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마전과 시해
명오(明奧) 정리
【정견망】
(상편에서 연결)
마전과 시해(試解)
원래 저자: 촉한 제갈승상
원래 해석자: 백학산 승려 수원
지금 해석자: 필자
수원이 쓴 안어(按語):
공명의 마전과는 군중의 한가한 때에 지은 것이라. 이는 후인들에게 길흉을 피해 나아갈 방도를 보이기 위함이다. 이 14과는 마전과 중에서도 특별히 가려 뽑은 것으로, 매 과는 한 조(朝)를 가리킨다. 그 흥망성쇠와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말 밖에서 얻을 수 있다. 14과에서 그친 것은 두 번 반복되는 주기를 의미함이라. 미제(未濟) 괘로 끝맺음은 이 이후에 또 하나의 원(元)이 시작됨을 보이기 위함이다. 천도는 순환하니 밝은 자는 스스로 밝고 어두운 자는 스스로 어두울 것이라. 어찌 가만히 앉아서 이르겠는가.
86세 노승 백학산 수원(守元)이 쓰다.
수원은 제9과까지 풀이하고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다.
“노승은 가경 10년에 태어나 올해 86세이니, 이 이후는 감히 망령되이 논하지 않겠다.”
《마전과》는 매우 간결하고 명료하여 단 14과뿐이며, 매 과가 하나의 역사 시대를 예언하고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각 역사 시대가 지나간 후 사람들이 돌아보면 제갈량의 예언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함을 발견하게 된다.
제1과 ○●●●●○ 중하(中下)
무력회천(無力回天) 국궁진췌(鞠躬盡瘁)
음거양불(陰居陽拂) 팔천여귀(八千女鬼)
증왈(證曰): 양음음음음양, 괘로는 이(頤)가 된다.
해왈(解曰): 제갈량 사후 후주(後主 유선)가 위(魏)에 항복한다.
“무력회천(無力回天) 국궁진췌(鞠躬盡瘁)”는 제갈량 자신을 말한다. 제갈량은 이미 한조(漢朝)의 기수(氣數)가 다했음을 알고 있었고 모든 노력을 해도 ‘회천하기엔 힘이 부족함’을 알았지만, 유비의 삼고초려와 탁고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촉한을 보좌하는 데 진력했다. 제갈량은 227, 228, 229, 231, 234년에 총 다섯 차례 조위(曹魏)를 북벌하여 중원을 회복하고 대한(大漢) 강산을 다시 일으키려 했다. 결국 다섯 번째 북벌 때 제갈량은 위수 남안의 오장원에서 병사했으니, 그가 《출사표》에 썼던 대로 한실 부흥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고 죽은 후에야 그친다”는 말을 실천한 것이다.
“음거양불”이란 소인이 득세하고 정인군자가 저지당함을 말한다. ‘거(居)’는 ‘거(據)’와 통해 유력하게 점거함을 뜻하고, ‘불(拂)’은 거스르거나 저지당함을 뜻한다. 제갈량이 서거한 후 소인인 환관 황호(黃皓)가 후주 유선 곁에서 대권을 장악하니 국사가 어지러워지고 소인이 득세했다. 제갈량이 선정한 후계자 대장 강유도 겨우 잔국(殘局)을 유지할 뿐 부흥시킬 수 없었으며, 심지어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먼 검각으로 가서 화를 피해야 했다. 그야말로 ‘음거양불’이라 할 수 있다.
서기 263년, 조위의 대장 종회(鍾會)가 대거 남침하자 강유는 검문관(지금의 사천 검각 북쪽)을 지켰고 전세는 고착되었다. 그러나 조위의 또 다른 대장 등애(鄧艾)가 음평군에서 험한 산을 깊숙이 타고 들어와 촉한의 요충지 강유(江油)를 직접 공략해 성도(成都) 평원으로 진입했다. 후주 유선은 적군이 성도에서 멀지 않다는 말을 듣고 저항할 생각은커녕, 강유의 대군이 여전히 전방에 온전하게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서둘러 조위에 항복하니 촉한은 이로써 위나라에 멸망했다. 보라, ‘팔천여귀(八千女鬼)’를 합치면 바로 ‘위(魏)’ 자가 된다. 강태공의 예언에서도 위나라를 말할 때 ‘위귀(委鬼)’라는 두 자를 썼는데 역시 파자다.
