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약미
【정견망】
서예가 안진경(顏眞卿)에 대해서는 서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그는 서예 역사에서 왕희지(王羲之)와 비견될 만한 서예의 거인이며, 서예 입문자들은 기본적으로 그의 법첩(法帖)을 임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청대 유희재(劉熙載)가 저술한 《서개(書概)》에서는 “글씨는 그 사람과 같으니, 그 재능과 같고, 그 학문과 같고, 그 뜻과 같으며, 요컨대 그 사람 자체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오늘 우리는 안진경의 서예 속에 담긴 인격 내함과 사상 경지를 함께 탐구해 보자.
안진경은 자가 청신(淸臣)이며 경조(京兆) 만년(萬年 지금의 섬서성 서안) 사람으로 본적은 낭야 임기(臨沂)다. 서기 709년에 태어난 그는 명문가 출신으로, 선조는 공자가 깊이 찬탄했던 제자 안회(顔回)이며, 5대조는 《안씨가훈(顔氏家訓)》을 후세에 남긴 황문시랑 안지추(顔之推)이고, 증조부는 유명한 유학자이자 경학자인 안사고(顔師古)이며, 어머니 은(殷)씨 역시 명문가 출신이다.
안진경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온 가족 열 명 남짓이 친지의 도움으로 살았다. 가세는 기울었으나 안씨 가문은 예법과 효도로 가풍을 이었다. 어릴 적 안진경은 황토에 물을 섞어 진흙을 만들어 벽에 바른 뒤, 황토가 약간 마르면 짧은 나무 막대기로 벽면에 글씨를 썼다. 행인이 놀라며 “어찌하여 필묵으로 글씨 연습을 하지 않느냐?”라고 묻자 그는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어지럽혀 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안지추는 불교와 도교를 숭상했고, 증조부 안사고 역시 불교를 받드는 거사였기에 안진경은 어릴 때부터 사찰에 보내져 공부했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도 그는 자주 사찰에 머물렀기에 불교와 도교의 교리에 모두 조예가 깊었다. 전해지는 그의 비각 중 《마고선단기(麻姑仙壇記)》는 선녀의 전설을 기록했고, 《이현정비(李玄靖碑)》는 도사 이함광(李含光)의 생애를 기록했으며, 불교와 관련된 것으로는 《다보탑비(多寶塔碑)》, 《팔관재회보덕기(八關齋會報德記)》, 《문수첩(文殊帖)》 등이 있다.
열여덟 아홉 살 무렵, 안진경은 큰 병을 앓아 백여 일 동안 침상에 누워 있었으나 의원도 고치지 못했다. 마침 “북산군(北山君)”이라 자칭하는 한 도사가 그의 집을 지나다 쌀알 크기의 알약을 내어 치료해주니 안진경은 복용 후 즉시 완쾌되었다.
도사가 그에게 말했다.
“그대의 청렴하고 소박한 명성은 이미 금대(金臺)의 선책(仙冊)에 기록되어 장래에 열선(列仙)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니, 명리나 벼슬길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만약 속세를 벗어나기 어렵다면 반드시 절개를 지켜 군주를 보좌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몸을 닦아야 한다. 세상을 떠날 때는 그대의 형해(形骸)를 이용해 혼을 되돌려 수도한 후 도를 얻어 신선이 되어라. 백 년 후 내가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사이에서 그대를 기다리겠다.”
말을 마친 도사는 다시 선단(仙丹) 한 알을 주고 홀연히 떠났다. 이때부터 안진경은 도가와 깊은 인연을 맺어 항상 신선이 되는 법을 배우는 데 마음을 두었으며, 도사 및 장지화(張志和), 육우(陸羽) 등 고사(高士)들과 매우 긴밀하게 교유했다.
당 현종 천보(天寶) 연간에 범(范) 씨 성을 가진 한 비구니가 있었는데, 사람의 길흉을 잘 점쳤으며 안진경의 처가와는 친척 관계였기에 안진경은 그녀를 범사이(范師姨)라 불렀다. 과거를 치르기 전 안진경의 앞날을 점쳐주었는데, 범사이는 “이번에 가면 반드시 뜻한 바를 이루고 관직에 올라 자식에게 음덕을 입힐 것이다”라고 했다.
안진경이 “제가 5품 관직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범사이는 자리에 있던 보라색 비단 수건을 가리키며 “장래 그대의 관복이 이 색깔일 것이다”라고 했다. 당나라 관제에 따르면 보라색 관복은 2품 이상의 조정 관리였다.
당시 범사이는 또한 “나이가 칠십을 넘기면 그 이후의 일은 굳이 묻지 말라”고도 했다. 안진경이 계속 묻자 그녀는 “그대는 총명이 남다르니 일을 묻되 끝까지 캐묻지 말라”고 하였다.
