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
【정견망】
현대 중국에서 많은 부모는 자녀가 용이 되기를 바라며, 가장 큰 소원은 아이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채택하는 방식은 대부분 ‘문제 풀이 전술’이라 아이들에게 독서가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생에 대한 희망마저 잃게 만든다. 사실 그 근원은 중공의 각종 학교에 대한 행정화된 관리 모델이 이미 교육을 본래 모습에서 벗어나게 한 데 있다.
어떤 이는 교육의 본질이 인류의 천진함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천진함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아마도 인간의 선량한 본성일 것이다! 중화민국 시절, 서양 과학을 배우러 해외로 떠난 첫 번째 유학생들 중 훗날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과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조상으로부터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계몽과 훈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예기》에서는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라고 했다. 보아하니 학문으로 명성을 남기려면 선을 행하고 덕을 쌓는 것이 관건인 듯하다.
청나라 때 이병수(李秉綬 자 패지佩之 또는 운보芸甫)라는 관리가 있었다. 공부 도수사(都水司) 낭중을 맡았을 때 민심을 크게 얻어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이수부(李水部)’라 불렸다. 그는 백성의 근심을 해결하는 능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데도 매우 높은 재능을 지녔다.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서화계와 예술계의 명품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는 줄곧 한 선조에 대한 경의와 숭상이 남아 있었다.
그의 이 조상을 말하자면 고관대작도 아니었고 조예 깊은 화가나 시인도 아니었다. 젊은 시절에는 한때 가난에 빠지기도 했다. 빚을 피하려고 친척 집에 갔으나, 섣달그믐날 화로 옆에 앉아 몸을 녹이다가 하인들에게 멸시와 꾸중을 들었다. 결국 추운 겨울밤, 보따리 하나와 우산 하나만 들고 친척 집을 떠났다.
비록 많은 냉대를 받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너그러웠고 자주 협기를 부려 남을 도왔다. 광서(廣西)로 생계를 꾸리러 가는 길에 돈을 좀 벌었으나, 길을 가며 보시하고 위급한 이를 구제하며 곤란한 이를 돕다 보니 금방 몸에 지닌 돈을 다 써버렸다. 후에 그는 길을 돌아 교지(交趾 지금의 베트남 북부)에 이르렀는데, 그곳의 육계가 좋아 보여 일부를 구입해 다시 양광(兩廣) 지역으로 운반해 팔았다. 몇 차례 오가니 은 팔천 냥을 벌게 되었다.
하루는 길에서 갑자기 지인 한 명을 만났다. 이 사람은 태평군(太平郡 산서 소재)의 지방 관리였다. 그 지인의 얼굴에 낙담한 기색이 가득한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그 사람이 말했다. “내가 예전에 어느 현에서 재직할 때 은 팔천 냥을 유용했는데, 이제 새로 부임한 관리가 이를 발견하고 나를 조정에 고발했네. 이 부족한 금액을 메우지 못하면 관직에서 쫓겨나 조사를 받을 수밖에 없네. 관직을 잃는 것은 고사하고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 같다네!”
이병수의 조상은 이 말을 듣고 주저 없이 자신의 은 팔천 냥을 꺼내며 그 관리에게 말했다. “제게 지금 마침 이 돈이 있으니, 망설이지 말고 어서 가져가 급한 불을 끄십시오!”
관리가 대답했다.
“당신이 반평생 고생해서 겨우 번 돈인데, 이제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어찌 내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이 옹이 말했다.
“돈이야 없으면 다시 벌면 되지만, 당신이 이 돈을 내지 못하면 살길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말을 마치고 은을 그 관리에게 건네준 뒤 몸을 돌려 떠났다.
후에 그 관리는 이 옹의 도움 덕분에 화를 면했다. 이 옹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다시 장사할 좋은 방도를 생각해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이 씨 가문은 일대의 부유한 대가족이 되었다. 당시 그는 십여 명의 젊은이를 후원하여 그들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왔는데, 이병수가 바로 그중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이었다.
훗날 성취를 이룬 이는 이 옹에게 은혜를 입은 동향 사람이나 친척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장손 이종한(李宗瀚 자 북명北溟, 호 공박公博 또는 춘호春湖) 역시 조정의 중신이 되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진사에 합격했고 건륭 연간에 서길사로 뽑혔으며, 가경 연간에는 6품관에서 단숨에 2품까지 승진하여 전후로 복건과 절강에 파견되어 향시를 주관했다. 그는 조상의 덕행을 이어받아 당시 유림 중의 사람들에게 깊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청조 함풍(咸豐) 연간에 여감(餘鑒 자 함휘涵暉, 호 경호鏡湖)이라는 청년이 배를 타고 절강으로 시험을 보러 가고 있었다. 강을 건널 때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힐 뻔했으나 결국 무사히 육지에 도착했다. 바로 그때 그는 강물 위에서 배 한 척이 풍랑에 휩쓸리는 것을 보았다. 배에는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배는 곧 뒤집혔고 많은 사람이 물에 빠졌다.
다급해진 상황에서 여감은 육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어서 사람을 구해주시오! 한 명을 구하면 내가 오십 냥을 주겠소!”
이 말을 듣고 강가의 어부들이 잇달아 물속으로 뛰어들어 힘껏 구조에 나섰다. 결국 많은 사람이 구조되어 뭍으로 올라왔다.
이때 여감은 어부들에게 깊이 허리를 굽혀 절하며 솔직하게 말했다.
“여러분, 저는 일개 선비일 뿐이라 몸에 지닌 돈이 삼십 냥밖에 없습니다. 제가 방금 ‘오십 냥’이라고 한 것은 결코 여러분을 속이려 한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생명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차마 견딜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는 보따리를 풀어 그 안의 은을 모두 꺼내 사람을 구한 어부들에게 건넸다. 결국 어부들은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그 삼십 냥을 받았다.
그 후 그의 시험 운은 매우 순조로웠다. 함풍 9년(1859년) 향시에 응시하여 해원(解元)으로 합격했고, 동치 7년(1868년) 전시(殿試)에 응시해 다시 진사로 합격했다. 후에 그는 조정에 의해 한림원에 뽑혀 편수 직책을 맡았다. 당시 많은 사람은 이것이 바로 여감이 드러내지 않은 깊은 덕행이 있었기에 복보를 받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는 “모든 것은 덕에서 오고, 모든 것은 선에서 생겨난다”라는 말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참고자료: 선통 《태주지》 권28 〈유우流寓〉, 《북동원필록北東園筆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1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