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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록과 생사는 모두 하늘이 정하는 것

유효(劉曉)

【정견망】

호남 다릉현(茶陵縣)의 소금충(蕭錦忠)은 청 도광 25년(1845년) 을사년 과거에서 장원 급제자로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를 지냈다. 그가 현달하기 전 그믐날 밤 꿈에 천문(天門)에 올라 어느 궁전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궁전 탁자 위에는 천하 선비들의 성명이 적힌 명부가 놓여 있었다. 책자 첫 줄을 펼치니 소금충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모(某)과 장원’이라 쓰여 있었다. 그 뒤에도 글자가 있었으나 종이가 접혀 볼 수 없었다. 이때 한 관리가 접힌 곳을 들춰 보여주니 원래 ‘사어화(死於火, 불에 타 죽음)’라는 세 글자가 있었다. 소금충은 크게 놀라 잠에서 깼다.

소금충은 본래 이 이름이 아니었으나 꿈속의 징조로 인해 이름을 소금충으로 고쳤다. 그 후 과연 을사과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는 평소 술을 즐겼으나 조금만 마셔도 취하곤 했다. 어느 해 겨울 친척과 오랜 벗이 그를 초청해 술을 대접했고 밤이 깊어 자고 가기를 청했다. 날씨가 추웠기에 방안에 숯을 피워 온기를 돋웠다.

소금충은 문을 닫고 혼자 화로를 둘러싸고 앉아 있다가 몹시 피곤하여 곧 잠이 들었다. 발이 숯불 위에 놓였으나 취한 탓에 깨닫지 못했고 결국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로 보건대 천하의 일은 모두 이미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녕(海寧) 진씨(陳氏) 세가 출신의 청대 학자 진기원(陳其元)은 일찍이 자기 가문에서 일어난 두 가지 ‘명은 하늘이 정한다’는 일을 들려준 적이 있다.

그의 조부는 도광 2년 안휘(安徽) 태평부통판(太平府通判)을 지냈는데 관례에 따르면 이 관직은 경성으로 군량을 압운하는 책임을 맡아야 했다. 그러나 여주부통판 동(董) 모 씨가 뒷구멍으로 손을 써서 이 소임을 가로챘다. 많은 이가 보기에 경성 행은 좋은 자리였기에 사람들이 조부를 위해 불평을 터뜨렸으나 조부는 개의치 않았다.

누가 알았으랴. 동 씨가 군량을 압운해 북경에 도착했을 때 마침 조운(漕運) 병사들의 뇌물 사건이 터졌고 압운 관원도 연루되어 동 씨는 형부(刑部)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형부에서 동 씨는 엄한 고문을 당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진기원의 조부는 이미 저주지부(滁州知府)로 옮겨가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했다. “이 처분은 본래 내가 받아야 할 것이었는데 뜻밖에 동 씨가 이 자리를 가로챘으니 이는 나를 대신해 죄를 받는 것인가?”

가경 10년 진기원의 부친과 항주 내각학사 진숭경(陳嵩慶)은 함께 국사관(國史館)에서 등록(謄錄)으로 일했는데 의서(議敘)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염고대사(鹽庫大使)에 나갈 차례였다. ‘의서’란 청대 관원이 공이 있을 때 이부(吏部)에서 포상을 논의하는 제도이며 추천으로 임용된 관원도 의서라 칭했다. 경성의 후보 명단 중 진숭경이 1순위였다.

어느 날 밤 진숭경은 두 친구와 술을 마시며 매우 즐겁게 보냈다. 결과적으로 다음 날 이부에 이력서를 제출해야 했으나 취해서 가지 못했다. 마침 하남성 염고대사 자리가 비었으나 진숭경은 현장에 없다는 이유로 후보 자격이 취소되었다. 그는 크게 낙담했고 동료들도 그를 위해 애석해했다.

하지만 얼마 후 진숭경은 진사에 합격하여 한림원에 들어갔으며 이후 관직이 내각학사, 예부시랑에 이르렀다. 도광 임오년(1822년) 그는 복건성 향시를 주관하기도 했다. 그때 진기원의 부친은 막 석마장대사(石碼場大使, 복건성 염장의 전담 관리)에서 복건 동안현령(同安縣令)으로 승진해 두 사람은 고사장에서 상봉했다.

진숭경이 말했다. “만약 그날 술에 취해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면 오늘날 하남의 어느 현령에 불과했을 것이오.” 이로써 모든 일은 마땅히 하늘이 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청조 함풍 연간에 강소포정사(江蘇布政使)를 지낸 만계침(萬啓琛)의 집안은 전당포를 여럿 운영했다. 태평천국군이 남하할 때 그의 전당포들은 자주 약탈과 파괴를 당했으나 당시 그는 살필 여력이 없었다.

만 씨 집안은 성이 오(吳) 씨인 사람을 고용해 전당포 영업을 총괄하게 했다. 당시 경보를 듣고 미리 달아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나 오 집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말했다. “지킬 수 있으면 지키는 것이고 만약 적군이 정말 온다면 오직 죽음으로 직무에 순절해야 주인에게 떳떳할 수 있다. 적군이 오지도 않았는데 먼저 달아난다면 어찌 주인을 대하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군이 성안으로 쳐들어와 금은보화를 갈취하려 했다. 주지 않자 형벌을 가하고 연기로 훈증하니 그는 여러 차례 기절했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하루는 고문을 당해 거의 죽게 되자 태평군은 그를 담장 밖으로 던져버렸는데 담 밖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혼절하여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오 씨가 깨어났을 때 갑자기 어느 관원이 시체들 사이로 와서 명단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대답 소리도 들었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관원이 다시 이름을 부르라고 명하자 옆에서 누군가 말했다. “이 오 씨는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다. 이번 사망 명단에 들어있지 않고 아직 양수(陽壽)가 다하지 않았으니 장래에 수부(水府)에 속할 사람이다.”

잠시 후 주위가 조용해졌다. 날이 밝자 오 씨는 시체 더미에서 기어 나와 숨을 곳을 찾았다.

태평군이 물러간 후 그는 자신의 경험을 주인들에게 상세히 알리고 곧 사직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주인들도 허락했다.

고향에 돌아온 오 씨는 일 년 넘게 감히 문밖을 나서지 않았고 물이 있는 곳은 어디든 각별히 주의했다. 그의 딸이 일 리 남짓 떨어진 집으로 시집갔는데 오랫동안 보지 못했기에 그는 딸의 집으로 보러 갔다. 딸은 아버지가 오자 식사를 대접하며 머물기를 청했으나 그는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했다. 막 떠나려 할 때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식사를 마치고 가기로 했다.

식사 후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치자 오 씨는 작은 나귀 수레를 타고 돌아가려 했고 딸은 일꾼 한 명을 보내 배웅하게 했다. 수레가 밭두렁을 지날 때 오 씨는 도랑에 빠졌고 부축해 일으켰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신기한 것은 그가 지나온 곳이 모두 마른 땅이었고 그 도랑은 방금 내린 소나기로 형성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만약 조금만 늦게 지나갔다면 도랑도 말랐을 것이다. 이로 보건대 사람의 운명은 참으로 하늘이 정한 것이니 사람이 어찌 하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225