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 치하에서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고 풍속이 엄숙해져
고춘추(古春秋)
【정견망】
유비가 백제성에서 탁고(託孤)한 이후, 제갈량은 승상의 신분으로 촉한의 후주 유선을 보좌하며 군과 국가의 대정(大政)을 주관했다. 유선은 아버지의 유언을 굳게 지켜, 촉한의 군사 및 정치 사무를 크고 작은 것 가릴 것 없이 모두 승상 제갈량에게 맡겨 재결하게 했다. 제갈량 또한 유선에 대해 유비에게 했던 약속을 지켜, 실로 ‘고굉(股肱)의 힘을 다하고 충절을 바치며 죽음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음’을 실천했다. 그리하여 촉나라는 크게 다스려졌다.
익주 선비들 명군(明君)을 기다려
유비가 촉에 들어오기 전, 그 땅은 유장(劉璋)이 다스리고 있었다. 유장의 자는 계옥(季玉)으로, 아버지 유언(劉焉)의 뒤를 이어 익주목이 되었다. 《삼국지》에서는 그를 일컬어 “명확한 판단이 부족하다”라며, “영웅의 재주가 아닌데 난세에 처해 도적을 불러들였으니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다. 그가 자리를 빼앗긴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제갈량은 융중대에서 이미 “유장은 암약하고 장로는 북쪽에 있는데, 백성은 부유하고 나라는 풍요로우나 아끼고 보살필 줄 모르니, 지혜로운 선비들이 밝은 주군을 얻기를 바란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유장은 교만하고 방자한 여러 장수를 제어할 충분한 힘이 없었고, 인재와 준걸을 선발하거나 중용할 능력도 없었다. 그의 수하 중 유능한 관리였던 장송(張松), 법정(法正) 등은 모두 유비를 촉으로 맞이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제갈량이 융중대에서 말한 “익주의 지능 있는 선비들이 밝은 주군을 얻고자 함”과 부합한다.
유비가 익주를 취한 뒤, 유장의 구신(舊臣)들에 대한 처우는 민심을 크게 얻었다. 《삼국지》 기록에 따르면 “동화, 황권, 이엄 등은 본래 유장이 등용했던 자들이고, 오의, 비관 등은 유장의 인척이며, 팽양은 유장이 내쫓았던 자이고, 유파(劉巴)는 오랫동안 꺼리고 미워하던 자였다. 그러나 유비는 이들을 모두 현직에 임명하여 그 재능을 다하게 하니, 뜻있는 선비들이 앞다투어 노력하지 않음이 없었다”라고 한다.
즉, 과거에 유장이 중용했든 가까웠든, 혹은 배척했든 미워했든 상관없이 유비는 모두에게 중책을 맡겨 재능을 펼치게 했으며, 능력 있는 이들이 모두 고무되었다. 이는 유장 시기에 해결하지 못했던 모순을 완화했을 뿐만 아니라 유비가 익주에서 내린 뿌리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현지 인재의 등용
제갈량이 집권한 후, 익주 현지의 인재들을 발탁하는 데 각별히 신경을 썼다. 《삼국지 두미전(杜微傳)》의 기록에 따르면 “건흥 2년(224년), 승상 제갈량이 익주목을 겸하며 인재를 선발할 때 모두 덕망 있는 옛 인사들을 정묘하게 골랐는데, 진밀(秦宓)을 별가로, 오량(五梁)을 공조로, 두미를 주부로 삼았다”라고 한다.
진밀은 자가 자칙(子敕)으로 광한 면죽(綿竹 지금의 사천 덕양 북쪽) 사람인데, 비교적 재주와 학문이 있고 구변에 능했다. 두미는 나이 많고 귀가 먹은 사람이었는데 유비가 촉을 평정한 뒤 두문불출했다. 제갈량이 집권 후 그를 익주 주부로 임명하자 두미가 사양했는데, 제갈량이 수레를 보내 그를 맞이했다. 두 사람이 만난 후 제갈량은 두 편의 글을 써서 두미를 설득하며 후주를 보좌해 주기를 희망했다. 그가 연로하고 귀가 멀었으므로 제갈량은 결국 그를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했다.
