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치무공으로 충무후에 봉해져 (하)
고춘추(古春秋)
【정견망】
제갈공명 (천외객)
당 태종은 제갈량이 재상으로서 보여준 공평과 충의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전당문》 권10에 기재된 기록에 따르면 당 태종은 제갈량과 고경을 재상으로서 공정하고 곧았다고 평가했다.
“짐은 근래 수나라 시대의 노인들을 만났는데, 모두가 고경(高熲)이 재상 노릇을 잘했다고 칭찬하였다. 이에 그의 본전(本傳)을 살펴보니, 가히 공평하고 정직하며 무엇보다 통치의 근본(治體)을 잘 알았다고 할 수 있다. …. 또한 한(漢)과 위(魏)나라 이래로 제갈량이 승상이 되어 역시 매우 공평하고 정직했다. 제갈량이 일찍이 표문을 올려 요립(廖立)과 이엄(李嚴)을 관직에서 폐해 남중(南中)으로 귀양 보낸 적이 있다. 요립은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눈물을 흘리며 ‘나는 이제 오랑캐의 옷을 입게 되겠구나’라고 하였고, 이엄은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이 나서 죽었다. 그러므로 진수(陳壽)는 제갈량의 정치를 칭송하여 이르기를 ‘성심을 열고 공도를 펼쳤다. 충성을 다해 시국에 유익한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한 이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라고 하였다. 그대들이 어찌 이를 우러러보며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 태종은 제갈공명을 찬양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행동을 본받기도 하였다. 《정관정요》 권8 〈사령(赦令)〉에 따르면, 정관 7년에 태종이 시신(侍臣)들에게 일컬었다.
“천하에는 어리석은 자가 많고 지혜로운 자는 적다. 지혜로운 자는 악행을 저지르려 하지 않으나, 어리석은 자는 법도를 범하기를 좋아한다. 무릇 사면(赦免)의 은혜는 오직 법을 어긴 무리에게만 미친다. 옛말에 이르기를 ‘소인의 행운은 군자의 불행이다’라고 하였고, ‘한 해에 두 번 사면하면 선량한 사람들이 벙어리가 된다’고 하였다. 대저 ‘가라지를 기르는 것은 곡식을 상하게 하는 것이요, 간사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선량한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옛날 ‘문왕(文王)이 벌을 내릴 때 형벌은 엄중히 하되 사면하는 일은 없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촉(蜀) 선주 유비가 일찍이 제갈량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원방(陳元方 진기), 정강성(鄭康成 정현)과 교유하며 매번 난세를 다스리는 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으나, 일찍이 사면을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촉을 다스린 10년 동안 사면하지 않았으나 촉의 교화가 크게 이루어졌다. 양(梁) 무제(武帝)는 매년 여러 차례 사면하였으나 결국 패망에 이르렀다. 무릇 작은 인(仁)을 도모하는 것은 큰 인의 적이다. 그러므로 짐이 천하를 다스린 이래 가벼이 사면하지 않았다.”
담박명지 영정치원 (澹泊明志 寧靜致遠)
제갈량은 융중에 은거하며 “담박함으로써 뜻을 밝히고, 영정(寧靜)함으로써 멀리 이른다(淡泊明志, 寧靜致遠)”라는 말로 스스로 기약하였다. 제갈량이 몸소 밭을 갈았음은 《출사표(出師表)》에서 “신은 본래 벼슬 없는 선비로 남양에서 몸소 밭을 갈았으며, 제후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자신의 소회를 기술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제갈량의 가문은 양양 상층 사회와 관계가 밀접했으며 채씨(蔡氏), 괴씨(蒯氏)와는 인척 관계였고, 유표(劉表)와는 개인적으로 조카 사이였다. 그러나 그는 양양 귀족들의 구제를 받지 않았으니, 이는 제갈량이 수신(修身)한 경지를 보여준다.
