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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장강이 수레바퀴를 묻다

진잠(陳潛)

【정견망】

“시랑당도(豺狼當道 승냥이와 이리가 길을 막다)”는 유명한 고사성어로 많은 사람이 그 뜻을 실감하지만 막상 이 이야기의 출처를 모르는 이들도 있다.

후한(後漢) 순제(順帝) 유보(劉保)는 환관의 도움을 받아 즉위했기에 환관의 권세가 매우 컸다. 순제의 황후 양납(梁妠)이 총애를 받자 그녀의 오빠인 양기(梁冀)가 대장군 직을 수여받았고 양씨 가문의 세력이 방대해졌다. 이 두 세력(환관과 외척)은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며 서로 결탁했는데 특히 양기는 조정을 장악하고 재물을 갈취하며 백성을 핍박했다. 윗물이 맑지 않으니 아랫물도 흐려져 전국 각지의 크고 작은 관리들이 모두 탐오부패하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백성들은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켜 수많은 탐관오리를 죽였으니 당시 한조(漢朝)는 이미 위태롭고 나라가 어지러웠다.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순제는 관리들을 정돈하기로 결정했다. 서기 142년 조정에서 주거(周舉), 두교(杜喬), 장강(張綱) 등 여덟 명의 대신을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순시하며 탐오와 부패를 조사하게 했다.

여덟 명의 흠차(欽差)대신 중 장강은 나이가 가장 젊고 관직이 가장 낮았으나 유방의 명신 장량(張良)의 후손이었다. 장강은 가학을 계승하여 어릴 때부터 경서를 연구했다. 관리 집안 출신임에도 도덕 수양에 중점을 두어 방탕한 습기가 없었으며 여러 차례 효렴(孝廉)으로 추천되었다. 사도(司徒)가 장강이 덕과 재능을 겸비했음을 알고 그를 조정의 어사(禦史)로 초빙했다.

장강은 관리로서 정직하고 청렴했으며 의로움을 지키며 과감히 직언을 했다. 그는 나라를 걱정하여 순제에게 상소를 올려 조정의 혼란스러운 모습과 자신의 견해를 진술하며 간언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폐하께서는 성스러운 생각을 잠시 멈추시고 좌우를 덜어내심으로써 하늘의 마음에 부응하소서”라고 했으나 순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장강은 조정의 간신들이야말로 정치 부패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조정의 기강이 바르지 않다면 관리가 내려가 고찰한다 해도 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 보았다. 동시에 장강은 양기가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으며 이번 파견이 기회를 보아 자신을 배척하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장강은 분개한 마음을 품고 서울을 출발하여 일 리 남짓 떨어진 낙양(洛陽) 도정(都亭)에 이르렀을 때 수레를 멈추라고 명령했다. 수레에서 내린 장강은 사람들에게 수레바퀴를 떼어 땅에 묻으라고 명했다. 수하들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가가 묻자 장강은 이를 갈며 말했다. “승냥이와 이리가 길을 막고 있는데 어찌 여우나 너구리의 죄를 묻겠는가”(豺狼當道, 安問狐狸)! 이 말은 조정의 간신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지방의 소리(小吏)를 정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장강은 길가 도정에 종이와 먹을 차려놓고 그 자리에서 상소문을 써서 법을 어긴 여러 명의 조정 신료들을 탄핵했다. 양기에 대해서는 외척의 몸으로 황은을 입었음에도 권력을 독점해 악을 행하고 충량한 이들을 모함하며 탐욕이 끝이 없고 욕심대로 행동한다며 직언했다. 이어 양기의 15가지 죄목을 열거하며 이는 모두 사면할 수 없는 것으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강이 올린 상소는 조정과 재야를 진동시켰다. 순제는 이를 본 후 장강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으나 여전히 양기 등을 처벌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시 방치해 두었다. 양기는 장강을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광릉군(廣陵郡)에는 도적 떼가 있어 양주(揚州)와 서주(徐州) 지역에서 난을 일으킨 지 이미 10여 년이 되었다. 우두머리 장영(張嬰)은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자주 현지 관리들을 살해했으며 역대 태수들이 모두 진압하지 못했다. 양기는 독한 계책을 내어 상서(尙書)에게 암시를 주어 장강을 광릉 태수로 전임시켜 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칼을 빌려 죽임)을 꾀했다. 장강은 명을 받들었으나 이전 태수들처럼 조정에 병마를 요청하지 않고 홀로 부임지로 향했다.

광릉에 도착한 장강은 10여 명의 측근 관리와 군사만을 데리고 직접 도적의 진영을 찾아가 문지기에게 장영을 만나겠다고 말했다. 신임 태수가 직접 찾아온 것에 장영은 매우 놀랐다. 그는 의구심을 품고 진영 문을 굳게 잠가 만나주지 않았다. 장강은 그 기색을 보고도 화내지 않았으며 성실하게 문지기에게 다시 통보하게 했다. 장영은 장강의 정성에 감동하여 나와서 알현하고 장강을 안으로 모셔 상석에 앉혔다.

장강은 간곡한 태도로 장영과 대화하며 관리들의 탐욕과 잔혹함이 민란의 근본 원인임을 분석했고 장영 일행을 탓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이 말은 장영의 마음을 울렸다. 장강은 이어 말했다. “이천석(二千石 태수)가 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자네들이) 이를 대하는 방식 또한 의롭지 못했다. 지금 주상께서 어질고 성스러우시어 문덕(文德)으로 반란을 굴복시키고자 하시기에 나를 보내 작록(爵祿)으로 서로 영화롭게 하려 하시는 것이지 형벌을 가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진실로 화를 돌려 복으로 만들 때다. 만약 의로움을 듣고도 복종하지 않아 천자께서 크게 진노하시어 형주, 양주, 연주, 예주의 대군이 구름처럼 모여든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장강이 장영 등의 어려운 처지를 분석하고 번거로움을 마다치 않고 이해관계를 명확히 설명하며 장영이 숙고하게 했다.

