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연(了緣)
【정견망】
용왕의 말에 따르면, 금고봉은 대우(大禹)가 치수(治水)할 때 강과 바다의 깊이를 측정하기 위해 사용했던 정자(定子, 측정 도구)였으며, 한 덩이 신철(神鐵)이었다고 한다.
마음이 무쇠처럼 견고해야만 시작이 있고 끝이 있을 수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사람 마음은 바다와 비슷해서, 사람 마음을 안정[定住]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신정각(正信正覺)뿐이다. 이 정해신침(定海神針)이 안정시킨 것은 바로 사람의 주심골(主心骨 주의식)이다. 마음에 정념(正念)이 있어, 세상에서 정행(正行)하며, 우주 만물과 같은 주파수를 지니고 창세의 대법을 받들면, 미혹의 장애를 깨고 사마(邪魔)를 멸하며 중생을 구해 법선(法船)에 오르는 것이다. 생사를 내려놓고 자비로 교화해 선념(善念)을 각성시키면 사악은 저절로 멸하며, 운운중생(芸芸衆生)과 손잡고 같은 마음 같은 덕으로 천지 조화의 공을 누리고 말세의 겁난을 넘겨 정법의 사명을 실천할 수 있다. 말법(末法) 말세(末世)에 신우주를 개창하는 위덕을 만인의 뜻을 모아 이룩해, 환우(寰宇)를 빛내고 만물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정법 제자는 공덕이 무량하니, 무엇인들 정(定)할 수 있으니 어찌 바다에 국한되겠는가.
여의지법(如意之法)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여의금고봉은 바다 밑에 천 년 동안 쌓여 요마귀괴(妖魔鬼怪)를 진압하고 한 해역의 안녕을 지켰으니, 그 덕이 크다. 세상에 나올 때가 되어 오공을 보자 금빛이 만 갈래로 뻗치며 비정상적으로 기뻐했다. 오공이 옷을 걷어 올리고 앞으로 나아가 만져보니, 바로 쇠기둥이었다. 곧고 정직한 것이 마치 마음속의 한갈래 주장(主杖) 같았다.
오공이 말했다.
“너무 굵고 너무 길구나. 좀 더 짧고 가늘면 쓸 만할 텐데.”
말이 끝나자마자 그 보물은 몇 자 짧아지고 한 바퀴 가늘어졌다. 참으로 마음이 뜻을 따라 움직이니, 여의롭기 그지없었다! 손오공은 기뻐하며 다시 좀 더 가늘어지라고 외쳤고, 그것을 들고 자세히 보니 양쪽 끝은 두 개의 금고(金箍 금 테두리)였다.
하하! 마음에도 금고를 씌워야 하니, 마음을 함부로 방종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일단 방종하면 빗나가고, 빗나가면 변수가 생긴다. 사람에게는 불성(佛性)이 있지만 마성(魔性)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지 일념에 마로 변하니, 마음에도 테를 씌워야 한다. 오직 정신(正信)만이 그것에 테를 씌울 수 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심법(心法)의 단속을 받지 않고 거리낌없이 자유를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소위 자유라는 것은 단지 마성(魔性)을 방종한 것에 불과하며, 무지(無知)의 길에서 인과의 보응을 두려워하지 않음에 불과하다.
중간 부분은 오철(烏鐵 검은 철)며, 고리 바로 옆에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이라는 한 줄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보물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고, 마음과 통하며, 커질 수도 작아질 수도 있고,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어 뜻대로 사용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렇게 좋은 보물을 손에 쥐는 것은 곧 책임이다. 취경인(取經人)이 서쪽으로 가는 여정의 보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오공은 이때 아직 깨닫지 못하고 기뻐할 따름이었으며, 그저 급히 재주를 부리고 싶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신통력을 부리며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니, 수정궁이 혼란에 빠졌다. 놀란 용왕은 간담이 서늘해졌고, 새우 병사 게 장군은 머리를 움츠린 채 사방으로 숨었다.