제갈량의 이 글은 글뜻이 매우 깊고 내함(內涵)이 방대하지만, 여기서는 ‘담박(淡泊)’에 대해서만 언급하여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담박은 중국 고대 도덕의 한 가지 표준이었다. 《노자》는 일찍이 “염담(恬淡)을 으뜸으로 여기니, 승리하더라도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중국의 전통 사대부들 역시 줄곧 담박을 인생의 한 경지로 삼아 추구해 왔다.
예를 들어, 당대의 백거이(白居易)는 《문추광(問秋光)》이라는 시에서 “심신은 더욱 편안해지고, 안개 낀 풍경은 더욱 담박하네(身心轉恬泰,煙景彌淡泊)”라고 적었는데, 이는 마음속에 잡념이 없고 한가롭고 적의하며, 눈앞의 이익이나 득실에 따라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고원(高遠)하고 활달한 의경(意境)을 표현한 것이다.
제갈공명은 평생 참으로 담박명지(淡泊明志)와 영정치원(寧靜致遠)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겼다. 제갈량은 14년 동안 촉의 승상으로 있으면서 재물을 모으지 않았고 사사로운 이익이나 명예와 지위를 탐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한실(漢室) 부흥을 임무로 삼았다.
후주(後主)가 즉위한 후 제갈량은 승상으로서 무향후(武鄉侯)에 봉해지고 익주목(益州牧)을 겸하며 촉한의 대권을 한 몸에 지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지위가 높고 권세가 크다고 해서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유비로부터 후사를 부탁받은 후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고 유선(劉禪)에게 온 힘을 쏟았으며, 모든 일을 몸소 실천하고 나라의 근심을 집안일처럼 여겼다. 《출사표》에서 그 심적을 분명히 밝히고 직접 대군을 이끌어 북벌에 나섰으나, 자신은 결국 먹는 양은 적고 일은 번잡하여 과로로 병이 깊어져 군중에서 서거하였다.
한편 똑같이 후사를 부탁받은 탁고 대신이었던 이엄(李嚴)은 명예와 이익, 권세를 중하게 여겨 제갈량에게 구석(九錫)을 받으라고 권하는 편지를 썼다. 이른바 구석이란 황제가 하사하는 수레와 말, 의복, 음악, 붉은 문, 납폐, 활과 화살, 도끼, 거창(鬯) 등을 말하며 천자가 대신에게 관직과 작위를 높여주는 최고의 예우다.
제갈량은 이를 거절하며 이엄에게 보낸 답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그대가 서로 안 지 오래되었거늘 아직 서로를 잘 알리 못하는군요! …. 나는 본래 동방의 하찮은 선비였으나 선제(先帝)에게 잘못 임용되어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지금 도적을 토벌하는 일도 이루지 못했고 나를 알아준 은혜에 답하지 못했는데, 도리어 제 환공이나 진 문공과 영광을 비기고 스스로 존기한 자리에 앉아 있는다면 이는 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위나라를 멸해 조예의 목을 베고 폐하께서 옛 도읍으로 환도하시면 여러분들과 함께 승진할 것이며 그때는 구석이 아니라 십명(十命)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또 《우여이엄서(又與李嚴書)–이엄에게 재차 보내는 글》에서 “내가 받은 녹이 80만 곡(斛)에 이르지만, 지금 쌓아둔 재산이 없고 첩 또한 갈아입을 옷(副服)조차 없다”고 했다.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것은 여벌의 옷이 없다는 뜻이다. 장수(張澍)는 주석에서 “후(侯)의 첩이 오히려 갈아입을 옷조차 없었으니, 그 검소한 덕은 가히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라고 하였다.
제갈량은 죽기 전 자신을 한중(漢中) 정군산(定軍山)에 묻어달라고 분부하며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고 산세에 따라 무덤을 만들되 관을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면 족하다고 하였다. 또 평소 입던 옷을 입히고 다른 부장품은 넣지 말라고 하였다.
제갈량은 충과 의를 모두 완벽히 갖추었으며 중국 역사상 공인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의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고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鞠躬盡瘁, 死而後已)”는 정신은 이후 수많은 인인(仁人)·지사(志士)들에게 일종의 격려가 되었으며 중국 전통문화의 정신적 내함 중 하나가 되었다.
(완결)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16/6/5/n7966086.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