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악(仰岳)
【정견망】

원대 조맹부(趙孟頫)가 그린 제갈량상(부분), 견본 채색,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공유 영역)
승상의 사당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금관성 밖 잣나무 숲 우거진 곳이네.
층계에 비친 풀빛은 절로 봄빛인데,
잎 사이 꾀꼬리는 부질없이 고운 노래 부르네.
삼고초려의 번거로움은 천하를 도모함이요,
두 조정을 보좌한 마음은 늙은 신하의 충정이라네.
출사하여 이기기도 전에 몸이 먼저 죽으니,
길이 후세 영웅들의 소매를 눈물로 적시게 하네.
——두보 《촉상(蜀相)》
당대 시인 두보의 이 명시는 제갈량의 일생인 국궁진췌(鞠躬盡瘁) 사이후이(死而後已) 사적을 담담히 읊어주고 있다. 1700여 년 동안 역대 제왕과 장상, 재자(才子)들은 끊임없이 제갈량을 찬송하며 그를 지혜의 화신이자 충신의 전형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대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해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는 제갈량의 마지막 전투인 오장원(五丈原) 전투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당시 위나라와 촉나라 두 군대는 100여 일간 대치하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지자 제갈량은 과로로 병이 들어 쓰러졌고 병세는 나날이 악화되었다.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좌우 시위의 부축을 받으며 군영을 순시했고, 병거(兵車)에 앉아 전방 장졸들에게 마지막 위로를 건넸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촉나라 백만 군민의 희망을 한 몸에 짊어진 승상이 곧 세상을 떠날 것임을 알았다. 선제 유비가 붕어한 후 제갈량은 홀로 한실 부흥이라는 중책을 맡아 모든 일을 직접 챙겼다.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번잡하니 여러 차례 과로로 쓰러졌고 그가 감당해야 할 짐은 너무나 컸다.
제갈량은 바람에 휘날리는 대기를 바라보며 극복중원(克復中原) 네 글자를 응시했다. 마음속에는 무한한 수심이 가득했다. 가을바람은 뼛속까지 시린 한기를 몰고 왔고, 제갈량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다시는 진영에 임해 적을 토벌할 수 없겠구나! 아득한 창천(蒼天)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 마지막 탄식은 오장원의 가을바람, 황혼과 하나가 되었고 천지도 이를 보며 슬퍼했다. 장성(將星)이 지고 제갈량은 그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왔다.
제갈량이 사후 안배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정사 《삼국지 제갈량전》에는 “제갈량은 한중 정군산(定軍山)에 장사 지내되 산에 의지해 무덤을 만들고, 묘혈은 겨우 관이 들어갈 정도로만 하며, 입을 때는 평소의 옷으로 하고 기물은 쓰지 말라”고 유언했다. 즉, 군사 요충지인 정군산에 묻되 산을 무덤 삼아 관만 들어갈 크기로 소박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인들은 정군산에 있는 무후묘(武侯墓)는 단지 의관총(衣冠塚)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제갈량의 육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길이 없어 실제 매장지를 두고 여러 설이 전해진다. 그중 대표적인 두 가지 전설은 다음과 같다.
전설 1
《양주기(梁州記)》에 따르면 당시 전방의 상황이 위급했고 위나라의 사마의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대장의 사망 소식이 새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네 명의 군사에게 정군산에서 관을 메고 남쪽으로 가다가 밧줄이 끊어지고 막대기가 부러지는 곳에 묻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 네 사람은 편법을 쓰려고 하루 동안 걷다가 밧줄이 닳아 끊어졌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유선(劉禪)은 이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하여 문초한 끝에 죄를 자백받았고, 크게 노해 네 사람을 처형했다. 이로 인해 제갈량의 진짜 묘소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전설 2
제갈량이 죽지 않고 그저 ‘죽음’을 위장하여 은거했다는 설이다. 도가(道家)의 시해(屍解)법을 이용해 물건을 자신으로 화하게 하고, 진신(眞身)은 산림으로 들어가 계속 수도했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두 동자를 제자로 삼았는데, 그들이 제갈량의 저서인 《마전과(馬前課)》를 세상에 널리 퍼뜨렸다고 한다.
《마전과》는 예언 성격의 기서(奇書)로 총 14과(課)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과는 4언시로 되어 있다. 시간 순서에 따라 삼국시대 이후의 역사적 대사건을 정확히 예언하고 있으며, 마지막 세 과는 오늘날 중공의 숙명과 성인이 세상을 구하는 사건을 예언하고 있다.
제1과는 다음과 같다.
무력회천 국궁진췌 (無力回天 鞠躬盡瘁)
음거양불 팔천여귀 (陰居陽拂 八千女鬼)
이 과는 바로 제갈량 자신에 대한 예언이다. 그는 일찌감치 일체 노력이 모두 “회천할 힘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국궁진췌하며 촉한을 보좌했다. 조정에 환관이 득세하고 국사(國事)가 어지러운 상황은 음거양불이라 할 수 있다.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후 조위의 종회(鍾會)가 남정하여 파죽지세로 성도(成都)에 입성했고 후주 유선이 항복하며 촉한은 종결되었다. 팔천여귀(八千女鬼)를 합치면 바로 ‘위(魏)’ 자가 된다.
유비는 백제성에서 임종을 맞이하며 제갈량에게 모든 희망과 진실한 신뢰를 보냈다.
“승상께서는 이 조서를 태자 유선에게 전해주시고, 결코 가벼운 말로 여기지 않게 해주시오. 모든 일은 승상의 가르침을 바라겠소!”
이후 유비는 한 손으로 눈물을 닦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갈량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그대의 재능은 조비보다 열 배나 뛰어나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큰일을 이룰 것이오. 만약 후계자가 보좌할 만하다면 보좌해주시고, 만약 그가 재능이 없다면 그대가 스스로 성도의 주인이 되시오.”
유비는 심지어 제위(帝位)까지도 제갈량에게 내어줄 용의가 있었던 것이다.
제갈량은 감히 이 큰 제안을 수락하지 못하고, 오직 지혜와 충성을 다해 유비의 삼고초려와 탁고(託孤)의 의리에 보답했다. 결과가 어떠할지 미리 알았음에도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려 노력했기에 천추의 대의(大義)를 이룰 수 있었다.
정군산에 있는 제갈량의 의관총에는 그의 유언을 기리는 주련이 걸려 있다.
고국에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원 회복의 뜻 이루지 못했으나,
충혼(忠魂)은 여전히 남아 있어 지나는 이마다 다투어 한(漢) 승상 무덤 우러러보네.
故國不歸,山河未遂中原志;
忠魂猶在,道路爭瞻漢相墳。
살아서는 유씨를 일으켜 한실(漢室)을 받들었고, 죽어서도 오히려 촉(蜀)을 수호하고자 정군산(定軍山)에 묻혔다.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18/1/2/n10015923.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