제2과 ○●○○●○ 중하(中下)
화상유화(火上有火) 광촉중토(光燭中土)
칭명부정(稱名不正) 강동유호(江東有虎)
증왈: 양음양양음양, 괘로는 리(離)라.
해왈: 사마염이 위나라를 찬탈함이라. 동진 원제(元帝)가 건강에 도읍하니 건강은 강동에 속함이라.
“화상유화(불 위에 불)”는 ‘염(炎)’ 자이니 진무제(晉武帝) 사마염(司馬炎)을 가리킨다. “광촉중토”에서 ‘촉(燭)’은 비춘다는 뜻이다. 즉 ‘염’ 자를 가진 사람이 중국을 비춘다는 것이다. 이 과는 진나라를 예언한 것으로, 사마씨 가문이 조위에서 대권을 장악하여 재상 사마소(司馬昭)는 이미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어 있었다. 서기 265년 재상 사마소가 서거하자 그의 아들 사마염은 즉시 조위의 마지막 황제 위 원제 조환(曹奐)에게 선양하게 하여 진나라를 세웠다. 서기 280년, 진나라 군대가 건업(현재의 강소 남경, 서진 말년에 건강으로 개칭)을 함락하고 동오의 마지막 황제 손호를 사로잡았다. 진이 천하를 통일했으니 가히 ‘광촉중토’라 할 수 있다.
“칭명부정”은 사마염의 진나라가 실질적으로 조위를 찬탈하여 세워진 것이고, 조위 또한 한조를 찬탈해 세워진 것이라 명분이 바르지 못함을 가리킨다.
“강동유호”는 동진의 건립을 가리킨다. 서기 291년 팔왕의 난이 시작되어 중원이 소수민족에게 점령당했다. 서기 317년 건강을 지키던 친왕 사마예(司馬睿)가 황제를 칭하고 건강에 도읍하니 역사에서는 이를 ‘동진’이라 한다. 건강(지금의 남경)은 강동 지역에 위치한다. ‘호(虎)’는 바로 사마예를 가리킨다. 강태공의 만년가 중에도 “강동에서 다시 황주(皇州 도읍)가 서리라”라는 구절이 있어 동진의 건립을 말하고 있다.
제3과 ○●●●●● 하하(下下)
요요중원(擾擾中原) 산하무주(山河無主)
이삼기위(二三其位) 양종마시(羊終馬始)
증왈: 양음음음음음, 괘로는 박(剝)이라.
해왈: 오대는 사마씨에서 시작하여 양씨에서 끝남이라.
“요요중원 산하무주”는 이 시기 중국이 큰 혼란 속에 처해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남북조 시대의 사회 상태와 정확히 부합한다. 이 과는 팔왕의 난, 오호십육국 및 남북조 시대를 예언한 것으로 298년(서기 291년~589년)의 시간을 아우른다.
서기 290년 사마염이 서거하고 적자 사마충(司馬衷)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혜제(惠帝)다. 혜제는 백치였던 듯하다. 대신들이 민간에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뜻밖에도 “어째서 고기를 먹지 않느냐?”라고 했으니 그 무지함을 알 수 있다. 혜제가 즉위한 이듬해 팔왕(八王)의 난이 폭발했다. 사마씨 가문의 여덟 친왕이 권력과 황위를 위해 서로 잔혹하게 죽였으니 중원은 이때부터 크게 어지러워졌다. 서기 291년 첫 번째 친왕 사마량이 살해된 것부터 서기 311년 여덟 번째 친왕 사마월이 죽기까지 21년이 걸렸으며, 진 왕조가 갓 세운 통일 국면은 끝이 났다.
