊은 산속을 나와 농경 생활을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족(彝族)과 묘족(苗族) 또한 제갈량이 자신들에게 많은 생산 기술을 가르쳐주었다고 믿고 있다.

현지 백성들은 공명을 신명(神明)처럼 받들었으며, 남방의 소수민족들은 제갈량에게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껴 일부는 지금까지도 제갈량의 사당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

명대 중기의 저술인 《전략(滇略)》에 따르면 운남 한 곳에만 제갈량과 관련된 지명과 유적이 40여 곳에 달하며, 현지 민족들은 제갈량을 “천지(天地)처럼 경외하고 조상처럼 사랑했다”라고 한다. 이때는 아직 《삼국연의》가 널리 유행하기 전이었으므로, 제갈량이 남중을 평정한 지 천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서남 민족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태족(傣族)들 사이에는 ‘승상’을 노래하는 시구도 전해진다.

근대 운남 출신 문인이었던 조번(趙藩)은 “마음을 공략할 수 있다면 반측이 저절로 사라지니, 예부터 병법을 아는 이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음을 알겠노라”, “일곱 번 잡은 것은 치밀한 책략에 의거한 것으로 한 번 싸움으로 만묘(蠻苗)를 안정시켰다”라는 찬사를 남겼다. 지금까지도 촉한과 인접한 서남 지역인 미얀마, 태국 북부 일대의 일부 주민들은 제갈량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그를 ‘공명(孔明)’이라 높여 부른다.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16/5/31/n794919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