개원 22년(734년) 2월, 26세의 안진경은 진사 갑과(甲科)에 급제했다. 비서성(秘書省)에서 2년간 근무한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낙양으로 가서 3년간 복상했다. 이후 안진경은 조산랑(朝散郎), 비서성 저작국 교서랑(校書郎)을 역임했다. 746년에는 장안현(長安縣) 현위로 승진하고 산관으로 통직랑(通直郎)이 더해졌다. 747년에는 장안현 현위에서 어사대로 옮겨 감찰어사가 되었다. 안진경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가 무위(武威), 서평(西平) 일대를 순찰할 때, 오랜 가뭄으로 비가 오지 않던 오원군(五原郡)에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안진경은 이를 알자마자 즉시 조사에 착수하여 신속히 판결을 내렸고, 억울한 자는 마침내 누명을 벗게 되었다. 사건이 종결되자마자 갑자기 단비가 쏟아졌고, 현지인들은 이를 “어사우(御史雨)”라 칭송하며 안진경이 원한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749년 안진경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승진했으나, 강직한 성품 탓에 재상 양국충(楊國忠)의 배척을 받아 여러 곳을 전전하다 결국 평원군(平原郡) 태수로 좌천되어 753년 여름에 부임했다. 평원군(오늘날 산동에 속함)은 안록산의 관할 구역이었는데, 당시 안록산은 이미 반역의 뜻을 품고 있었다. 이를 미리 알아챈 안진경은 오랜 장마로 성벽이 파손되었다는 핑계를 대어 성벽을 높이고 해자를 쳤으며, 동시에 몰래 군사와 말을 모집하고 식량을 비축했다. 안록산이 밀정을 보내 안진경을 감시하게 하자, 안진경은 매일 일부러 문인들과 배를 타고 유람하거나 잔치를 벌여 시를 지으며 시사에 관심 없는 척 위장했다. 후에 안록산은 안심하고 일개 서생은 걱정할 것 없다고 여겼다.
755년 안사의 난이 발발하자 하삭(河朔 황하 이북) 지역의 군현들이 잇따라 함락되었다. 평원군은 사전에 준비한 덕분에 방어가 엄밀했다. 안진경은 또 각지의 의병들과 연락해 저항했고 17개 군이 호응하여 안진경을 맹주로 추대하니, 안진경은 20만 군사를 얻어 연조(燕趙 전국 시대 연나라와 조나라 지역) 땅을 종횡무진했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안진경을 호부시랑(戶部侍郎)으로 봉했다.
안진경은 청하군(淸河郡)의 이악(李萼)과 함께 모의하여 당읍(堂邑)에서 안록산의 군사 2만여 명을 격파했다. 당 현종은 기뻐하며 “황하 이북 24개 군에 쓸만한 인물은 오직 안진경 하나뿐이구나! 내가 직접 그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이 참으로 한스럽다”라고 말했다. 당 숙종이 영무(靈武)에 있을 때 그를 공부상서 어사대부로 봉했고, 후에 어사대부를 가봉했다. 당 대종이 즉위한 후 그는 먼저 이주자사(利州刺史)가 되었다가 후에 우승상이 되어 노군공(魯郡公)에 봉해졌다. 범사이의 예언대로 안진경은 정말로 보라색 옷을 입는 조정 관리가 되었다.
대종 대력(大曆) 3년(768년), 안진경은 재상 원재(元載)의 모함으로 시정을 비방했다는 누명을 쓰고 무주자사(撫州刺史)로 좌천되었다. 무주는 도교가 매우 번성한 곳이었으며 당대 여선(女仙) 신앙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공무 외에 안진경은 자주 인근의 선산(仙山)을 유람했고, 이 시기에 도교 신앙과 관련된 비명 작품들을 남겨 서예사의 명작이 되었다.
대력 6년(771년) 그는 무주 남성현 서남쪽의 마고산(麻姑山)을 유람하며 《무주남성현마고선단기(撫州南城縣麻姑仙壇記)》를 짓고 써서 마고선단 곁에 세우며 선연(仙緣)을 맺었다. 이 비석은 총 887자로 해서체이며, 대소 글씨 두 본이 있는데 장엄하고 웅장하면서도 빼어나 예스러우면서도 고결하다. 짜임새가 긴밀하고 시원하여 안체(顔體)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구양수(歐陽修)는 “이 기는 굳세고 뛰어나며 짜임새가 긴밀하여 특히 정한(精悍)하다. 필획의 굵고 가늠에 모두 법도가 있어 볼수록 훌륭하니, 노공(魯公 안진경)이 아니면 쓸 수 없음을 알겠다”라고 평찬했다.(《집고록(集古錄)》)
글씨는 곧 그 사람이고 사람은 곧 그 글씨와 같으니, 안진경은 강직하고 굽히지 않는 품격을 서예 속에 녹여냈다. 그의 글씨는 한 자 한 자 엄격하고 정중하며 짐짓 꾸민 기색이 없다. 호방하고 소탈하면서도 법도를 넘지 않아 “삼엄한” 법도를 아름다움으로 삼았다. 당 태종이 왕희지의 서예를 지극히 추앙했기 때문에 초당과 성당의 서풍은 청수(淸秀)하고 완미(婉媚)하며 소탈하고 준일(俊逸)한 것을 기조로 삼았다. 그는 초당의 야위고 단단한 서풍을 바꾸어, 늠름한 정기로 수미(秀眉)를 웅혼(雄渾)함으로 변화시켜 해서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그 서예적 특징은 근육이 풍만하고 선이 윤택하면서도 탄력이 있으며, 구조가 넓고 기세가 웅대하여 강직하고 탄탄한 장수의 풍모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안진경은 평생 수많은 비석을 썼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으로는 근력이 풍부한 《안씨가묘비》, 구조가 단정하고 치밀하며 수려한 《다보탑비》, 풍격이 맑고 멀며 웅혼한 《동방삭화찬비(東方朔畫贊碑)》, 두텁고 장엄하며 구조가 정한하고 운치가 넘치는 《마고선단기》, 방정하고 평온하며 근골을 드러내지 않는 《대당중흥송(大唐中興頌)》 등이 있다.