서기 304년 팔왕의 난이 절정일 때 오호십육국 시대가 도래했다. 호(胡)는 옛날에 한족이 이민족, 특히 북방 소수민족을 총칭하는 말이었다. 오호는 당시 흉노, 선비, 갈, 저, 강족을 가리켰다. 이 시기 북부 중국에는 많은 정권이 세워져 중화를 어지럽혔다.
서기 439년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하고 남중국의 동진과 대치하면서 남북조 시대가 막을 올렸다.
남중국에서는 서기 420년 동진의 대장이 황제 사마덕문(司馬德文)을 폐출하고 유유(劉裕)가 황제가 되어 유송(劉宋)을 세웠다. 서기 479년 소도성(蕭道成)이 유송을 찬탈해 남제(南齊)를 세우고, 서기 502년 소연(蕭衍)이 남제를 찬탈해 남량(南梁)을, 서기 557년 남량의 대장 진패선(陳霸先)이 남량을 찬탈해 남진(南陳)을 세웠다.
북중국에서는 북위(北魏)가 서기 534년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나뉘었다. 서기 550년 동위는 고양(高洋)에게 찬탈된 후 북제(北齊)가 되었고, 서기 557년 서위는 우문각(宇文覺)에게 찬탈당해 북주(北周)가 되었다. 서기 577년 북제가 북주에 병합되었고, 서기 581년 북주는 국구(國舅) 양견(楊堅)에게 찬탈당해 수(隋)라고 칭했다. 서기 589년 수가 진(陳)을 멸망시키면서 남북조 시대는 끝났다.
“이삼기위(二三其位)”는 이들 제왕들이 자리에 있는 기간이 매우 짧았음을 가리킨다. 이 298년 동안 오호십육국이든 남북조든 각 왕조와 국가의 국운이 매우 짧아 길어야 수십 년, 짧으면 몇 년에 불과했다. 오직 북위만이 국운이 다소 길어 148년 동안 유지되었다.
“양종마시(羊終馬始 양이 끝내고 말이 시작)”는 천하의 큰 혼란이 진나라의 사‘마(馬)’ 가문에서 시작되어 양(‘양[羊]’은 양[楊]의 화음)씨가 세운 수나라에서 끝났음을 의미한다.
제4과 ●●○●○● 중상(中上)
십팔남아(十八男兒) 기어태원(起於太原)
동즉득해(動則得解) 일월여천(日月麗天)
증왈: 음음양음양음, 괘로는 해(解)라.
해왈: 당 태종이 태원에서 군사를 일으킴이라.
“십팔남아”는 십팔자(十八子)니 이를 더하면 ‘이(李)’가 되어 강태공의 예언과 비슷하다. “기어태원”은 수나라 말기 당(唐)이 태원에서 군사를 일으켰음을 말한다.
서기 604년 양광(楊廣)이 아비를 죽이고 즉위하니 발로 수 양제다. 양광은 잔인하고 부덕해서 서기 611년부터 천하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반란을 일으켜 왕을 자처한 이들이 18명이고 도적들이 도처에 들끓어 천하가 대란에 빠졌다. 서기 617년 태원 유수 이연(李淵)이 천하가 크게 어지럽고 수조(陏朝)의 국운이 다했음을 보고 천하를 평정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동즉득해”는 움직이면 위태로운 곤경을 풀 수 있다는 뜻이다. 이연은 수 양제와 사촌 형제 사이였기에 군사를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당시 ‘이(李)’ 씨가 ‘양(楊)’ 씨를 대신해 천하를 다스릴 것이라는 요언(謠言)이 돌아 양광은 그를 매우 꺼렸다. 태원은 병가에서 중시하는 군사 요지였으므로 이연이 당시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밀(李密), 두복위(杜伏威) 등 반왕들에게 소멸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군사를 일으키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연은 부득이 모험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사지에서 삶을 구했으니 결국 곤경에서 벗어나 ‘득해(得解)’ 한 것이다.
“일월여천”은 해와 달이 하늘을 비추어 크게 광명한 정경을 뜻하며, 이당(李唐)이 천하를 다스림에 도를 얻어 성세(盛世)를 창건했음을 말한다. 이연의 차남 이세민(李世民)은 일대 영웅으로 설인고(薛仁杲), 유무주(劉武周), 두건덕(竇建德), 왕세충(王世充) 등 반왕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대당(大唐)의 강산을 일구었다.