이때의 오공은 손안에 들어온 중보(重寶)가 어디에 중점이 있는지 몰랐다. 여의금고봉은 그에게 요마(妖魔)를 항복시키라고 준 것이지, 강한 척하고 약자를 괴롭히라고 준 것이 아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가난한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면 허리를 펴고 배를 내민다고 했다. 원숭이가 갑자기 중보를 얻어 힘이 무수히 확대되었으니, 이는 능력이 더욱 강해진 것과 같다. 일시적으로 머리가 혼미해져 책임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어 했다. 최소한 복장이라도 보물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욕망이 팽창하자 심성이 곧 떨어졌다.
또다시 요구하며, 갑옷을 갖춰 입지 않으면 떼를 쓰며 이 신철(神鐵)의 위력을 용왕에게 시험해 보겠다고 했다. 이빨을 드러냈으니, 마성(魔性)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 보물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사람의 욕망은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함께 팽창한다. 노제자라 할지라도 1만 위안을 얻을 때와 10만 위안을 얻을 때의 생각은 분명히 다를 것이며, 또 일부 사욕(私慾)도 추가될 것이다. 정말로 마음이 고요한 물과 같고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지 여부는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확연히 드러나니, 고험은 없는 곳이 없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이상이 연공(煉功)해도 공이 자라지 않는 두 가지 원인이다. ‘고층차 중의 법을 모르고서는 수련할 방법이 없으며, 안으로 수련하지 않아 心性(씬씽)이 수련되지 않으면 공이 자라지 않는다.’ 바로 이 두 가지 원인이다.”
우리가 키워낸 이 공(功)은 외적으로는 여의금고봉과 같다. 정념정행(正念正行)으로 마난을 돌파하고 사악함을 멸하며 흑수와 썩은 귀신을 제거하는 것은 바로 공기둥이 발휘하는 법의 위력에 의존한다.
비록 우리 사람의 일면은 아직 수련 중이고 본체(本體)가 아직 신체(神體)로 수련되지 않았지만, 사람의 일면이 있으니 국한이 있어 말법 말세의 삼계 내 변이된 법칙에 침식당하고, 구세력이 자그마한 사람마음 하나를 붙잡고 무한정 박해하는 것에 제약을 받지만, 우리의 수련 잘된 일면은 정법(正法)에 사용할 수 있다. 대법에서 우리는 자비란 정신(正神)의 에너지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선(善)을 닦고 자비심을 내는 것이 바로 여의금고봉의 최대 위력을 발휘할 때이다. 심성은 본래 자비에서 왔으니, 정신(正神)의 에너지가 모여 공기둥을 이루면 천지를 개벽하고 만마(萬魔)를 항복시키며 사악을 모두 멸할 수 있다. 정념의 조절에 따라 불가능이란 없으니, 어찌 뜻대로 되지 않음을 걱정하겠는가?
발정념(發正念)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불법신통(佛法神通)으로 악을 제거하는 능력이다. 수련하여 나온 에너지는 뜻대로 사용할 수 있으며, 인간 세상에서 법을 바로잡고 온갖 신적(神跡)을 체험하기에 충분하다. 아직 완전히 고에너지로 대체되지 않아 잠시 수련이 완성되지 않은 육신으로, 인간 세상에서 신(神)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정념정행하는 제자는 마치 인간 세상에 걸어 다니는 소우주(小宇宙)와 같다. 모든 제자는 자신이 책임지는 범위를 잘 동화시킬 수 있으며, 모든 소우주의 에너지가 하나로 연결되면 법이 인간 세상을 바로잡는 신교(神橋)를 세우기에 충분하다.
지구 업그레이드는 대법이 널리 전파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법선(法船) 역시 법이 전해지는 것이며, 대법은 우주의 모든 지혜를 포괄한다. 개지개혜(開智開慧)한 제자는 이행하는 사명이 많을수록 본체의 전화(轉化)가 더 좋아지고 더욱 신(神)에 가까워지며, 신체(身體)라는 이 소우주가 동화하는 에너지도 더욱 커지고, 중생이 각성할 기연도 더 많아진다. 그러므로 신(神)의 길은 멀리 있지 않고 마음속에 있다. 사부님께 수련이 언제 끝날지 묻기보다는, 자신의 심성이 언제 수련하여 원만해질지 물어보는 것이 낫다.