《화양국지(華陽國志)》의 기록에 따르면, 유비가 촉에 입성한 후 형주(荊州) 출신의 옛 인물들을 중시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촉한 정권이 익주에 발을 붙이려면 반드시 현지 인재를 선발해야 함을 간파했다.
《삼국지 촉지(蜀志)》 각 전의 기록을 보면 장예, 양홍, 마충, 왕평, 구부, 장익, 장억, 이회 등 익주 현지 인재들이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며, 이는 승상이나 대장군보다 조금 낮을 뿐이었다. 이에 “서토(西土 익주) 사람들이 모두 제갈량이 당시 사람들의 그릇과 재능을 다 쓰게 함에 복종했다”라고 한다. 촉한이 익주라는 한 모퉁이의 땅으로 조위(曹魏)와 맞설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 인재를 잘 사용한 데 있었다.
양한(兩漢) 이래 익주 본토 인재들은 정치적으로 줄곧 차별당해 왔는데, 제갈량이 성의를 다해 그들을 임명하자 그들은 자연히 제갈량을 옹호했다. 그리하여 제갈량이 연이어 북벌하며 익주에서 병사와 군량을 징수했음에도 현지 호족들이 반대하는 일이 없었으며, 최전방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형세에 따른 시정으로, 덕과 형벌이 상호보완
성도 무후사 내 제갈량전 정면 중앙에는 대련 하나가 걸려 있는데, 이는 광서 28년(1902년) 조번(趙藩)이 쓴 것이다. 그 내용은 “마음을 공략하면 반측이 스스로 사라지니, 예로부터 병법을 아는 자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음을 알겠도다. 정세를 살피지 못하면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모두 그르치게 되니, 후세에 촉을 다스리는 자들은 깊이 생각해야 하리라[能攻心則反側自消,從古知兵非好戰;不審勢即寬嚴皆誤,後來治蜀要深思]”이다. 이는 촉나라를 다스린 득실에 대한 경험적 총괄이다.
유장 시대 익주 지방의 호족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자 그저 너그럽게 방종할 뿐이었다. 제갈량은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먼저 인덕(仁德)에 의한 감화와 교육에 의지하는, 동시에 ‘법도(法度)를 정하고 상벌(賞罰)을 분명히 함’을 보조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치국(治國)》이라는 글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는 집을 다스리는 것과 같으니, 집을 다스리는 이는 근본을 세우는 데 힘써야 한다. 근본이 서면 지엽적인 것은 바로잡힌다”라고 했으며, “그러므로 근본이란 경상(經常)의 법이며 규구(規矩)의 요체다”라고 했다.
제갈량은 《답법정서(答法正書)》에서 유장이 촉을 다스린 단점을 지적하며, 익주가 유언과 유장 2대에 걸쳐 통치되는 동안 유장의 성품이 암약(闇弱)하여 법령이 해이해지고 겉치레만 일삼았음을 언급했다. 관원들은 서로 아첨하고 덕정(德政)을 베풀지 않아 백성들의 마음속에 위엄이 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익주의 호족들이 감히 멋대로 굴었으며 군신의 도리가 날로 쇠퇴해졌다. 그러므로 반드시 법령을 엄하고 밝게 하되 선한 일에는 반드시 상을 주고 악한 일에는 반드시 벌을 주어, 영예와 은혜를 함께 베풀고 위아래에 절도가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제갈량의 엄명한 법령 정책은 호족들을 제한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격려할 수도 있었기에 촉 땅의 정치는 고도의 청명(淸明)해졌다.
이치(吏治, 관리의 다스림)를 정돈하고 관료계의 부패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제갈량은 이엄, 법정, 유파, 이적 등과 《촉과(蜀科)》를 제정했으며, 스스로 관리를 감찰하는 수칙을 만들었다. 《위씨춘추(魏氏春秋)》에 따르면 “제갈량은 《팔무(八務)》, 《칠계(七戒)》, 《육공(六恐)》, 《오구(五懼)》를 지었는데 모두 조항이 있어 신하와 자식들을 훈계하고 격려했다”라고 한다.