서기 626년 이연은 이세민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이세민은 즉위 후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위징(魏徵) 등 어진 신하들을 중용해 정치가 청렴하고 풍요로웠으며 농사는 매년 대풍을 이루었다. 서기 632년 전국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죄수가 총 390명이었는데, 연말에 이세민은 그들이 집에 가서 뒷수습을 하도록 허락하고 이듬해 가을에 다시 돌아와 형을 받게 했다. 서기 633년 9월, 390명 전원이 감옥으로 돌아왔으며 한 명도 도망치지 않았다. 사회 질서가 안정되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으니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고 이 시기를 ‘정관(貞觀)의 치’라고 부른다.
제5과 ○○○●●● 하중(下中)
오십년중(五十年中) 기수유팔(其數有八)
소인도장(小人道長) 생령도독(生靈荼毒)
증왈: 양양양음음음, 괘로는 비(否)라.
해왈: 후(後) 오대(五代) 여덟 성씨가 총 53년이라.
이 과는 당나라 이후 오대(五代)의 대란(大亂)을 예언한다. 서기 907년 당조 종친과 환관, 사대부들이 이극용(李克用)과 황소의 옛 부하 주온(朱溫 주전충)에게 살해당하고 애제(哀帝)만 남았다. 애제는 천우(天佑) 4년(서기 907년) 주온에게 ‘선위(禪位)’ 조서를 내리니 당실(唐室)이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주온은 국호를 양(梁)으로 고쳤고 오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주온의 찬탈부터 조광윤이 황포(黃袍)를 입고 송을 세울 때(서기 960년)까지 약 50년이 흘렀으니 제갈량이 말한 ‘오십년중’에 부합한다.
이 50년 동안 중원 지역에는 주온이 세운 후량(後梁 907~923), 이존욱(李存勖)이 세운 후당(後唐 923~936), 석경당(石敬瑭)이 세운 후진(後晉 936~946), 유지원(劉知遠)이 세운 후한(後漢 946~979, 950년 이후에는 태원 일대에 국한됨), 곽위(郭威)가 세운 후주(後周 951~960)의 다섯 단명 왕조가 있었기에 ‘오대’라 부른다.
‘오대’에는 총 여덟 성씨의 황제가 있었다. 후량은 주씨, 후당은 좀 복잡한데, 이존욱은 당 대장 이극용의 아들인데 이극용에게는 수양아들 이사원(李嗣源)이 있었다. 이존욱이 병변으로 죽고 일족이 도륙당하자 이사원이 황제가 되었다. 이사원 사후 아들 이종후(李從厚)가 계승했으나 곧 이사원의 의붓아들 이종가(李從珂)가 거병해 이종후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이처럼 이존욱, 이사원, 이종가는 모두 이씨지만 사실 혈연관계가 전혀 없으니 후당에는 사실상 세 가문의 서로 다른 이씨 황제가 있었던 셈이다.
후진은 석씨, 후한은 유씨, 후주는 곽위의 가족이 모두 살해당해 시영(柴榮)을 양자로 삼아 성을 곽으로 고치게 했으니 후주는 곽씨와 시씨 두 성씨로 구성되었다. 이것이 정확히 ‘기수유팔(그 수는 여덟이다)’이라는 예언에 응한 것이다.
오대는 모두 단명 왕조였고 다섯 왕조를 합쳐 53년에 불과했다. 많은 대신이 오늘은 이 황제에게 충성하고 내일은 저 황제에게 투항했으니, 과거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의는 더 이상 추앙받지 못했다. 예를 들어 후당의 대신 풍도(馮道)는 개국 원로라 할 수 있었으나 석경당이 후당을 멸하자 주저 없이 후진에 투항했다. 곧이어 거란 대군이 개봉으로 쳐들어와 후진 황제를 사로잡자 풍도는 다시 거란에 귀부했다. 유지원이 후한을 세우자 다시 후한에 귀부했고 이후 후주에도 귀부했으니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영광으로 알았다.
