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치무공으로 충무후에 봉해져 (상)
고춘추(古春秋)
【정견망】
제갈량은 지혜의 화신이자 현명한 재상의 모범으로, 사람들로부터 성인으로 추앙받고 신(神)처럼 숭배되었다. 평생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을 떨치고 충의가 드높았던 그는 사후 ‘충무후(忠武侯)’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이는 고대 신하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시호다.
천추에 빛나는 제갈량의 충의(忠義)
제갈량이 재상으로 있었던 14년, 특히 후주를 보좌한 12년 동안 촉나라는 거의 아무런 유리한 점도 없었다. 두보의 시 《촉상(蜀相)》에서 “삼고초려의 번거로움은 천하를 위한 계책이었고, 두 조정에 걸친 노고는 노신(老臣)의 마음이었네(三顧頻煩天下計,兩朝開濟老臣心)”라고 읊은 것이 바로 이 점을 말해준다.
삼국이 정립(鼎立)했을 때 촉의 국력은 가장 약했으며, 영토와 인구 모두 세 나라 중 꼴찌였다.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모셔 오며 기탁한 것은 하나의 왕조(王朝)를 창건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이었다.
촉의 건국과 통치는 그야말로 가시밭길을 헤치며 나아가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유비가 유장으로부터 얻은 익주는 국고는 텅 비고 백성이 가난하여 “도처에 상처뿐이고 들판은 굶주림으로 황폐한” 상태였다. 제갈량은 이러한 ‘한 주(州)의 땅과 10만의 군사’를 기점으로 조위에 대항하고 동오와 연합했다. 그는 유비에게 ‘충성스럽고 순종하며 부지런히 노력’했으며, 스스로 모범을 보였으니 참으로 고귀한 일이다.
월수, 장가, 익주 등 4개 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제갈량은 건흥 3년 남정에 나서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에 깊이 들어갔으며, 하루에 한 끼를 먹으며 장기(瘴氣)가 가득한 땅을 밟고 오랑캐의 마을을 건넜다.”
제갈량이 이 원정으로 남중의 소요를 평정하고 맹획을 굴복시킨 뒤, 그해 12월 성도로 돌아오기까지 거의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동진(東晉)의 사학자 원굉(袁宏)은 《삼국명신송》에서 제갈량을 이렇게 평가했다.
“공명 선생 크고 넓어 때를 기다려 움직이셨네,
아득히 관중과 악의를 생각해 멀리 풍류(風流)를 밝히셨네.
예법으로 나라를 다스리시니 백성은 원망 소리 없고,
형벌을 남용하지 않으니 억울함에 우는 이 없네.
비록 옛사람이 남긴 사랑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리오.
임종에 고아를 부탁하니 유조 받들어 재상이 되었고,
선주는 의심 없이 맡기고 무후(武侯 공명)는 두려움 없이 받았으며,
후주도 두 마음 없이 받들고, 백성도 다른 말 없이 믿었으니,
군신 사이가 참으로 읊조릴 만하구나.”
공명의 치세 아래 임금과 신하가 서로 공경하고 위아래가 화목했으며, 관리는 청렴하고 백성은 기쁘게 복종했다.
제갈량을 충의(忠義)의 관점에서 제일 처음 평가한 것은 촉한의 군신(君臣)들이었다.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뒤 유선(劉禪)은 조서에서 “촉한에 특별한 공을 세웠으니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의 거대한 공훈에 비견된다”고 표창했다. 습륭(習隆) 등 대신들은 사당 건립을 청하는 상소에서 “제갈량의 덕과 모범은 멀리까지 퍼졌고 공훈은 당대를 덮습니다. 왕실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실로 이 사람 덕분입니다”라고 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진 무제 사마염(司馬炎)은 만약 제갈량 같은 보좌를 얻을 수 있다면 “오늘처럼 피로하지” 않았을 거라며 찬탄했다.
또 진(晉) 이궤(李軌)의 《진태시기거주(晉泰始起居註)》에는 사마염이 “제갈량이 촉(蜀)에 있을 때 그 심력(心力)을 다했고, 그 아들 제갈첨(諸葛瞻)은 난을 당해 의롭게 죽었으니, 그 선(善)함이 한결같았다”라고 찬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사마염이 말하는 ‘선(善)’은 바로 ‘충(忠)’이며, 이는 군주에게 충성한다는 의미의 충이다.