그는 또 《교령(教令)》이라는 글에서 “가르침과 명령을 우선으로 하고 형벌은 뒤로 한다”라고 명확히 밝혔다. 즉 나라를 다스릴 때 먼저 어진 정치로 교화(敎化)를 실시하고 법률 조항을 공포해, 백관과 백성들이 나아가고 물러남을 알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알게 한 뒤에야 율령을 범한 자에 대해 처벌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명령하지 않아도 제어되고”, “왕도(王道)가 평탄하여”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게 했다.
제갈량은 유봉(劉封)을 주살하고 팽양(彭羕)을 죽였으며, 마속(馬謖)을 베고, 한민(寒敏)을 내쫓았으며, 요립(廖立)을 파면하고 이엄(李嚴)을 폐하는 등 황실의 친인척이나 측근, 옛 친구, 탁고의 중신(重臣)이라 해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처벌받은 이들의 죄행이나 과실은 모두 증거가 확실했고 철증(鐵證)이 산과 같았다.
예를 들어 장수교위(長水校尉) 요립은 일찍이 제갈량이 방통과 나란히 비견될 ‘양재(良才)’로 여겼던 인물이나, 후에 명예와 이익을 다투고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인 일로 문산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요립은 제갈량의 부고를 듣자 목 놓아 통곡했다.
또한 이엄은 촉한의 중신으로서 제갈량과 함께 유비 임종 시 탁고를 받은 대신이었고, 후에 이름을 이평(李平)으로 고쳤다. 건흥(建興) 9년(231년) 봄, 제갈량이 한중으로 출병하며 이평에게 군량 수송을 감독하게 했는데, 마침 장마로 수송 기한을 넘기자 그는 제갈량에게 회군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군사가 물러난 뒤 그는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 속임수를 썼으나 제갈량에게 면전에서 간파당해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군법을 바로 세우기 위해 그는 서민으로 강등되어 자동군(梓潼郡)으로 유배되었다.
이평을 파면한 후 제갈량은 당시 중랑장 참군(參軍)이었던 이평의 아들 이풍(李豐)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를 위로하고 지난 허물을 스스로 반성하게 하라고 했다. 오직 일심으로 나라를 위한다면 여전히 길이 있음을 알려준 것이다. 건흥 12년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평은 자신이 다시 등용될 수 없음을 알고 근심하다 죽었다.
동진의 습착치(習鑿齒)는 《한진춘추(漢晉春秋)》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옛날 관중이 백씨(伯氏)의 변읍(駢邑) 삼백 호를 빼앗았으나 그가 죽을 때까지 원망하는 말이 없었으니 성인(공자)께서도 이를 어렵게 여기셨다. 제갈량이 요립을 눈물 흘리게 하고 이평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어찌 단지 원망하는 말이 없는 정도뿐이겠는가! 무릇 물은 지극히 평평하므로 굽은 자가 이를 법으로 삼고, 거울은 지극히 밝기에 못난 자도 노여워하지 않는다. 물과 거울이 만물의 본모습을 다 드러내면서도 원망이 없는 이유는 사(私)가 없기 때문이다. 물과 거울은 사가 없어 비방을 면하는데, 하물며 대인군자가 생령(生靈)을 즐겁게 하려는 마음을 품고 긍휼과 용서의 덕을 흘려보내며, 법을 쓰지 않을 수 없을 때 실행하고 스스로 저지른 죄에 형벌을 가하며, 작위를 주어도 사사롭지 않고 죽여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천하에 복종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제갈량은 이로써 형벌을 잘 썼다고 할 수 있으니 이는 진한(秦漢) 이래 없었던 일이다.”
솔선수범하는 도덕의 모범
제갈량이 촉을 다스린 성취는 그가 솔선수범한 것과도 관계가 있다. 제갈량의 도덕적 품성은 그의 지혜만큼이나 사람들의 존중과 경앙을 받았다.
제갈량은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몸소 행했다. 위씨춘추 기록에 따르면 “제갈공명은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잠들며, 곤장 스무 대 이상의 형벌은 모두 직접 살폈다”라고 한다. 《양양기(襄陽記)》에는 제갈량의 주부 양옹(楊顒)이 제갈량이 직접 장부를 대조하며 더위에 종일 땀을 흘렸음을 전하고 있다.