오대의 황제는 거의 다 혼군(昏君)이었기에 국운(國運)이 모두 길지 않았다. 특히 석경당은 황제가 되기 위해 거란(요나라)에 연운십육주를 떼어주고 거란 황제를 아버지라 부르며 스스로 아들이라 칭했으니 ‘아들 황제’라 불렸다. 후한의 황제 역시 거란에 의지하며 ‘조카 황제’를 칭했으니 예언 중 ‘소인도장(小人道長 소인의 도가 자란다)’이라는 말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오대의 대란으로 전란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 결과는 자연히 ‘생령도독(生靈荼毒 생령에 쓴 독)’이다. 백성들은 멈추지 않는 전쟁 속에서 고통이 극심했다.
제6과 ●○○●○○ 상중(上中)
유천생수(惟天生水) 순천응인(順天應人)
강중유외(剛中柔外) 토내생금(土乃生金)
증왈: 음양양음양양, 괘로는 태(兌)라.
해왈: 조송(趙宋)이 흥기해 천하를 교화하나 금나라 군대가 침입하니 강중유외의 형상이라.
“유천생수 순천응인”은 무슨 뜻인가? 하도와 낙서에서 오행 중 ‘수(水)’의 수는 ‘일(一)’이다. ‘유천생수’는 하늘이 직접 물을 냈다는 뜻이니 물이 새로 시작됨을 의미한다. 오행(五行)은 오덕(五德)에 대응하는데 ‘수’의 성질은 ‘인(仁)’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하늘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있고”, “물은 지극히 부드럽다”라고 했다. 이 예언은 송나라에 관한 것이다.
예언에 따르면 송나라는 ‘수’에 속한다. 강태공의 예언 중 조송에 대해 ‘수룡(水龍)’이라 한 것도 송 천자가 수의 성질을 가졌음을 뜻한다. 송조(宋朝)는 확실히 인정(仁政)을 베푼 왕조였으며 동시에 성질이 지나치게 부드러워 물의 특징을 체현했다. 송 태조 조광윤은 서기 960년 황포를 입고 오대를 끝내며 송을 건국했고 태종 조광의(趙光義)는 서기 979년 천하를 통일했다. 서기 961년 조광윤은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 술잔을 나누며 병권을 해제함)’으로 병변의 근원을 끊었다. 송 건국 이후 전대 왕조의 황제나 대신들을 대거 살육하지 않았고 평민들에게도 인정을 베풀어 휴양하고 기르게 했으며 부드러움으로 천하를 안정시켰다. 하늘이 낸 ‘수’인 송나라가 인정을 행하며 물의 성질에 부합했으니 이것이 바로 ‘순천응인(順天應人 하늘에 순종하고 사람에 순응)’이 아닌가?
그렇다면 “강중유외 토내생금”은 무엇을 뜻하는가? ‘수’는 송나라를 가리키며 오행설에 따르면 토극수(土克水) 하니, 토(土)에서 나온 금(金)이 송의 극성(克星)이 된다. 북송 말기에 이르러 황제가 어리석고 용렬해 백성에 대한 세금이 날로 무거워져 초기 태평성대의 모습은 사라졌다. 송 휘종은 자주 미복 차림으로 궁을 나가 기루에서 잠을 자고 궁 안에 시장을 열어 궁녀들에게 술과 차를 팔게 했으며 자신은 거지 분장을 하고 구걸하며 즐겼으니 마음속에 이미 대송 2백년의 가국(家國)과 금수강산은 없었다. 휘종 때 화석강(花石綱) 등을 크게 일으켜 민생이 피폐해지고 반항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소설 《수호전》에서 양산박 호걸들이 생진강(生辰綱)을 탈취해 하늘을 대신해 도(道)를 행한 것은 민간의 반응을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백성들이 화석강의 수탈을 견디지 못해 방랍(方臘)의 난을 일으켰으나 휘종은 회유 정책 대신 군대를 보내 잔혹하게 진압했으니 대내적으로 강경책(剛)을 쓴 것이다.