공기둥은 사실 심성의 체현이다. 다행히 사부님께서 자비하시어 우리에게 정법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을 주셨다. 잘 수련된 일면은 표준에 도달하자마자 격리시켜 제자들에게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셨으니, 공기둥이 꺾여 완전히 훼손되는 일은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반복되는 변덕스러운 사람마음으로 인해 공기둥이 벌써 팔백 번도 더 부러졌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똑바로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람마음이다. 인성(人性)의 악(惡)을 많이 보면 모두 서약을 파기하고 구원하지 않고 싶어진다.
그런데 수련은 기어이 인간의 모든 한계를 도전하는 것이며, 난이도가 클수록 위덕(威德)도 커진다.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을 똑똑히 보는 것이다. 사람마음이 나올 때 자신마저 스스로 경멸할 정도지만 누락이 있음이 바로 승화의 계기가 있는 것이다. 마음에 정념이 있고, 부족한 것을 점검하고 보완하는 데 게으르지 않으면 제고할 수 있다. 누군들 이렇게 수련해 오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 자비심을 개발할 수 있겠는가. 수련 과정에서 그 어떤 순간에도 자비심을 지켜야 한다. 일을 만나면 우선 안으로 찾고, 심신을 바로잡아 무사무아(無私無我)를 이루고 만물을 포용하면, 마난은 고개를 내밀자마자 상쇄된다. 금고봉은 정말 여의롭게 사용될 것이다.
일단 밖으로 찾고, 밖으로 구하면 자비심이 나오지 못하고 가려지며, 사심(私心) 잡념(雜念)이 싹터 생기기만 하면 스스로 속인 차원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금고봉은 다루기 어렵고 위력이 크게 줄어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쩌면 한 번 휘둘러도 손이 저릿할 수 있다. 당신이 보라, 오공은 한 봉(棒)을 손에 쥐고도 위풍당당하다. 도리가 통하는 요괴는 당승(唐僧)이 와서 제도하고, 도리가 통하지 않는 요괴는 금고봉이 와서 제도하니, 한 방으로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
그러나 실수할 때도 많았다. 예를 들어 당승이 착한 사람 행세만 하고 사람과 요괴를 분간하지 못해 심성이 바닥나고 사람마음이 주도권을 잡아 정념이 얼마 남지 않아 원숭이가 화를 내게 하면 금고봉의 위력은 크게 줄어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요괴에게 빼앗기고 원숭이가 요괴에게 역으로 제압당해 손해를 보거나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다. 이로 인해 이 여정의 구구 팔십일 난이 다채롭고 기괴해져서, 사람들이 글로 써서 읽으며 즐겁고 이야기거리로 삼는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인식을 깨우치며, 수련의 엄숙함을 알게 한다.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도 한번 웃을 수 있다.
원숭이는 결국 구원병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일방(一方)에 어려움이 생기면 팔방(八方)에서 지원하고, 온 하늘의 신불(神佛)이 기꺼이 다 도우려 하기에, 취경인(取經人)의 일은 구하기만 하면 반드시 응답이 있다. 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은 잘하지 못한 것으로, 누구에게 구하러 가든 다 체면을 구기는 일이다. 각 방면의 신선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요괴를 물리치고 급수를 올릴 수 있다면, 위덕(威德) 역시 따라서 깎이고 허풍을 떨 이야기거리도 줄어든다.
수련의 일은 완전히 자신이 수련해 올라오는 것이 아니다. 안으로 찾지 않고 밖으로 구하며, 외부 도움에 의지하여 관을 넘는 것은 남이 씹던 밥을 먹는 것과 다름없고, 남과 함께 한 그릇 국을 나누는 것이니, 그 맛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물며 얼굴에 맞은 따귀는 떼어낼 수 없다. 여의로워야 할 때 여의롭지 못하면 고생을 겪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진하는 것과 정진하지 않는 것의 구별이다. 격차는 본성을 깨닫고 제고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핑계를 찾고 남에게 의존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은 모두 유일무이한 것인데 하물며 수련인임에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반드시 자신의 것을 수련해내고 위덕을 수립해야만 독자적으로 일면(一面)을 맡아 우주를 수호하는 불(佛)·도(道)·신(神)이 될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3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