제갈량 집안의 가풍은 조상인 제갈풍(諸葛豐) 때부터 시작되었고 ‘독립적이고 강직함’으로 유명했으며, 제갈량 자신도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는 고결한 선비였다.
건흥 12년(234년), 제갈량은 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다섯 번째 북벌을 단행했다. 길을 떠나기 전 그는 후주 유선에게 표문을 올렸다. “성도에 뽕나무 팔백 그루와 척박한 밭 십오 경이 있으니 자제들의 의식(衣食)은 스스로 넉넉할 것입니다. 제가 밖에서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별도의 조달 없이 몸에 필요한 의식을 모두 관에서 공급받고 있으니, 따로 생업을 꾸려 재산을 늘리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죽는 날에 안으로 남은 비단이 없고 밖으로 남은 재산이 없게 하여 폐하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갈량의 전 재산은 척박한 밭 십오 경인데 여기에는 뽕나무 팔백 그루를 심은 뽕나무밭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대(漢代)의 1경을 백 무(畝)로 계산하면(당시 1무는 오늘날의 0.69무에 해당), 제갈량은 오늘날로 치면 천여 무에 해당하는 전답을 소유한 셈이다.
《진서 식화지(晉書食貨志)》에 따르면, 서진(西晉) 초기에 관리들의 점유 토지 수량에 대한 명문 규정이 있었다. “1품은 50경, 2품은 45경, 3품은 40경… 8품은 15경, 9품은 10경”이었다. 이를 통해 제갈량이 비록 1품 관직에 올라 만인(萬人)의 위에 있었으나 그의 전답은 고작 8품 관리의 수준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제갈량이 보기에 이러한 척박한 밭과 뽕나무만으로도 가족들이 부지런히 힘쓰면 자손들의 의식은 충분했다. 그 자신은 밖에서 군을 이끌고 전투 중이었으므로 평소 의식은 모두 관의 녹봉으로 충당했기에 분수에 넘치는 생각이나 욕심을 품지 않았다.
제갈량은 밖에서 임무를 수행하면서 ‘별도의 조달’이 없었음을 천명했다. 즉 군대를 이끌면서 ‘직무상의 편의’를 이용해 명목을 만들어 재물을 징수하지 않았고, 공금을 개인 용도로 결제하지 않았으며, 타인에게 돈이나 물건을 보내도록 암시하거나 사주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평생 “따로 생업을 꾸려 재산을 늘리지 않았으니” 즉 사사로이 업을 꾸리거나 가산(家産)을 단 한치도 늘리지 않았고, “안으로 남은 비단이 없고 밖으로 남은 재산이 없게” 했다. 즉 집안에 불필요한 비단이 쌓이지 않게 하고 집 밖에 여분의 재산을 두지 않았으니, 단 한 뼘의 땅이나 금붙이도 쌓아두지 않은 것이다. 《자치통감》 〈위기(魏紀)〉에서는 “끝내 그가 한 말과 같았다”라고 했다.
제갈량은 작풍이 공정(公正)해서 아첨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허심탄회하게 간언(諫言)을 받아들였다. “상은 멀리 있는 자라도 빠뜨리지 않았고 벌은 가까운 자라도 굽히지 않았으며, 작위는 공로가 없으면 얻을 수 없었고 형벌은 귀하고 세력이 있다고 해서 면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 모두가 제 몸을 잊고 헌신한 이유이다.“
제갈량이 임종에 앞서 올린 표문과 유언은 읽는 이로 하여금 절로 엄숙한 경외심을 갖게 한다. “엎드려 바라오니 폐하께서는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시며 자신을 단속하고 백성을 사랑하십시오.” “한중 정군산에 장사 지내되 산을 이용해 무덤을 만들고 묏자리는 관이 들어갈 정도로 하며, 평상복을 입혀 염하고 부장품은 넣지 말라.“
제갈량의 통치 아래 촉한의 정치는 유장 시대보다 크게 활기를 띠었으며 동시대의 위, 오 두 나라보다도 더욱 훌륭했다.