진(晉)의 장보(張輔)는 제갈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문(文)으로써 안을 편안케 하고, 무(武)로써 적의 공세를 꺾었으며, 그런 후에 그 은택을 중국의 백성에게 베풀었다. 그가 군대를 행군시킬 때에는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고 털끝만큼도 침범함이 없었으나, 공적과 업적이 거의 이루어질 즈음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글을 살펴보면 도모한 계책이 넓고 멀며 고상한 법도가 광활했다. 자신에게 공이 있으면 부하에게 양보했고, 부하에게 결점이 있으면 몸소 스스로를 꾸짖었으며, 선(善)을 보면 옮겨갔고, 간언을 들으면 고쳤으니 명성이 원근에 진동했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백이(伯夷)의 풍모를 들으면 탐욕스러운 자도 청렴해진다’라고 했으니 내가 보건대 공명의 충절을 본다면 간신도 절개를 세울 것이니, 거의 이윤(伊尹)이나 여상(呂尙 강태공)과 다툴 만하며 어찌 악의(樂毅) 따위와 무리가 되겠는가!”
동진(東晉)의 습착치(習鑿齒, ?—384년)는 제갈량(諸葛亮)을 진한(秦漢) 이래 최고의 신하로 보았으며, 제갈량이 인덕(仁德)의 마음으로 국정을 돌본 것을 찬양하여 “법은 불가피한 경우에만 사용했고, 형벌은 스스로 저지른 죄에 합당하게 가해졌다…. 제갈량은 정말로 법과 형벌을 잘 사용했다고 할 수 있으니, 진한(秦漢) 이래로 이런 사람은 없었다”라고 했다.
습착치는 또한 공명에 대해 “한을 바로 세우려는 소망(匡漢之望)이 있었고, 근본을 숭상하는 마음이 있었다”라고 칭송했는데, 이는 유선이 제갈량을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의 거대한 공훈에 비견된다”라고 평가한 것이나 ‘충무후(忠武侯)’라는 시호를 내린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 제갈량의 충의(忠義)를 말한 것이다.
당조(唐朝)의 무소의(武少儀)는 《제갈승상묘(諸葛丞相廟)》라는 시에서 제갈량이 “충절을 잘 지켰다[善持忠節]”고 했고, 당인(唐人) 호증(胡曾)은 《영사시(詠史詩) 노수(瀘水))》에서 제갈량은 “웅대한 계책으로 삼고초려에 보답할 것을 맹세했다”라고 찬양했는데, 이 모두가 제갈공명의 충의에 주목한 것이다.
당조(唐朝) 재상 배도(裴度, 756년—839년)는 과거 현철(賢哲)들을 살펴보니, “혹 군주를 섬기는 절개는 가졌으나 나라를 세울 재주가 없거나, 혹 자신을 세우는 도(道)는 얻었으나 사람을 다스리는 술(術)이 없었다. 이 네 가지를 갖춰 겸해서 실천한 이는 바로 촉(蜀) 승상 제갈공명 그 사람이다”라고 했다.
이 평가는 고금(古今)을 통틀어 제갈공명은 얻기 힘든 전재(全才 여러 가지 재능을 다 갖췄다는 의미)로서, 충의가 명백히 드러날 뿐만 아니라 나라를 세울 재능과 자신을 세우는 도리, 그리고 사람을 다스리는 술책을 모두 가졌다는 뜻이다.
제갈량 자신도 충(忠)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여, 《병요(兵要)》에서 “사람에게 충이란 물고기에게 연못이 있는 것과 같다. 물고기가 물을 잃으면 죽는 것처럼 사람이 충을 잃으면 흉(凶)하다”라고 하였다.
제갈량은 평생 “한실(漢室)을 부흥시켜 옛 도읍으로 돌아가겠다”라는 일념으로 심혈을 기울였다. 후주(後主)를 보좌한 12년 동안 큰 군사 행동만 여덟 차례나 되었으며, 매번 자신보다 몇 배, 심지어 열 배나 강한 적을 상대해야 했다. 육유(陸游)는 《서분(書憤)》이라는 시에서 “출사표 한 편은 참으로 세상에 이름 높으니, 천년 세월에 누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리오”라며 제갈량을 찬양했다. 이는 제갈량이 온 세상을 아우르는 재능을 지녀 수천 년 동안 비교할 이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는 평범한 후주를 보좌하며 충의를 중히 여겨 나라를 다스리고 군대를 이끌었으며, 여섯 번 기산(祁山)에 나아가 전력을 다하다 피폐해져 결국 군중에서 과로로 사망했다.