소동파 안진경의 서예가 고전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지극히 중요한 인물인데, 그는 “시는 두보에 이르러, 문장은 한유에 이르러, 그림은 오도자에 이르러, 글씨는 안노공(顏魯公)에 이르러 고금의 변화와 천하의 능사를 다했다”라고 말했다.
북송의 서예 이론가 주장문(朱長文)은 그의 글씨를 “점은 떨어지는 돌 같고, 획은 여름 구름 같으며, 갈고리는 굽은 금 같고, 파임은 발사된 노(弩)와 같다. 가로세로에 형상이 있고 높고 낮음에 뜻이 있으니, 왕희지와 왕헌지 이래로 공과 같은 이가 없었다”라고 찬양했다.
782년 절도사 이희열(李希烈)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칭하자, 재상 노기(盧杞)는 안진경의 강직함을 시기하여 안진경의 덕망이 높고 사방이 우러러보니 그를 보내 이희열을 설득하게 하면 무기를 쓰지 않고도 반란을 평정할 수 있다고 상소했다. 당 덕종은 노기의 말을 믿고 안진경을 선위사(宣慰使)로 임명해 적진으로 보냈다. 이희열이 천성이 잔인하다는 소문이 있어 조정의 많은 대신이 안진경의 안전을 걱정했다.
대신 정숙(鄭叔)이 “가시면 예측할 수 없는 화가 있을까 두려우니 저희가 다시 황상께 청해 보겠습니다”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안진경은 강개하게 “임금의 명령인데 어찌 피하겠는가!”라고 답했다. 대신 이면(李勉)이 당 덕종에게 안진경을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사람을 보내 뒤쫓게 했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안진경은 이번 걸음이 험난할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도사 운도팔(雲陶八)을 만났는데, 70세에 액난이 닥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제 안진경의 나이 75세였으니, 그는 예전 범사이가 “나이 칠십을 넘기면 그 이후는 다시 캐묻지 말라”고 한 말을 떠올리며 “범사이의 말대로 내 목숨이 도적의 손에 달렸구나”라며 탄식했다.
《유설(類說)》 권12 <안노공시해(顔魯公屍解)>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당시 조정 안팎에서 안진경이 이번에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느끼고 장락파(長樂坡)에서 그를 위해 전송잔치를 열었다. 술에 취한 안진경은 몸놀림이 이상하리만큼 민첩하여 젊은이처럼 한 번에 난간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이희열의 위협과 유혹 앞에서도 안진경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절개를 지키며 죽음을 초연하게 맞이했다. 덕종 흥원(興元) 원년(785년) 8월 3일, 안진경은 용흥사 잣나무 아래에서 교수형을 당하니 향년 77세였다. 나중에 회서(淮西)의 반란이 평정된 후 안진경의 영구는 경사(京師)로 돌아와 경조 만년현 안씨 묘역에 안장되었다. 덕종은 조서에서 “기질과 천품이 뛰어났고 공명하거 충성스러움이 뛰어나, 네 임금을 거치며 뜻이 한결같이 견정했다”고 했다. 이에 5일간 조회를 폐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개천전신기(開天傳信記)》의 기록에 따르면 안진경의 가족들이 묘를 이장할 때 관을 열어보니 관은 썩었으나 그의 육신은 예전 그대로였다. 근육은 살아있는 사람 같고 손발은 매우 부드러웠으며 수염과 머리카락은 검고 주먹을 꽉 쥐고 있는데 손톱이 손등을 뚫고 나와 있었다. 근처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길을 가는 도중 관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중에 안장할 곳에 이르러 열어보니 빈 관일 뿐이었다.
안진경은 중국 서예사에서 의심할 여지 없는 일대 종사(宗師)다. 넓고 웅혼하며 중정한 것은 안진경 해서의 주요 특징으로, 그 사람과 같으면서도 중용과 법도를 넘지 않는 문화적 내함을 체현한다. 그의 서예는 순정한 신념, 굽히지 않는 강직함, 외물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 생사를 꿰뚫어 본 사상 경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안진경은 단지 서예가일 뿐만 아니라 수도하여 득도한 사람이기도 했다. 후인이 그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어찌 그의 서예에 담긴 깊은 뜻을 온전히 맛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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