오나라 신하 장온(張溫)이 촉에 사신으로 왔다 돌아간 뒤 촉의 정치를 찬양한 바 있다. 당시 위나라의 지혜로운 대신인 유엽(劉曄)과 가후(賈詡)도 제갈량이 나라를 잘 다스린다고 말했다. 진수는 〈제갈량전〉에서 제갈량이 촉을 다스린 치적을 반복해서 찬양했지만 위나 오 두 나라 군주에 대해서는 이렇게 서술하지 않았다. 제갈량 사후 촉한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수십 년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니, 진수와 원준(袁准) 모두 백성들이 공명을 생각함이 서주(西周)의 백성들이 소공(召公)을 생각함과 같다고 했다. 이로써 제갈량이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정도가 당시에 이미 이와 같은 높이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제갈량은 나라를 다스리며 경제를 매우 중시하여 양잠업을 크게 장려했기에 촉금(蜀錦, 촉나라 비단)은 중국의 유명한 산물이 되었다. 좌사(左思)의 《촉도부(蜀都賦)》에서는 “조개껍데기 같은 무늬의 비단이 산처럼 쌓였고 고운 빛깔이 별처럼 번뜩인다. … 집집마다 베틀 소리가 서로 화답하고 아름다운 비단이 짜여 나오니 강물에 씻긴 빛깔이 영롱하다”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당시 촉금 생산에 관한 진실한 기록이다. 제갈량은 “지금 백성은 가난하고 나라는 비었으니 적을 물리칠 자본은 오직 비단뿐이다”라고 여겼다.
제갈량은 또 농업을 권장하고 곡식을 비축하며 “관문을 닫고 백성을 쉬게 하였고”, 농번기를 빼앗지 않았으며 세금을 가볍게 했다. 또한 천팔백여 명을 고정적으로 배치하여 도강언(都江堰)을 유지 관리하게 했다.
또한 제갈량은 천연가스를 이용해 소금산업을 발전시키고 술 제조를 제한하며 제련 기술을 높였으며, 언관(堰官), 금관(錦官), 사금(司金) 중랑장, 전농교위, 염부교위(鹽府校尉)를 두었다. 나라 재정과 민생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소금과 철을 전매해, 촉한 정권에 “밭이 개간되고 창고가 가득 차며 기계는 날카롭고 저축은 넉넉한” 번영의 풍경이 나타나게 했다.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침범하지 않아 풍속이 엄숙해져
제갈량 사후 장완(蔣琬)과 비의(費禕)가 차례로 집권하며 “모두 제갈량의 정해진 규범을 받들어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았다.” 즉 촉한의 정치 제도는 대부분 제갈량이 제정한 것이며 후인들이 이를 계승하여 변경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진수는 제갈량이 재상을 맡아 백성을 진휼하고 예의와 법규를 밝히며 백관을 단속하고 형편에 맞게 일을 처리해,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공정무사(公正無私)했다고 평가했다. 선한 일에는 반드시 상을 주고 악한 일에는 반드시 벌을 주었다. 결국 백성들의 경외와 사랑을 받았으니 비록 형법과 정령이 엄격했으나 마음으로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제갈공명은 마음 씀이 공평하고 권계(勸戒)가 분명했으니 이는 관중이나 소하에 비견될 치국의 양재(良才)였다.
진수는 《진제갈량집표(進諸葛亮集表)》에서 제갈량이 촉을 다스리던 기간의 정적을 평가하며 유비 사후 후주인 유선이 유약해 “크고 작은 일들을 제갈량이 모두 전담했습니다. 이에 밖으로는 동오와 연합하고 안으로는 남월을 평정했으며 법과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고 군대를 완전히 다스렸으며 도구와 무기 제작에 교묘한 기술을 발휘해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탐구했습니다. 또 법률과 교화를 엄격하고 밝게 시행해 신상필벌의 원칙을 보였습니다. 이에 악인은 징벌받지 않는 자가 없었고 선인은 포상받지 않음이 없었으며, 관리에 대해서는 간악한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스스로 힘쓸 생각을 품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았으며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지 않으니 풍속과 교화가 엄숙하게 이루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16/5/30/n7945201.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