군사적으로 송조(宋朝)는 창건 이래 늘 힘이 약했다. 문관이 군대 통수권을 갖고 실제 작전 장령은 임시로 파견하니 병사는 장수를 모르고 장수는 병사를 몰랐다. 서기 1004년 요(遼)가 남침하자 송은 전연(澶淵)의 맹을 맺고 매년 은 10만 량과 비단 24만 필을 조공으로 바쳤다. 서기 1038년 이원호(李元昊)가 서하(西夏)를 세웠고 송은 서하와 싸울 때마다 패해 매년 비단 13만 필, 은 5만 량, 차 2만 근을 바쳤다. 대외적으로 유화책(柔)을 썼으니 송나라의 정책은 ‘강중유외’로 형용할 수 있다.
서기 1120년 금과 송은 요나라 협공 밀약을 맺고 요를 멸망시켰다. 서기 1125년 금은 요를 멸한 후 송을 공격했고 1126년 북송이 멸망했다. 금군이 송 휘종, 흠종과 황족 3천여 명을 사로잡아 갔으니 이것이 정강의 치욕이다. 유일하게 도망친 황족 강왕 조구(趙構)가 임안(절강 항주)에서 남송(南宋)을 세웠다.
제7과 ●○●○○● 중중(中中)
일원부시(一元復始) 이강처중(以剛處中)
오오상전(五五相傳) 이서아동(爾西我東)
증왈: 음양음양양음, 괘로는 정(井)이라.
해왈: 원나라 일대는 총 10세라. 지정(至正) 이후 할거하는 자가 많으니 이서아동의 형상이라.
일원(一元)이 다시 시작한다는 “일원부시”는 원나라 국호를 가리키며 몽골인이 새로운 조대(朝代)를 시작함을 뜻한다.
“이강처중”은 몽골인이 한인에 대해 매우 엄격하게 통치했음을 말한다. 몽골인은 한인을 3등과 4등 국민으로 분류했다. 원나라 규정에 따르면 매 20가구를 ‘갑(甲)’으로 편성하고 그 우두머리인 ‘갑주’는 몽골인이 맡았다. 또한 한인의 사냥, 무술 학습, 무기 소지, 집회 및 배신(拜神 신을 모시는 종교활동), 시장 거래, 야간 통행 등을 엄격히 금지했다.
“오오상전”은 원나라가 원 세조 쿠빌라이부터 원 순태제 토곤 테무르까지 총 10명의 황제가 있었음을 뜻하니 5와 5를 더하면 10이 된다.
“이서아동”은 원나라 멸망 후 몽골인들이 동서로 나뉘어 다시 통일되지 못함을 말한다. 몽골인들은 칭기즈칸부터 동서로 정벌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거대 제국을 건설했으나 원조(元朝)가 멸망한 후 각 칸국은 분열되어 곧 소멸했다.
제8과 ○○●●●○ 상상(上上)
일월여천(日月麗天) 기색약적(其色若赤)
면면연연(綿綿延延) 범십육엽(凡十六葉)
증왈: 양양음음음양, 괘로는 익(益)이라.
해왈: 일월은 명(明)이라. 적(赤)은 주(朱)이니 명대에 총 16군주(主)라.
“일월여천”은 명나라를 예언한다. 일(日)과 월(月)을 합하면 ‘명(明)’ 자가 된다. “기색약적”은 명나라 황제의 성씨가 ‘주(朱)’임을 가리킨다. 적색은 붉은색이고 주색 역시 붉은색이다. 또한 명나라는 오행 중 ‘화(火)’에 속하며 그 색은 붉은색이다. 태공 예언에서 붉은 빛이 회남에서 일어났다는 것도 같은 이치다.
“면면연연 범십육엽”은 명나라에 16명의 황제가 있을 것임을 뜻한다. 명나라는 태조 주원장부터 사종(思宗) 주유검(朱由檢 숭정제)까지 총 16명의 황제가 있었다.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함락한 후 남쪽으로 도망가 세워진 소위 남명 황제들은 정통 왕조인 청이 시작되었으므로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명조는 16위 황제이니 예언과 정확히 들어맞는다.