장영은 장강의 진실함에 감동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털어놓았다. 실로 관리들의 압박과 능멸을 견디다 못해 어쩔 수 없이 무리를 지어 봉기하여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온 것이라 했다. 그러나 장영은 항복한 후 수하들이 관부에 체포되어 살육당할까 봐 걱정했다. 장강은 하늘에 맹세하며 만약 장영 등이 귀순하려 한다면 자신은 누구도 처벌하지 않겠다고 했다.

장강의 보증을 받은 다음 날 장영은 가족과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스스로 몸을 묶어 귀순했다. 장강은 장영과 만나 술을 나누며 즐거워했다. 장강은 온 사람들을 모두 해산시켜 살고자 하는 이에게는 관부에서 집과 땅을 마련해 주었고 관부에서 일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장강이 직접 물어보고 추천하니 사람들이 마음으로 승복하여 한동안 태평성대를 누렸다.

10여 년간 지속된 반란이 단 한 명의 병사도 움직이지 않고 이렇게 평정되었다. 장강은 용기와 지략이 있어 혼자서 천군만마보다 나았으니 모든 이가 감탄하고 존경했다. 조정에서 공을 논해 상을 내림이 마땅했으나 양기가 거칠게 저지했다. 순제는 장강을 찬양하며 그를 발탁해 중용하려 했으나 장영 등이 상소를 올려 장강을 남겨달라고 청하자 순제가 이를 허락했다.

장강은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며 백성을 사랑했고 민정을 살폈다. 현지 기후가 가물다는 것을 발견하고 백성들을 조직해 남북 방향으로 총 길이 4킬로미터의 수로를 파서 관개 문제를 해결하니 후세 사람들이 이를 장강하(張綱河)라 불렀고 현지에 형성된 마을은 장강진(張綱鎭)이라 불렸다. 장강은 과로로 병이 들었다. 많은 백성이 그를 위해 복을 빌며 천 년 만 년에 어느 때에 다시 이런 분을 뵙겠는가라고 말했으나 안타깝게도 이듬해 세상을 떠나니 향년 46세였다.

장례를 치를 때 현지 백성들이 노소를 불문하고 부축하며 모여든 수가 헤아릴 수 없었다. 장영은 500여 명을 데리고 상복을 입고 장례에 참여하여 장강의 고향까지 가서 무덤을 만들고 영구를 안치했다. 순제도 조서를 내려 애도했다.

장강매륜(張綱埋輪 장강이 수레바퀴를 묻다)은 장강이 도의를 굳게 지키고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직언으로 간언한 고귀한 기개를 보여준다. 후세 사람들은 이 고사를 자주 인용했으며 시랑당도(豺狼當道) 역시 이때부터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장강의 전기는 사서에 수록되어 《후한서(後漢書)》 열전에 〈장강전〉이 있다. 광릉에는 장강하, 장강진(후에 커뮤니티로 변함)이 보존되어 있으며 나중에 장강묘와 장강교가 건립되었다. 사천성(四川省) 팽산현(彭山縣)은 장강의 출생지로 현지에서는 그를 충효의 고장을 대표하는 문화 인물로 삼아 동상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

다시 간신 양기를 보자. 그는 형상이 추하고 언어도 명확하지 않았으며 학식이 얕았다. 어릴 때부터 빈둥거리며 놀고 방자했으며 오직 노는 것과 사냥만을 좋아했다. 양기에게는 두 여동생이 있었는데 양납은 순제의 황후였고 양여영(梁女瑩)은 한나라 환제(桓帝)의 황후였다. 순제가 죽은 후 양납은 차례로 두 살 된 충제(沖帝)와 여덟 살 된 질제(質帝)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우고 자신이 권력을 틀어쥐고 20년 가까이 수렴청정했다. 질제는 양기를 발호장군(跋扈將軍)이라 불렀다는 이유로 양기에게 독살당했으며 양기의 조작 하에 다시 환제를 옹립했다.

양기와 그의 아내 손수(孫壽)는 사치가 극에 달해 희귀한 보물을 수집하고 마음대로 백성을 약탈해 노비로 삼았으며 호화 저택과 임원을 황실 규모로 확장했다. 매년 황궁에 올리는 공물은 먼저 양기의 막부로 보내 상등품을 남겨둔 후 하등품을 황궁으로 보냈다. 양기는 흉악하고 잔인해서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 평민부터 관리 그리고 황제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눈에 거슬리면 반드시 방법을 찾아 처벌하거나 죽였다. 그의 두 손은 피로 물들었고 환제는 대권을 잃었다.

서기 159년 양여영이 총애를 잃고 분개하여 죽자 양기는 사람을 보내 환제의 총비 등맹녀(鄧猛女)의 어머니를 암살하려 했다. 암살에 실패한 후 등맹녀의 어머니가 궁에 들어가 양기의 죄상을 폭로하자 환제는 크게 노해 중상시(中常侍) 단초(單超) 등과 밀모해 양기를 주살하기로 했다. 사례교위(司隸校尉) 장표(張彪)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양기의 막부를 포위하고 장군 인수를 몰수하니 양기와 손수는 그날 자살했다. 양기 일당과 일가친척은 모두 주살되었으며 백성들은 이를 두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