제갈량은 군주에게 충의를 다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에게도 똑같이 충의로 대했다. 고대에 나라를 세움에는 농업이 근본이었으므로 전쟁 중에도 농사일을 폐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하여 제갈량은 병사를 교대하는 제도를 실시했다.
건흥 9년(서기 231년) 2월, 제갈량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기산을 북공(北攻)할 때 사마의(司馬懿)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맞서 싸웠다. 이때 마침 촉군이 교대해야 할 시기여서 제갈량에게는 8만 명뿐이었다. 부하들은 교대를 잠시 중단하여 군세를 장엄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갈량은 “내가 군대를 통솔함에는 커다란 믿음(大信)을 근본으로 삼는다. 얻는 것이 있더라도 신의를 잃는 것은 옛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긴 바이다. 떠날 자들은 짐을 꾸려 기한을 기다리고 있고, 처자식들은 목을 길게 빼고 날짜를 세고 있으니, 비록 정벌의 어려움에 직면했더라도 도의상 그만둘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병사들이 크게 감동하여, 떠나야 할 자들은 남기를 청하고 복무해야 할 자들은 용맹하게 싸웠다. 이 전투에서 위나라 대장 장합(張郃)을 활로 쏘아 죽이고 사마의를 물리쳤다.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자는 주장에서도 제갈량의 충의가 체현되었다. 건안 24년(서기 219년) 동오(東吳)가 형주를 빼앗고 관우를 죽였다. 유비(劉備)는 촉한 장무 2년(서기 222년)에 이릉(彝陵) 대전을 일으켰고 오·촉 연합은 와해되었다. 손권은 도위(都尉) 조자(趙咨)를 위나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며 위 문제에게 “폐하께 몸을 굽히겠다”라고 표시했다.
제갈량은 유비로부터 후사를 부탁받은 후 계속해서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전략을 실행했다. 건흥 원년에 사신을 오나라에 보내 오나라가 위나라와 절교하도록 권유하여 예상했던 목적을 달성했다. 이후 여러 차례 비의(費禕), 진진(陳震), 장예(張裔), 등지(鄧芝) 등 중요 인물들을 오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니, “매년 사신이 오가며 우호가 이어져” 남정(南征)과 북벌에 있어 뒤를 돌아볼 근심이 없게 하였다.
제갈량은 또한 충의로 남중(南中)의 소란을 평정했다. 한족과 이족(夷族)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오래전부터 지속되었는데, 제갈량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덕으로써 사람을 복종시켰다. 맹획(孟獲)을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놓아주니, 남방 소수 민족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여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남중을 평정한 후 제갈량은 병사를 주둔시키지 않고 관리도 파견하지 않아 이민족이 이민족을 다스리게 하니, 이민족과 한족이 대략 평안해졌다. 이렇게 제갈량의 충의가 남중의 땅에 행해지니, 그곳 주민들은 사당을 세워 제갈공명을 제사 지냈으며 향불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제갈량이 서거한 후 ‘충무후(忠武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주팽수(朱彭壽)는 《구전비정·권삼(舊典備征.卷三)》에서 “충무(忠武)를 시호(諡號)로 삼는 것은 ‘이름을 바꾸는 전례’(易名之典) 중 하나다. 세상 사람들은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중하게 여기나, 이는 대부분 문신(文臣)들이 받는 것이다. 문무(文武) 모든 신하에게 통용되는 시호 중에서는 마땅히 충무를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삼는다. 촉한의 승상 무향후(武鄉侯) 제갈량 같은 이가 바로 그러하다.”
시호 제도의 기원은 주나라 중기에 주공 단(周公旦)과 태공망(太公望)을 위해 시호를 만든 것으로, 고인이 생전에 행한 행적과 공로를 사실대로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시호가 ‘충(忠)’이며 ‘무(武)’인 것은 제갈량의 일생에 대한 지극히 높은 정평(定評)이다.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16/6/4/n7964888.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