제9과 ○●○●●● 중상(中上)
수월유주(水月有主) 고월위군(古月為君)
십전절통(十傳絕統) 상경약빈(相敬若賓)
증왈: 양음양음음음, 괘로는 진(晉)이라.
해왈: 수월유주는 청(淸)이라. 고월(古月)은 호(胡)이니 호인이 임금이 됨은 천수(天數)라 강제로 할 수 없도다.
노승은 가경 10년에 태어나 올해 86세이니 이 이후는 감히 망령되이 논하지 않겠노라.
노승 수원(守元)의 풀이는 여기까지다. 그는 가경(嘉慶) 10년에 태어나 예언을 풀 때 86세였으므로 이후의 일은 감히 해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지막 다섯 과는 증(證)만 쓰고 해(解)를 쓰지 않았다.
“수월유주”는 파자로 합하면(水+月+主=淸) ‘청(淸)’ 자가 되니 청나라 왕조를 뜻한다. “고월위군(古月為君 고월 즉 오랑캐가 군주가 된다)”에서 ‘고월’을 합하면 ‘호(胡)’가 되니 淸朝는 만주족이 세운 왕조임을 가리킨다.
“십전절통(十傳絕統)”은 청나라에 10대 황제가 있음을 말한다. 청나라 입관 이후 순치부터 선통까지 정확히 10명의 황제가 있었다. ‘절통(絕統)’은 중의법으로 청조의 계통이 끊어짐을 뜻하는 동시에 마지막 황제의 연호인 ‘선통(宣統)’에서 청나라가 끝남을 의미한다.
“상경약빈(서로 손님처럼 공경함)”은 1912년 선통제가 퇴위 조서를 발표하고 대청 왕조가 역사에서 정식으로 물러날 때, 새로운 국민정부가 청조 왕실을 우대하여 퇴위한 황제가 계속 자금성에 거처하게 하고 외국 원수에 준하는 대우를 한 것을 말한다. 이는 역사상 대부분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과 대조적이다.
제10과 ●○●○●● 중하(中下)
시후우전(豕後牛前) 천인일구(千人一口)
오이도치(五二倒置) 붕래무구(朋來無咎)
증왈: 음양음양음음, 괘로는 건(蹇)이라.
이 과는 중화민국을 예언한다. 1911년 말 동맹회 혁명당원들이 각지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키자 대청 왕조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1912년 1월 1일 남경에 공화정부가 수립되었고 孫文이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다. “시후우전”이란 이 일을 가리킨다. 1911년은 신해년으로 돼지(豕)해이고, 1913년은 소(牛)해이므로 1912년은 ‘돼지 해 뒤 소 해 앞’이 된다.
“천인일구(千人一口)”는 파자로 ‘천(千)’, ‘인(人)’, ‘구(口)’를 합치면 화합할 ‘화(和)’ 자가 된다. 중화민국은 공화국(共和國)임을 뜻한다.
“오이도치(五二倒置)”에서 ‘오’와 ‘이’는 주역의 용어다. 6효 중 5효는 존위인 군(君)의 자리이고 2효는 신(臣)의 자리다. 군이 위에 있고 신이 아래에 있는 것이 정상인데 ‘오이도치’는 군신이 뒤바뀌었음을 뜻한다. 공화국의 국체는 주권이 인민에게 있고 국가 원수는 인민이 선출하며 탄핵할 수도 있으니 제왕 전제 국가와는 정반대라는 뜻이다.
“붕래무구(朋來無咎)”는 중화민국 통치 기간에 국력이 약해 일본 등의 침략을 받았으나 결국 근본적인 손상 없이 극복했음을 의미한다.
여기까지 《마전과》의 앞 10과는 완전히 해독되었으며 제갈량 예언의 정확도는 100%에 달한다. 이하 네 과는 오늘날 사람들의 해독을 기다리고 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big5.zhengjian.org/node/421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